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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꿈꾸는 드레스

순간성과 영원성이 교차하는 바로 그 느낌을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자들이 예술가라고 이야기했던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말이 떠오른다. 영원함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순간적인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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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동품 수집가는 아니지만, 세월의 흔적이 흠씬 묻어나는 제법 오래된 물건을 하나 가지고 있다. 킨더만(Kindermann)이라는 상표 이름이 붙어 있는 슬라이드 프로젝터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쓰시던 것이니까, 적어도 반세기는 묵은 녀석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서재 정리를 하다가 태워버리려고 쌓아둔 물건 더미 속에서 우리 삼남매는 무심코 하나씩 손에 건져 들었었다. 언니는 타자기를, 오빠는 니콘 수동 카메라를, 나는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고른 것이다.

서재를 나오면서 눈이 마주친 남매는 각각 손에 든 것들을 보면서 싱겁게 웃었다. 왠지 세 물건은 세 남매처럼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선 디지털 세상에선 거의 쓸 일이 없다는 점, 작동원리가 단순하다는 점, 그리고 편집이나 수정 없이 한순간의 행위를 영원으로 남긴다는 점이다. 또 하나, 이건 꽤 매력적인 공통점인데, 세 물건 모두 소리가 아주 정감 있다는 것이다. ‘타닥타닥’ 글자 새기는 소리도, ‘찰칵’ 사진 찍는 소리도, ‘철커덕’ 슬라이드 넘어가는 소리도, 모두 귀에 와 닿는 느낌이 청명하다.

나는 옛 기계들의 소리를 사랑한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기억들을 한 장면 한 장면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돌릴 때 램프의 과열을 막는 ‘윙’ 하는 환기팬의 소리마저도 왠지 좋다. 그 소리를 타고,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처럼, 시간과 공간의 틈이 잠시 열리면서 슬라이드가 잡아놓은 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줄곧 타자기 소리가 배경음으로 들려오던 영화가 있었다. 제목이 ‘속죄’라는 뜻을 가진 <어톤먼트Atonement>인데, 어느 소설가가 타자기로 글을 쓰면서 그 소리와 더불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의, 그러나 단순히 회상하는 차원만은 아닌 영화였다. 오랜 세월 끝끝내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이렇게 차근차근 지나간 사건들을 되뇌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쩌다가 잘못 얽힌 순간을 돌려놓기 위해서다.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이다. “난 언니와 그 남자가 실제 삶에서 잃었던 것을 주고 싶었어요. …… 그들에게 행복을 준 거에요.”

사건의 시작은 남자 주인공의 에로틱한 상상에서 비롯된다. “네 젖은 곳에 키스하고 싶어.”라고 혼자 써놓은 민망한 글귀는 실수로 여자에게 전해지고, 그것은 오히려 남녀 당사자가 그동안 서로에 대해 숨기고 있었던 욕망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준다. 두 사람이 만나던 날 저녁,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이 입었던 짙은 초록색의 드레스는 남자가 쓴 에로틱한 글귀와 교차하면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사랑의 순간에 여자를 가장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던, 그러나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홀로 남겨지게 했던, 두 가지 운명의 끈이 교차하는 드레스였다.

조 라이트(Joe Wright) 감독,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 <어톤먼트Atonement> 스틸 컷, 2007

두 사람 사이에는 제3자로 여자의 어린 동생이 개입되어 있었다. 하필 그 관찰자는 아직 사랑의 에로틱한 측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때마침 주변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하고, 아이는 충동적으로 거짓 증언을 하여 어이없게도 언니가 좋아하는 남자를 강간범으로 몰아넣고 만다. 그 소녀가 바로 지금 타자기 앞에 앉아 있는 소설가다. 경찰에 끌려가는 남자를 바라보는 언니의 파인 등 뒤로 옷 색깔과 똑같은 짙은 녹음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다가올 운명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듯 여자는 담배를 피워 문다.

영화 <어톤먼트Atonement> 스틸 컷, 2007

그 사이 전쟁이 터졌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치욕적으로 바뀌고, 억울하게 사랑을 잃게 된 것이 견딜 수가 없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난 돌아갈 거야. 당신을 찾아 사랑하고, 결혼하고 그리고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거야.” 그러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지 못한다. 남자는 패혈증에 걸려 전쟁터에서 죽고, 여자 역시 가스폭발 사고로 같은 날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타닥타닥 들려오는 타자기 소리. 죄책감을 남몰래 삭혀야 했던 소설가는 이제 비로소 죄를 보상할 방법을 찾게 된다. “내가 평생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끝을 낸들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그녀는 상상 속에서나마 운명을 바꾸어 놓기로 결심한다. 순간적인 유혹으로만 끝나버린 그 두 남녀의 관계를 소설의 결말에서는 행복하게 만나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둘의 이야기가 영원한 해피엔드로 기억되길 바라면서.

<어톤먼트>에서 여자 주인공이 입고 나온, 비운의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던 끈 달린 초록색 이브닝 드레스는 마릴린 먼로의 화이트 홀터넥 드레스와 오드리 헵번의 블랙 드레스를 제치고 《타임》지 선정, 영화 속 패션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드레스는 군더더기 없는 단색에, 눈속임 효과를 노린 흔적이 없는 솔직한 디자인, 옷을 위한 옷이 아닌 몸의 선을 그대로 살리는 옷으로서 이브닝드레스의 기본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아날로그적인 드레스라고 하면 말이 될까. 기계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단순한 아름다움은 오래가는 것 같다. 아마도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원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존 싱어 사전트, 「마담 X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35×106.9cm, 1883~84,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화 속 장면 못지않게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그림 속에서도 등장한다. 1884년 파리, 저기 수군수군 일렁이는 소문의 중심지로 가보자. 그림 한 점이 놓여있고, 보석으로 장식된 끈이 달려있는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인상이 보이는데, 까만 옷 탓인지 유독 백옥 같은 피부가 두드러진다. 「마담 X의 초상Portrait of Madame X」이라 불리는 이 그림은 당시 시끄러운 스캔들로 당대의 화두가 되었다. 부인의 자태가 정도를 벗어날 만큼 에로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노골적인 누드조차도 시큰둥하게 관람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요 정도의 요염함에 쑥덕거렸을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미국계 화가로 파리에서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였고, 「마담 X의 초상」의 실제 주인공은 직업 모델이나 화류계 여자가 아니라 명예를 중시하는 최고 상류층 집안의 젊은 부인이었다. 자세히 보니, 코에서 턱으로 다시 턱에서 목으로 이르는 선이 무척이나 섬세한 타고난 귀골 미인이다. 당시 파리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알 만한 집안의, 요즘으로 치면 재벌가의 여인쯤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전시된 뒤 부인의 어머니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며 드러누웠고, 남편은 이런 초상화라면 사들일 수도 없고, 전시도 허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반응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이 그림은 드레스의 오른쪽 끈이 어깨 밑으로 팔의 상부까지 자연스럽게 살짝 흘러내린 상태로 그려져 있었다. 끈 달린 이브닝드레스의 아슬아슬한 느낌을 한결 강조하는, 그러나 귀부인에게는 적당하지 않을 다소 선정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화폭에 담으면서 화가는 그녀의 옷이 스르르 흘러내리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던 모양이다.

애초부터 이 초상화는 위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화가 측에서 간절히 원해서 그려진 것이다. 파리 사교계 모임에서 부인을 처음 본 순간, 사전트는 그녀의 모습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흥분에 겨워 지인들을 다 동원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애원했으며, 직접 편지까지 쓰는 등 지극 정성을 쏟아서 부인과 가족의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조용히 여름을 보내는 별장에 가서 몇 장의 스케치를 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담 X의 초상」은 화가의 에로틱한 상상이 개입되어 있는 탓인지, 보는 사람마저도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 그림이 ‘스캔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으로 불리게 된 이유도 아마 그런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사전트는 어깨끈을 새로 그리는 덧칠 작업을 해야만 했다. 스캔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부인은 대외적으로 얼굴을 내밀기를 꺼리게 되었고, 뒤늦게 그 그림을 보려고 집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견딜 수 없었던 사전트는 그림을 싸가지고 서둘러 영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 그림에 베스트 의상상을 주면 어떨까 한다. 검정 이브닝드레스에 화려한 어깨끈을 한쪽만 슬며시 흘러내리게 했던 그 절제됨 속에 짧지만 진한 욕망이 느껴진다는 것이 수상의 이유다. 유혹적이면서도 속되 보이지 않고, 기본형이면서도 결코 초라하지 않은 드레스다. 이 드레스 덕택에 한여름 밤의 꿈같던 화가의 몽상이 쓸데없이 장황하게 표현되지 않고, 오래도록 변치 않을 강렬한 순간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순간성과 영원성이 교차하는 바로 그 느낌을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자들이 예술가라고 이야기했던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말이 떠오른다. 영원함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순간적인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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