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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높고 험한 길(1) - 파키스탄 카라코람 하이웨이

만약 모터사이클이 단체로 우르르 몰려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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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폭주족이다!” 하며 무질서, 혼란 등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 모터사이클 단체 주행은 질서정연한 대열과 역할 분담을 원칙으로 한다.

멀리 만년설이 쌓여 있는 새하얀 산봉우리가 보인다. 저 중 하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이다. 산을 넘는 과정 중에 종종 나오는 표지판에는 ‘세계의 8대 불가사의’라고 적혀 있다. 해발 고도 3~4천 미터 지역에 도로를 만든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지만 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 길은 정말이지 ‘불가사의’에 가까울 정도로 넘기 힘들다.

길은 갈수록 진정한 ‘불가사의’의 진면모를 보여 준다. 경사도 급하고 커브가 많다. 예상치 못한 구간에서 비포장도로가 불쑥불쑥 나와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맞았다. 이곳의 비포장도로는 산 위에서 흘러내린 물로 젖어 있을 때도 많아서 그야말로 아찔하다. 자칫하면 그대로 미끄러져 자갈 바닥에 박히게 된다. 오늘 목표는 58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길깃에 도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반도 가지 못했다. GPS는 출발할 때부터 길깃까지 직선거리로 180km 떨어져 있다고 하더니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여전히 162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말해 준다.

만약 모터사이클이 단체로 우르르 몰려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분명 “폭주족이다!” 하며 무질서, 혼란 등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 모터사이클 단체 주행은 질서정연한 대열과 역할 분담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금까지 이 원칙에 따라 주행해 왔다. 대열 제일 앞에 서는 사람이 투어 마스터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 역할을 맡아왔으며 각종 선두 지휘를 담당한다고 보면 된다. 다음으로는 안전하게 차선을 변경할 수 있게 하는 레프트 윙과 라이트 윙이 선다. 우리 대열에서 레프트 윙은 상균 형, 라이트 윙은 강석 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열의 맨 마지막에 서는 테일이 있다. 팀을 보호하고 문제가 생겼을 시에 선두에게 바로 알리는 이 역할 승일이 몫이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이 대열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문제의 시작은 역시 어제 그 사고 때문이었다. 잔뜩 긴장한 상균 형이 도무지 속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명이 속도를 못 내면 대열 전체의 속도가 늦어진다. 오늘 안으로는 길깃에 도착해야 하는데 속이 바짝바짝 탔다.

“형, 좀만 힘내 봐!”

그런데 어느 순간 백미러를 보니 대열의 두 번째, 그러니까 상균 형의 모터사이클이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달리고 있었다. 사람은 자꾸 넘어지면서 강해진다는 말이 맞나보다 싶었다. 제 컨디션으로 돌아온 정도가 아니라 전보다 훨씬 잘 달렸다. 난이도 높은 커브 길도 가뿐하게 도는데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와, 상균 형 끝내주는데!”

그러나 무전으로 들려오는 대답은 뜻밖이다.

“지금 두 번째로 달리는 거 나 아냐. 승일이야.”

아이고, 어쩐지 너무 잘 달리더라니. 대열의 끝에서 달려야 할 승일이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내 뒤로 온 것이었다. 승일이는 딱 잘라 테일을 못 맡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커브 길에 진입할 때는 감속하고, 코너를 나갈 때에는 가속하고, 비포장도로에서도 20킬로 이상의 속력을 유지해야 중심을 잡을 수 있는데 상균 형이 무조건 속력을 줄이니 뒤에서 따라오는 자기까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 맘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라서 그냥 나-승일이-상균 형-강석 형 순서로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간다고 갔음에도 얼마 안 가 나와 승일이, 상균 형과 강석 형 사이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단은 무전기가 있으니 무전이 끊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앞 뒤 그룹으로 달리기로 하고는 승일이와 둘이서 휙휙 달려 나갔다.

그렇게 한 삼십 분쯤 달렸을까. 이제는 백미러에 보이기는커녕 무전도 잘 들리지가 않았다. 앞에 갈림길이 나오자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근처의 주유소에 잠깐 주차하고는 상균 형과 강석 형을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자 두 사람의 모터사이클이 나타났는데 우리를 못 봤는지 왼쪽 길로 지나가 버린다. 승일이와 나는 다시 모터사이클에 올라타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곧 두 사람을 따라잡고는 다시 대열을 정비해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주유소에서 멈췄다.

“그렇게 앞에 가버리면 어떡해!”

온화하기만 하던 상균 형이 버럭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지금껏 많이 참아왔던 승일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균 형이 좀 빨리 달려 주면 좋잖아.”

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가기 힘든 길에서 서로 싸우기까지 하다니. 나는 얼결에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절대 무전이 떨어지지 않는 범위에서 갈게. 절대로! 약속!”

그리고 그 순간 과묵한 강석 형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너는 마스터야."

“…….”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모터사이클 주행에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안전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해 왔던 나였다. 그런데 어느새 책임감도 잊고 내 멋대로 굴고 있었다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승일아, 힘들지만 다시 테일을 맡아 주라. 그리고 상균 형, 나를 좀 더 믿어줘.”


해는 저물어 가는데 길은 더욱 험해져 갔다. 산에서 굴러 떨어진 모래와 돌들이 길 곳곳에 위험천만하게 나뒹굴었다. 오늘 길깃은 고사하고 그 앞 도시인 지글롯에 도착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해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는 것보다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형, 오프로드 나온다. 감속하고, 기어 내리고. 오프로드 안에서는 다리 내리지 말고 주욱 달려줘. 앞 브레이크를 잡지 말고.”

어려운 코스마다 계속해서 상균 형에게 무전을 보냈다. 승일이는 ‘김영빈의 튜토리얼 모드’라며 웃었다. 상균 형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무조건 감속을 하지 않고 전보다 잘 달렸다.

더욱 단단해진 우리의 팀워크에도 불구하고 해가 좀 더 늦게 지지는 않았다. 카라코롬 하이웨이에서 만큼은 야간 주행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방법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에는 도로가 유실되고 커다란 물웅덩이가 놓여 있었다. 피해 갈 곳은 없었다. 왼쪽은 낭떠러지요 오른 쪽은 산이었다.

“이거 에어필터까지 젖겠는데.”
“우리 건 높이 달려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에어필터는 사람 몸의 폐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엔진에 주입되는 산소에 이물질이 함께 포함되지 않게 걸러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폐에 물이 차면 큰일 나듯이 여기에 물이 들어가면 엔진이 고장 날 위험이 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은 뻔한 일. 제발 모터사이클도 내 몸도 무사하길 빌며 웅덩이를 건넜다.

으라차차!

발이 다 젖어 버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별 탈 없이 건넜다. 혹시나 상균 형이 여기서 또 자신감을 잃을까봐 형의 모터사이클은 내가 옮겨 주었다. 강석 형도 잘 건너 주었고, 승일이는 얕은 곳을 찾더니 발도 젖지 않고 재주 있게 건넜다.


한 시간 반을 더 달려 지글롯에 도착했다. 캄캄한 산중에 마을 불빛이 나타나자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데 여기는 너무 작은 마을이라 숙소가 없단다. 경찰에게 가장 가까운 숙소가 어디 있냐고 묻자 길깃까지는 가야 된다고 한다. 이 밤중에 또 더 가라고?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경찰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하자 경찰서에 방 하나를 비워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물도 충분치 않고 시설도 안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잘 수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그곳은 과연 아주 열악한 숙소였다. 작은 물 양동이가 우리가 씻을 물의 전부였고, 작은 방에는 지붕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불빛 하나 없는 깊은 산속의 밤하늘.

어쩌면 이렇게 눈부시게 고요할 수 있을까. 그날 밤 이름 모를 수많은 별들이 지붕 없는 우리의 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침낭에서 얼굴만 내민 채 밤새도록 별들을 바라보았다. 별, 별, 그리고 별. 하늘에 이토록 많은 별들이 있었다니.

“……형,”
“왜?”
“보석 박물관에서 봤던 보석 생각나?”
“이란에서? 유럽에서?”
“이란에서 본 거.”
“응.”
“그 보석보다 별이 더 예쁜 것 같다.”
“……당연하지. 궼울 촌놈아.”

맞는 말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런 밤하늘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서 눈이 시리고 가슴이 아렸다.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을 뒤늦게 발견한 느낌이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런 밤하늘을…….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나와 별들만이 존재하는 듯한 고요 속에서 하나 둘 조용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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