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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인다는 것’의 의미 - 요네하라 마리의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그들은 그녀에게 ‘인간 수컷’을 잊고 살만큼 충만한 사랑을 느끼게 해줬으니 말이다. 종(種)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과 사랑이 훈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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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어떻게 된 거야? 그녀랑은 헤어진 거야?
모모: 아니, 내가 먼저 나간다고 했어. 버려지면 죽고 싶어질 것 같아서…….

- 일본 드라마 <너는 펫>(2003) 중에서

버려진 잡종개 한 마리가 있었다. 사납게 생긴 얼굴과 달리 사람을 잘 따르고 얌전한 이 녀석은, 굶주린 채 일본 도카이무라 호텔 근처를 배회하다가 구원자를 만난다. 통역 일로 도카이무라에 잠시 들렀던 한 중년 여성의 눈에 띄어, 함께 도쿄로 가게 된 것이다. 새 주인은 이 녀석에게 ‘겐’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겐’은 그냥 들개가 아니었다. 이 개는 마당에서는 자유롭게 뛰어 놀아도 절대 집 안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주인이 불러도, 앞발만 겨우 마루에 들여놓을 뿐이었다. 그 행동은 분명히 이전 주인에게 엄하게 훈련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어찌나 순한지, 낯선 사람이 와도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 뿐 도무지 짖을 줄을 몰랐다. 워낙 조용해서 이웃 사람들은 그 집에 개를 키우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도쿄의 새 집으로 온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겐’이 짖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게. 특히 집에 낯선 사람이 오면 가차 없었다. 당황한 주인은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다.

“축하드립니다.”
“축, 축, 축하한다뇨, 선생님?”
“겐은 말이죠, 마리 씨. 지금까지 자제하고 있던 거예요. 이전 주인에게 버림받아서 마리 씨네로 가게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버림받을지 모른다고 느꼈던 거예요. 그곳은 어디까지나 임시 거처라고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붙임성 있게 대했던 거죠. 그 녀석 나름대로요.”
(중략)
그랬구나. 겐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해준 거구나. 우리 집의 방범견이라는 걸 깨달은 거구나.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는 개와 고양이를 친자식처럼 기르며 사는 어느 중년의 독신 여성 이야기다. 사실 프로필만 놓고 보면 어쩔 수 없이 고정관념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왠지 괴팍할 것 같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동물에게 집착하는 안타까운 모습 등이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다. 그러나 표지에 실린 저자의 사진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요네하라 마리. 서글서글한 눈매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면서도 소녀처럼 천진난만해 보인다. 러시아어 통역사라는 직업이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반면,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버려진 동물들을 정성껏 돌보는 모습에서는 따뜻하고 푸근한 인정이 느껴진다.

개와 고양이와 인간이 아옹다옹 뒤엉켜 사는 그녀의 집에서는 매일 같이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마치 일일 시트콤처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재치 있게 포착해서 묘사하는 저자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읽다보면 감동과 함께 그 유머러스함에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동물들마다 제각기 독특한 성격이 있다는 것. 특히 고양이들의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은 거의 압권이어서, 사람인지 동물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겐, 도리, 무리와 도리

요네하라 마리가 키우는 고양이들의 이름은 ‘무리’와 ‘도리’. 남매간인 이들 역시 새끼 고양이 때 길에 버려져 있던 것을 그녀가 거둬왔다. 그러나 주인에게 갖은 애교를 떨던 이 녀석들은 경쟁자가 나타나자 돌변한다. 바로 그녀가 도카이무라 출장길에 유기견 ‘겐’을 데려왔을 때였다. 성격 좋은 ‘겐’이 꼬리를 흔들며 먼저 호의를 표시했지만, 돌아온 건 질투심에 불탄 고양이들의 앞발 공격뿐. ‘무리’와 ‘도리’는 불만의 표시로 주인에게도 쌀쌀맞게 대하더니, 급기야 ‘도리’가 가출을 감행한다.


“도리가 아침도 안 먹고 나가서 아직도 안 들어왔어요.”
“엇, 벌써 7시인데요. 여태 12시간이나 집에 안 들어온 적은 없었는데.”
“그러게요. 저도 걱정이 되어서 조금 전에 이 근처를 찾아다녔는데.”
“역시 질투일까요?”
“99퍼센트 그런 거 같아요. 마리 씨의 사랑만 빼앗긴 게 아니라 그동안 자유롭게 마음껏 놀았던 마당도 겐한테 뺏긴 꼴이잖아요. 충격이 꽤 컸나 봐요.”


결국 고양이와 개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이뤄져 셋은 사이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고양이들의 가출은 한 차례 더 이어졌다. 이번엔 러시아 출장길에 입양해 온 페르시안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측은지심이 남다른 주인이 또 새 식구를 들여오자, ‘무리’와 ‘도리’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집을 나가 버렸던 것. 재미있는 것은 두 고양이가 가출을 한 와중에도 ‘겐’을 보기 위해 한 차례씩 집에 들렀다는 사실이다. 주인한테는 냉랭하게 대하면서도, 차마 친구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나 보다. 이 정도면 거의 인간의 희로애락을 능가하는 수준이라 하겠다. 하긴 바다에 투신자살한 고양이도 있는 마당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어느 날, 수고양이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새끼 고양이를 자신의 주인인 어부에게 ‘이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하는 식으로 맡기더니 갑자기 바다 쪽으로 달려가서 그대로 파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고양이를 깊이 사랑했던 어부는 놀라서 자신도 뒤를 좇아 바다에 들어가서 죽을힘을 다해 구출했다. 그리고는 고양이의 몸을 닦고 볕이 따뜻한 곳에 눕혀 재웠다. 그러나 고양이는 어부가 잠깐 옆을 떠난 사이에 다시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여 두 번째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결심이 단단했던 모양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의 자살」, 『무라카미 라디오』 중에서

무릇 고양이만 까칠한 성품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10여 년간 개를 기르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동물들도 저마다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우리 집 개만 봐도 그렇다. 종종 자기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한다. 화장실에 사람이 있으면 절대 들어가지 않고 딴청을 피우며 기다리다가, 꼭 비어있을 때만 슬쩍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식이다. 바닥에 물이라도 묻어있을라치면,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어찌나 도도한지 웬만해서는 불러도 잘 오지도 않는다. 그러다가도 자기를 빼놓고 가족들이 뭔가를 먹으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구슬프게 울어댄다. 그게 안 통하면 앞발로 건드리기도 하고 으르렁거리기도 하는데 이럴 땐 나눠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잘 때도 꼭 개집을 놔두고 푹신한 소파나 침대로 기어오른다.

필자의 강아지

마찬가지로, 고양이라고 다 성격이 예민한 것도 아니다. 나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양이 박물관(Katten Kabinet)’에 갔다가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소파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잘 자던지, 내가 플래시를 터뜨려가며 사진을 찍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면서.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무신경한 고양이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생각나는 또 한 마리의 고양이.

‘고양이 박물관(Katten Kabinet)’ 소파에서 잠자던 고양이

그 고양이는 추운 계절에 이불 속으로 들어올 때면 반드시 세 번은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습관이 있다. 우선 이불안에 들어가 길게 누웠다가는 잠시 생각한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슬며시 밖으로 나간다. 이런 동작이 세 번 거듭되다가 네 번째에서야 간신히 안심하고 잠드는 것이다. 이 의식에 대충 십 분에서 십오 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어떤 식으로 생각해봐도 이건 단순한 시간 낭비다. 고양이 쪽도 성가실 테고, 내 쪽도 이제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고양이가 들락날락거리니까 울컥 화가 치민다. 세상에는 '삼고(三顧)의 예'라는 게 있는데 고양이가 한밤중에 그런 의식을 치러야 할 필연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때때로 어째서, 어떤 이유로, 어떤 경과를 통하여 그런 버릇이 일개 고양이의 머릿속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나름의 유아 체험이 있고, 사춘기의 뜨거운 고뇌가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 개체로서 고양이의 주체성이 성립되어, 그녀는 겨울밤에 정확하게 세 번 이불속을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일까?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의 수수께끼」 중에서

하루키의 분석처럼, 고양이든 개든 무엇이든 간에 동물들도 저마다의 타고난 성품과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나름의 정서가 있을 터다. 마찬가지로 어릴 적 경험한 트라우마 역시 평생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끊임없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는 동물들에게 학대받고 버려지는 경험은 얼마나 큰 충격일 것인가. 이 책에 등장하는 ‘겐’과 ‘무리’ ‘도리’는 모두 한 번씩 버림받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눈치 보고, 질투하고, 불안해하는 이들의 모습은 한층 더 큰 연민으로 다가온다. 다시 버림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기대하는 슬픈 아이러니.

“웬만하면 날 길들여 봐.”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이렇게 말했다. 장미꽃 한 송이를 책임지기에도 벅찼던 어린 왕자는 여우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 여우를 생각하면 좀 쓸쓸해진다. 책에 특별히 묘사된 바 없지만, 내 생각에 그 여우는 오랫동안 너무나 외로웠고 누군가의 사랑을 간절히 원했던 것 같다. 어쩌면 ‘길들인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은근하고 따뜻한 마음이다. 절박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고, 결핍을 채워주며 보듬어 주는 것. 그래서다. ‘마리네 가족들’이 시끌벅적하게 지지고 볶으며 사는 모습은 참으로 흐뭇하다. 그러고 보면 ‘길들인다’는 것은 상대적인 표현인 것 같다. 애정을 갈구하는 동물들에게 마리는 아낌없는 사랑을 나눠주었고, 그들은 그녀에게 ‘인간 수컷’을 잊고 살만큼 충만한 사랑을 느끼게 해줬으니 말이다. 종(種)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과 사랑이 훈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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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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