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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이단, 세계의 희망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세상에서 가장 정열적인 젊은이들이 모여 있지만 가장 치안이 안전한 곳,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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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 형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현실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 모든 것을 건전하고 경건한 의미에서의 축제로 승화시켜 버린 사람들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는 마약과 매춘이 합법화된 곳이다. 그래서 막연하게 퇴폐적인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왔다. 통역병 시절 함께 지냈던 영록이 형은 그런 내게 네덜란드의 개방성은 직접 가보지 않으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이단이고, 세계의 희망이야!”

세상에서 가장 정열적인 젊은이들이 모여 있지만 가장 치안이 안전한 곳, 네덜란드. 영록 형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현실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 모든 것을 건전하고 경건한 의미에서의 축제로 승화시켜 버린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는 그처럼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갖지 못해서 세계의 희망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네덜란드는 퇴폐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있을 만큼 건강하고 매력적인 나라라는 점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네덜란드의 가장 큰 매력은 도로 사용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원래 네덜란드는 계산에 아주 철저하다. 오죽하면 네덜란드에서 공짜 찾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들의 역사가 끝없이 해외로 떠돌아다닌 무역과 개척의 역사이다 보니 길에 대해서만은 관대하다. 네덜란드의 개방성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길을 중시하는 사고와 관련이 있다. 길은 곧 열려 있음을 의미하니까.

네덜란드에서 우리가 이틀간 머물 곳은 암스테르담이다. 유럽에서도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도시이다. 남부 유럽을 다닐 때는 그다지 내가 작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슬슬 사람들 얼굴을 쳐다보는데 고개가 꺾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정말 많다. 사람들이 다들 늘씬한 데는 타고난 유전자뿐 아니라 생활 습관도 작용하는 것 같다.


암스테르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다. 첫째는 민영이와의 합류, 둘째는 모터사이클 수령. 민영이의 합류는 우리에게 거의 천사의 강림이었다. 모두들 간만에 “오빠”라는 말을 들을 생각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사실 민영이와 우리는 처음 선생님과 학생 사이로 만났다. 전통예술원에 재학 중인 민영이가 우리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배움의 시간은 끝이 났고 여행 쪽으로는 우리가 선생님이니, 제법 오빠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공항에서 좀 헤매기는 했지만 민영이와 별 탈 없이 만났다. 문제는 모터사이클을 수령하는 일이었다. 모터사이클이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항구에 도착하는 걸로 일이 끝날 줄 알았더니 웬걸 어림없는 소리다. 미국에서 만난 범양해운의 사장님께 온 뜻밖의 연락. 모터사이클을 받아 줄 파트너 회사를 네덜란드에서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단다. 독일 월드컵 한국전에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려면 한시라도 지체는 있을 수 없다. 자칫하면 전체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알아 본 끝에 겨우 한국인이 운영하는 월드 아시아라는 업체를 통해 해결했다.

팀 리더로서 이럴 때마다 정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해 왔다 싶은데도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 문제를 역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해결해 냈을 때의 기쁨은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되기도 한다. 패키지 상품으로 마음 편히 관광을 왔을 때엔 얻을 수 없는 짜릿한 만족감이다.

네덜란드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친구가 하나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던 트레버 형님과 케이 누님만큼의 충격을 준 그의 이름은 애쉬Ash. 매사에 거침없고 열정 가득한 귀여운 청년 애쉬는 금세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애쉬, 그런데 직업이 뭐야?”
“나? 분석가야.”

뭘 분석하는 걸까. 자세히 물었더니 이런저런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요약하자면 ‘프로그램을 부수는 일’을 하고 있단다. 게다가 한국에서 성행하는 복제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크랙들을 만드는 것이 가장 즐겨하는 일이라고. 맙소사, 애쉬 그거 범죄야!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뚫어져라 애쉬를 보는데 천진하게 웃기만 하는 이 친구. 네덜란드 사람들은 정말 사고가 열려 있구나, 심하게.

애쉬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부유하게 사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 당연하다 말하지는 않았다 ― 태어날 때 부자 아빠를 선택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불평등을 겪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누구는 어렸을 적에 ‘워크래프트’를 하고 누구는 ‘마리오’나 즐기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돈은 중요한 게 아냐.”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너는 돈은 어떻게 버는데?”
“은행을 부숴.”
“뭐?”
“바이러스를 누가 만든다고 생각해?”
“응? 글쎄…….”
“노턴 안티 바이러스에서 만드는 거야. 물론 회사가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의 프로그래머들이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지. 그리고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팔고. 나는 은행의 보안을 부순 다음에 더 강화된 보안을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하는 거지. 똑똑한 은행가는 나에게 합당한 금액을 제시해 주고 멍청한 은행가는 나에게 욕을 퍼붓지. 그렇게 돈을 버는 거야.”

애쉬는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워크래프트 vs 마리오’와 비슷한 논리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을 비판하고, 구글의 강점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올 다음 세대에는 인터넷이 붕괴될 것이라고 했다. 두 눈을 빛내며 말하는 그는 마치 이 세대의 인터넷을 붕괴하고 다음 세대의 네트워크를 꿈꾸는 전사처럼 보였다. 아직 스물한 살의 나이인데도 신념과 비전이 분명했다. “Make World Free.(세계를 자유롭게 하라.)” 비록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해도 그의 모토는 긴 여정에 지친 나에게 다시금 영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여행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갖게 해준다. 나는 언제 재회할지 모를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그에게 내가 가진 물건과 독도 엽서 두 세트를 선물해 주었다.

“고마워, 영빈. 나도 선물을 하고 싶은데……. 아! 내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독도를 알려 줄게! 할 수 있어!”


오, 애쉬.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 나는 사양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바이러스라든가 해킹 같은 방법으로 도와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쉬워하며 자기에게 이메일을 보내주면 원하는 모든 프로그램의 크랙을 보내 줄 수 있으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신이 부수어 주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이십 대 특유의 오만함마저 귀여웠던 애쉬, 여전히 은행 보안을 부수며 잘 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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