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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밀리어 에세이’ 두 권의 사뭇 다른 느낌

앤 패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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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간격을 두고 읽은 앤 패디먼(Anne Fediman)의 ‘퍼밀리어 에세이(familiar essay)’ 두 권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저번 것이 아주 좋았다면, 이번 것은 몹시 거북하기까지 하다.

한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선호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역량은 널리 알려진 터여서 시집이 주는 감동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기에 산문집 두 권에서 받은 호감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새로 나온 그 시인의 산문집은 읽다 말았다.

그새 공감의 폭이 좁아진 것은 그 시인이 변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변덕을 부린 탓일까? 7년의 간격을 두고 읽은 앤 패디먼(Anne Fediman)의 ‘퍼밀리어 에세이(familiar essay)’ 두 권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저번 것이 아주 좋았다면, 이번 것은 몹시 거북하기까지 하다. 머리말에서 책에 실린 글들에 대한 암시를 보고 부러 가장 거북할 것 같은 글을 맨 먼저 읽었다.

결과는 내 예상대로였다. 내게 앤 패디먼의 최신작이 불편한 것은 옮긴이가 게으르거나 인생경험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누구든 이 책을 읽고 나서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면, 그건 분명 내가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향기를 놓쳐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이제야 비로소 앤 패디먼의 실체를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어서다.

나는 그녀의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안온한 배경이 달갑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체질상 비판받는 걸 무지 싫어한다. 그러려면 뭐 하러 거론하느냐는 반응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유쾌한 반응을 무릅쓰는 까닭은 한 저자의 같은 형식의 책에 대한 느낌이 어째서 이리 판이한지 나 스스로 의문을 풀고 싶어서다.

『세렌디피티 수집광』(김예리나 옮김, 행복한상상, 2008)에 수록된 ‘성조기 재발견’ 이야기는 ‘은근한’ 미국식 애국주의의 전형이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면으로 된 천 한 장」은 미국 국기 성조기다. 앤 패디먼은 성조기에 얽힌 이야기를 백과사전 식으로 다양하게 들려준다.

로버트 저스틴 골드스타인이라는 사람이 편집한『성조기 모독: 남북전쟁부터 1995년까지 논란이 많았던 주요 사건 기록』에 실린 사례를 보면, 성조기 수난의 역사는 성조기를 모독하고 훼손한 사람들에게 닥친 수난사일 수 있다.

일례로 1918년 “겨울, 미시건 주 랜싱에서는 국기에 손을 닦는 동료의 모습을 본 후 자동차 수리공들이 그랜드 강에 뒤덮인 얼음에 구멍을 뚫고 그 동료의 발에 빨랫줄을 묶은 후 그가 사과를 할 때까지 물 속에 내버려 두었다.”

기껏해야 면(또는 나일론)으로 된 천 한 장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하긴 우리도 남의 나라 국기를 훼손했다하여 벌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 성조기는 정말 대단하다. 우리는 때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우리나라 사람들 손에 쥔 채 나부끼는 성조기를 보게 되니 말이다.

성조기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앤 패디먼이 다음과 같은 의미에 동의하는 것 같진 않다. “아프가니스탄에 처음으로 폭탄이 떨어지던 날, 우리가 갔던 시골 행사에서 카우보이모자를 쓴 두 명의 가수들이 흔들어대던 성조기는 ‘저 놈들 다 죽여 버리자’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앤 패디먼이 아래와 같은 행동은 어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일리노이 주 브리지뷰의 이슬람 사원 근처에서는 이슬람교 반대 행진을 벌이던 시위자들이 성조기를 휘날리며 ‘미국! 미국!’을 외쳤다.”

「면으로 된 천 한 장」은 이른바 9.11 테러 직후 씌어진 글이다. 그런데 이 글에 나타난 미국은 일방적인 피해자다. 앤 패디먼은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저지른 갖은 악행에는 무관심하다. 이것은 앤 패디먼이 대단한 독서가라는 점에서 다독(多讀)의 부질없음과 해로움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성조기여, 영원하여라!’일 뿐이다.

앤 패디먼의 애국주의에 대한 나의 냉소는 「프로크루스테스와 문화전쟁」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통해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이런 식으로 스톡데일은 열다섯 차례가 넘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에픽테토스의 도움으로 도야한 자신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

미 해군중장을 역임한 제임스 스톡데일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 갑부 로스 페로와 짝을 이뤄 부통령후보로 출마한다. 월남전에 참전한 그는 7년간 포로생활을 했다. 나는 자국 군인이 전쟁포로로서 겪은 고초를 애달파하는 그녀가 미군과 미 정보당국에게 당한 적잖은 세계인의 엄청난 고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데이비드 덴비는 원래 자기가 30년 전 수강했던 서양 문명에 관한 수업 두 개를 청강하기 위해 48세라는 나이에 컬럼비아로 돌아갔다.” 나는 올해 초 다시 번역된 데이비드 덴비의 컬럼비아 대학 교양필수강좌 재수강기에 시큰둥했다.

『호메로스와 테레비』에서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으로 제목이 바뀐 한국어판 완역에 추가된 ‘제2판 머리말’이 저자의 ‘본색’을 드러내는 듯해서다. 데이비드 덴비는 9.11 이후 미국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당혹해하면서도 건전한 애국심을 견지하려 든다. 그 또한 ‘성조기여, 영원하여라!’다.

‘문화전쟁’은 유럽?백인?남성 위주의 고전 목록을 둘러싼 논란을 말한다. 나는 ‘문화전쟁’에 별로 관심 없다. 이런 거창한 주제는 내 관심 밖에 있다. 내 관심사는 사소하다. 소설 허먼 멜빌은 성정이 꽤나 거칠었던 모양이다. 심술궂은 괴팍한 인간이었던 것 같다. “멜빌이 언젠가 오렌지가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딸이 보는 앞에서 혼자 오렌지를 다 먹어 치워 버렸다”니 말이다.

“우리는 바이런이 근친상간을 저질렀으며 아동을 대상으로 한 이상성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T.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는 유대인 차별주의자였고, 필립 라킨은 일종의 ‘민주주의적’ 인종 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 즉 거의 모든 민족을 다 싫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인격적 결함에 의해 그들의 시에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남게 될 걸까?”

작가의 삶과 그 작가의 작품을 별개로 치는 것에도 앤 패디먼은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온정적인 태도가 못마땅하다. 나는 이제 멜빌의 『모비 딕(백경)』을 읽을 생각이 없어졌다. 하지만 작가와 사상가의 변절?반역?훼절은 개인적 인격의 미성숙과는 다르게 더욱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소위 미학과 방법론에서에서의 ‘문학적 성취’를 잣대삼아 서정주 시인의 시세계가 김수영 시인보다 몇 수 위라는 어느 문학평론가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도 안 된다. 미당은 식민 모국을 받든 식민지의 시인이다. 그 문학평론가에게 그런 행위는 단지 “부끄러운 삶의 행적”에 불과하다. 해방 후, 사회 전 분야에서 친일분자들이 활개를 친 이 나라의 현실이 치욕적일 따름이다.

감동받은 책의 저자를 만나지 말라는 독서 속설은 99퍼센트 옳다. 좋은 책을 읽었거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게 제일 좋다. 굳이 그 저자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알거나 심지어는 만나려고 애쓰지 마시라. 그러는 당신에게 실망만 쌓일 뿐이다.

「우편물」에는 약간의 투정이 섞여 있다. 나는 “이메일에 대해서는 절대 (낡은 편지가 주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는 정서에 공감하지 않는다. 군 복무를 하면서 편지를 많이 썼지만, 요즘은 책을 소포로 부치거나 원고 관련 서류를 등기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우체국을 찾을 뿐이다.

그래도 앤 패디먼이 인용한 편지글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의 지적은 크게 공감한다. “지금까지 정보 전달이나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편지 중에는 훌륭한 편지가 없었다. 훌륭한 편지가 이런 결과들을 우연히 성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편지의 근본 목적은 그 편지를 쓴 사람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어판 제목 『세렌디피티 수집광(At Large and At Small)』은 ‘세렌디피티 자연 박물관(The Serendipity Museum of Nature)’에서 가져왔다. 이 박물관은 여덟 살 난 앤 패디먼과 열 살 난 그녀의 오빠 킴 패디먼에게 남매의 부모가 새로 이사한 집의 2층 구석 쪽 남는 방에 마련준 것이다. 당시 남매는 자연채집에 들떠 있었다.

『서재 결혼 시키기』(정영목 옮김, 지호, 2001)의 원제목은 ‘Ex Libris’다. “Ex Libris는 책 소유자의 이름이나 문장(紋章)을 넣어 책표지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라는 뜻의 라틴어로, 그 책의 소장자를 지칭할 때 쓰기도 한다.”(표지 커버 앞날개에서)

내가 갖고 있는 『서재 결혼 시키기』 ‘책위’에는 이 책을 구입한 날짜를 알려주는 서점 스탬프가 찍혀 있다. 나는 이 책을 2001년 12월 16일에 샀다. 초판 1쇄 인쇄일보다 엿새 늦지만, 초판 1쇄 발행일보다는 하루 빠르다.

나는 이 책을 사자마자 열독한다. 쪽수가 넘어가는 게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앤 패디먼의 “허세를 부리지 않은 박식”함은 매혹적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잃어버렸지만 책에 껴준 책갈피는 손수 만든 출판사 직원들의 정성이 배어있었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의 진수다.

그녀의 자투리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극지방 탐험 관련서들을 다룬 대목에서 섀클턴의 이름을 접한 반가움이란. 책은 “기우뚱한 물건을 받칠 때, 문이 바람에 닫히지 않게 괼 때, 풀이 잘 붙도록 눌러놓을 때, 울퉁불퉁한 양탄자를 펼 때” 큰 쓸모가 있다. 정말이지 “헌사를 달고도 헌책방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은 얼마나 우울한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정치가 윌리엄 에워트 글래드스턴이 남다른 애서가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안다. “정말로 자기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숨이 붙어 있는 한 책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 있을까?” 또 글래드스턴은 이렇게 썼다.

“책은 반드시 책장에 넣어야 한다. 책장은 반드시 집에 보관해야 한다. 집은 반드시 관리해야 한다. 서재는 반드시 먼지를 털어 주고, 배치를 해 주고, 분류를 해 주어야 한다. 얼마나 고된 일,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은 고된 일이 눈앞에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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