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위대한 올드 보이

차가운 모더니즘의 신화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과장됨 없이 세련된 도시적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모던한 인간은 마치 멸균 처리된 사람처럼 한결같은 냉랭함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위대한’은 도대체 어떤 뉘앙스로 쓴 겁니까?”

오래 전 미국에서 미술관 인턴으로 일할 때, 준비하던 전시 제목이 「최후의 위대한 사랑」이었다. 마치 세기의 로맨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전시작품은 예술가들의 거침없는 연애편력과 소문난 불륜, 동성애 등을 다루고 있었다. 누군가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는 소재들이었는데, ‘위대한’이란 단어가 예각을 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곤두세우게 할 것만 같았다. 내가 의아해하자 선임 큐레이터는 퀴즈를 내듯 아주 모호하게 대답해주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대단한 것과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로버트 래드포드, 미아 패로우 주연의 1974년 영화 <위대한 개츠비> 스틸 컷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가 쓴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나도 몇 마디 거들 수 있다. 대학 시절 나와 네 명의 친구들로 구성된 모임 이름이 바로 그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G.G.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중 그냥 어쩌다가 영문학을 전공하는 친구 입에서 개츠비 이야기가 나왔다. 갑자기 우리는 엉뚱하리만큼 진지해져서 그가 왜 위대할까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었다. 개츠비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그녀는 전쟁에 참가한 개츠비를 기다리는 대신 돈 많고 편안한 다른 남자를 선택한다. 개츠비는 그녀를 되찾아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다.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그녀를 데리고 떠날 수 있는 날이 왔지만, 결정적인 순간 또다시 여자는 그를 배반한다. 돈과 야망과 사랑,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놓쳐버린 개츠비는 세상 앞에 무력해진 채 결국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팜 파탈의 어리석은 피해자에 가까운 이 남자를 작가는 왜 위대하다고 부추겼을까?

개츠비의 무대는 바야흐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의 미국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것들을 무효화시켰다. 오래도록 일구어 놓고 수확을 기다리던 꿈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바뀌고, 그토록 그리워하며 무사하기만을 기도하던 가족이 전선에서 끝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참담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상실감과 더불어 무언가 대상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배신감을 맛보았다. 복수라도 하듯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온 유럽인들은 새로운 곳에서 암울한 생각일랑 떨쳐버리고 마냥 자유롭고 싶어 했다. 어느덧 이들은 그 어느 하나에도 진득하게 마음을 붙이는 일 없이 그야말로 쉽게 오고 쉽게 가는(easy-come easy-go) 유형의 인간들이 되어 있었다.

1920년대에 도시를 휘젓고 다니던 속칭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았다. 영원을 약속하는 대신 자유를 택했다. 말하자면 사랑에 대해 ‘쿨(cool)’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이었다. 오직 당장의 쾌락과 그것을 해결해 줄 돈에만 집중하는 물질적인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곁눈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매력적인 멋쟁이였다는 점이다. 아마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쿨’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적인 동경은 이 무렵에 이미 싹트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타마라 드 렘피카(Tamara de Lempicka), 「남자의 초상Portrait of a Man」, 캔버스에 유채, 1928, 180x120cm, 볼로뉴 빌랑쿠르, 1930년대 미술관

모던한 이들의 스타일이 어땠는지는 폴란드 태생의 아르 데코(Art Deco) 화가인 타마라 드 렘피카(Tamara de Lempicka, 1898~1980)가 그린 그림들에서 엿볼 수 있다. 먼저 「남자의 초상」은 렘피카가 서른 살 되던 해 그린 남편의 모습이다. 검은 코트에 하얀 목도리, 흑백의 패션에 걸맞게 웃음 없이 그늘진 표정의 남자는 높은 건물들이 늘어선 배경 속에서 도시적인 세련미를 흠씬 풍기고 있다. 진한 블랙커피 같은 이 남자는 막 떠나려는지 모자를 손에 들고, 상대방에게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지고 있다.

이 그림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잘 살펴보면 모자를 든 남자의 손부분이 하얗게 바탕색만 칠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리던 1928년은 이들 부부가 이혼한 해이기도 하다. 위태로운 결혼 생활 속에서 렘피카는 일치감치 이별을 염두에 두면서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화면에 담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헤어진 후에는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은 채로 캔버스를 구석으로 치워두었을 것이다. 떠난 남자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쿨’하게 감정을 덮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타마라 드 렘피카, 「녹색 옷의 소녀Jeune Fille en Vert」, 1927, 패널에 유채, 61.5x 45.5cm, 1927, 파리, 퐁피두 센터

빼어난 외모로 어디서나 주목을 끌었던 렘피카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당대를 대표하던 모던 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만큼 모던 걸의 특징을 잘 살린 화가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녹색 옷의 소녀」를 보면, 사치스럽고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 뒤로 사이보그 같은 차가움이 느껴진다. 원뿔 같은 젖가슴, 원기둥 같은 팔, 인공적으로 균일한 명암처리 그리고 유리처럼 매끈한 표면의 색채. 과연 이 여자가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기는 한 걸까.

자유분방한 변덕쟁이라는 의미에서 ‘플래퍼(flappers)’라고 불리기도 했던 모던 걸들은 전통적인 긴 머리카락을 과감하게 잘라버렸으며, 얌전한 갈색보다는 번쩍이는 금발 또는 매섭도록 까만 머리칼을 선호했다. 눈썹을 밀고 가늘게 그려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을 만들었으며, 사랑스러운 복숭아 빛 뺨 대신 냉정해 보이는 창백한 안색에 새빨간 입술을 두드러지게 했다.

새빨간 립스틱 자국이 묻어있는 긴 담배와 매캐한 연기는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이들이 패스워드를 나지막하게 말하고 좁은 입구로 빨려들 듯 내려가는 뉴욕의 지하 술집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담배연기가 자욱한 곳이었다. 밤의 향연 장소인 나이트클럽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끈적끈적한 재즈풍의 음악에 흐느적거리며,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낯선 사람과 몸을 밀착시키면서도 이들은 서로 마음만큼은 결코 주고받지 않으려 했다. 물질주의의 시대에는 오직 마음 없는 육체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진정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끝내 지켜내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우리의 개츠비는 그다지 모던한 사람이 못되었다. 그는 이미 떠난 여자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부정 축재와 불륜까지도 불사하고 무작정 덤벼들 만큼 뜨끈한 ‘올드 보이’였다. 자유를 위해 냉랭해져야 하는 모던한 세상의 섭리에 어울리지 않는 무모한 열정을 가졌던 것이다.

나는 개츠비와 킹콩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둘 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일종의 원시적 ‘괴물’이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두 괴물의 운명은 혼자 저항하다가 희생양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러고 보니 개츠비와 킹콩은 시기적으로도 가깝다. (원조 <킹콩>은 1970년대에 제시카 랭이 출연한 것보다 40년쯤 앞서 이미 제작된 바 있다.) 1933년에 제작된 <킹콩>의 끝 장면을 보면, 킹콩이 어설프게 서 있는 화면의 왼쪽 아래로 당시 지어진 뉴욕의 유명한 마천루가 보인다. 다른 고층 빌딩들은 아직 없었던 때였는지 뉴욕치고는 허전하다. 냉정한 평안함을 요구하는 도시 속에서, 순수한 사랑을 꿈꾸었던 킹콩은 답답한 듯 가슴을 쿵쿵 치며 마지막으로 쩌렁쩌렁 괴함을 질러 울부짖고 쓰러진다.

메리안 쿠퍼(Merian C. Cooper)와 어니스트 쇼드사크(Ernest B. Schoedsack) 감독의 <킹콩King Kong> 스틸 컷, 1933

한편 개츠비는 끝 부분에서 세상을 둘러보며 그 생경한 모습에 몸서리친다. 아름다운 장미꽃도 물질로서만 바라보니 괴기스럽게 보일 뿐이다. 그의 말대로 “살아있지 않고 오직 물질적이기만 한 세상은 가여운 영혼들이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있지만 영혼과 마음이 가닿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이상한 곳인지 실감하며 개츠비는 죽음을 맞는다. G.G. 모임 시절 나는 ‘great’라는 그 쉽고 흔한 표현 속에 심오한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단어 속에는 ‘무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이라는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차가운 모더니즘의 신화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과장됨 없이 세련된 도시적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모던한 인간은 마치 멸균 처리된 사람처럼 한결같은 냉랭함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런 것은 기계인간의 속성이다. 피가 뜨거운 인간은 본성상 그다지 ‘쿨’하지 못하다. 한없이 끈적끈적해져 있고, 울렁울렁 감정의 물결이 몰려오는데도, 평정을 찾으려고 무지불식 중에 힘겹게 애쓰고 있다면, 한 번쯤 짚어보기 바란다.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피를 그렇게 식혀야 하는지. 당신이 원하는 것이 진정 구속됨 없는 자유인가? 그 자유가 당신을 정말로 행복하게 하는가?


이주은이 추천하는 관련 도서

『빈방의 빛: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 저/박상미 역 | 한길아트 | 2007년 12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실업사회를 혐오하며 파리에서 쾌락적이고 허무한 생활을 보낸 젊은 지식인들을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 불렀다. 이들 세대의 고독감과 소외감을 리얼하게 묘사한 화가가 바로 에드워드 호퍼이다. 호퍼의 그림을 “심난할 정도로 조용하고, 방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끝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정밀하게 읽어나간 미국의 계관시인 마크 스트랜드의 호퍼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책이다.

『도로시아 랭』(열화당 사진문고)
마크 더든 저/김우룡 역 | 열화당 | 2002년 12월

존 스타인벡의 소설과 도로시아 랭의 사진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대를 각각 글과 이미지로 각인시켰다. 나른하고 허무한 세계로 빠져든 상류층의 이미지 이면에 서부로 내몰린 이주 농업 노동자들과 도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도로시아 랭의 작품집이다. 포켓 사이즈로 작지만, 국내에 번역된 유일한 랭의 사진집이다. 호퍼와 랭이 당시 미국의 어느 지점을 포착해냈는지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김기태라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르

2024년 가장 주목받는 신예 김기태 소설가의 첫 소설집.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등 작품성을 입증받은 그가 비관과 희망의 느슨한 사이에서 2020년대 세태의 윤리와 사랑, 개인과 사회를 세심하게 풀어냈다. 오늘날의 한국소설을 말할 때, 항상 거론될 이름과 작품들을 만나보시길.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율의 시선』은 주인공 안율의 시선을 따라간다. 인간 관계는 수단이자 전략이라며 늘 땅만 보고 걷던 율이 '진짜 친구'의 눈을 바라보기까지. 율의 성장은 외로웠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진심으로 안아주는 데서 시작한다.

돈 없는 대한민국의 초상

GDP 10위권, 1인당 GDP는 3만 달러가 넘는 대한민국에 돈이 없다고? 사실이다. 돈이 없어 안정된 주거를 누리지 못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누구 탓일까? 우리가 만들어온 구조다. 수도권 집중, 낮은 노동 생산성, 능력주의를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선진국에 비해 유독 자영업자의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 왜 대한민국 식당의 절반은 3년 안에 폐업할까? 잘 되는 가게에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장사 콘텐츠 조회수 1위 유튜버 장사 권프로가 알려주는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장사의 기본부터 실천법까지 저자만의 장사 노하우를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