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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도하는 바다. 모든 개들이 내세에 사람의 몸으로 환생해서 착한 사람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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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바닥의 굳은살은 개들의 『삼국유사』였다. 수억만 년 전, 어느 진화의 갈림길에서 나는 개들과 헤어졌던 모양인데, 개발바닥의 『삼국유사』는 그 수억만 년의 시간을 거슬러서 내 앞으로 당겨주었다.


“니가 진주니?”
두 명의 은색 한복 중 키 큰 쪽이 내게 물었다.
“진주는 쟤고…,”
엄마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호명당한 진주가 발랄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이어지는 엄마의 설명 혹은 해명.
“얘는 진규고.”
“아! 우리 애가 하도 진주, 진주, 해서…. 여자애를, 이쁜 이름 다 놔두고 진규가 뭐래요, 진규가.”

그때 난 진주가 미웠다. 이유는 단순했다.
“야! 너 뭐야? 왜 니 이름이 더 이뻐? 넌… 개잖아!”
그럼에도 진주에 대한 나의 이해는 깊었다. 개에겐 표정이 없다고 말한 어떤 동물학자를 주저 없이 덜 떨어졌다고 비웃을 만큼.

<개>, ‘간혹 몸에서 순대 냄새를 풍기고, 종종 소리 하나 내지 않고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폭발하는 동안童顔의 미혼’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개>, 와 함께 산 지 팔 년째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두루 살피고 미루어 판단해 볼 적에, 얼마 전 딸이 했던 표현이 적절하지 싶다.
“예전에 엄마를 보면 아기를 시중드는 것 같았는데, 요즘엔 꼭 노인 수발하는 것처럼 보여.”
사람보다 서너 배는 빠르게 흘러가는 <개>의 시간이 새삼스러워지면서, 우리 가족들의 심사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우선 전제 하나.
사람도 엄밀히 따지면 동물에 속하겠지만 난 동물의 범위에서 사람을 제외하련다. 왜냐하면 <개>를 어떻게든 사람과 구분은 해야겠는데, 막상 동물이라 하려니 어차피 사람도 동물인데 거기서 거기이고, 그렇다고 짐승이란 표현을 쓰자니 영 마뜩지 않아서이다.

개, 소, 말, 사슴, 노루가 새나 물고기보다 더 인간 쪽으로 가까운 것은 그들이 다 함께 포유류들이기 때문이다.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나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란 중생들은 개나 말이나 사슴이나 사람이나 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아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자궁으로부터 태어나는 일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포유류들에게는 ‘인륜’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 개에게도 인륜이 있고, 포유류 공통의 정서와 행동원리가 있다. 이것을 견륜(犬倫)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리고 개와 사람 사이에도 지켜야 할 신의와 염치와 범절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개한테 마구 하면 개가 사람한테 마구 한다.

<개>는 말이다.
공동주택에서의 동물 기르기에 대한 논란, 공공장소에서의 파렴치 보호자(목줄 무시, 응가 방치 등)들에 대한 분노, 사람도 버려지는 판국에 유기견의 안위에 대하여 법석을 떨어대는 것이 마땅하냐는 회의, 거지발싸개 같은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도 있는데 한 끼 밥보다 비싼 옷을 ‘고작’ <개> 한 마리에게 입히는 것에 대한 한탄, 이런 것들을 떠나서 -왜냐하면 그건 <개>와는 전혀 상관없는 즉, <개>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에- <개>는 말이다.

당연히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물이라 하기에도 뭣한, 속 시원히 사람도 못 되고 속 시원히 짐승도 못된, 그런 존재라는 걸 시시때때로 알겠다.

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아주 오래된 비극.

일반적인 인상과는 반대로, 개들은 아무리 주인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도 결코 편안한 삶을 즐기지 못한다. 첫째, 자기들이 태어난 세상을 아직 만족스러울 정도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집과 음식은 물론 때로는 침대도 개들과 함께 사용하는 인간들의 모순적이고 변덕스러운 행동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계속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동굴』, 주제 사라마구


『성깔 있는 개』라는 책이 있다. 헝가리의 대문호로 통하는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로, 제목 그대로 성깔 있는 개와 그 성깔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사이의 진지한 이야기인데, ‘그러나 우리는 인간 정서의 근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고백해야 한다. 전문가라 할지라도 기껏해야 현상을 더듬는 정도이다. 영혼은 민감한 껍질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괜히 깊이 파고들어 가 그것을 훼손하는 일은 위험하고 무책임한 짓이다.’와 같은 매력적인 구절이 있다.

그 책의 말미에 보면, 『성깔 있는 개』가 단순히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되새기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역자의 견해가 나온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만 하는 일에 <개>와 관련된 책들이 줄 수 있는 도움의 범위는 내가 짐작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다. 왜냐하면 난 처음부터 끝까지 <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만 있기 때문이다.

이 개가 지옥에서 왔다고 계속 암시했지만,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생각한다면, 이 개는 수호천사라고 부를 만하다. 물론 기독교 또는 비기독교 교리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들이대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천사는 날개를 가진 존재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필요하지만 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 천사가 이따금씩 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뭐란 말인가. 꼭 짖는 개여야 할 필요는 없을 터인데, 어차피 영적인 존재에게 짖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짖지 않는 개는 천사나 마찬가지라는 것 정도는 인정하도록 하자.
『돌뗏목』, 주제 사라마구

딸아이가 동물에겐 영혼이 없고, 그러니 <개>가 천국 같은 곳에 갈 일도 없다는 지극히 종교적인 발언을 듣고 와서는 한참을 울었다. 제길, 아이 가슴에 꼭 그렇게 못을 박아야 해?

<개>와 함께 하는 삶이 무척 인상적이고 즐겁고 따뜻하고 재미나고 우스운 건 사실이지만 반면에 하루하루가 마음의 고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개>와 더불어, 그것도 진심으로 살아본 자만이 알 수 있는데,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김훈과 주제 사라마구가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게 일종의 소망이기 때문에.

김훈이 현재 나의 글쓰기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면, 나이 들어서 되고픈 하나의 모델로는 주제 사라마구를 들고 싶다.

주제 사라마구.
오래전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마도로스냐, 마로도스냐를 두고 바보 둘이 싸움을 했다. 그게 남의 일이 아니다. 사라마구이냐 사마라구이냐를 두고 한참을 헷갈려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사라마구는 나이가 들수록, 아니 늙어갈수록 더 위대해진다. 그의 나이 예순 넷이었을 때, 불후의 명작 『돌뗏목』을 지었다. 일흔 셋일 때 『눈먼 자들의 도시』, 일흔 여덟일 때 『동굴』, 여든일 때 『도플갱어』가 나왔다. 중풍, 혹은 치매를 걱정할 나이에 그 어마어마한 필력이라니. 한데 세계의 지성이라 할 만한 그가 <개>에 대해서도 온전한 이해를 보여준다. 특히나 <개>를 두고 나가는 ‘짓’에 대한 죄책감.

생각해보면 주인은 어떤 의미에서 해나 달 같은 존재이므로, 주인이 사라졌을 때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물론 개는 기다리는 시간이 긴지 짧은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한 시간과 일주일, 한 달과 일 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개는 부재와 존재만 감지할 뿐이다.
『동굴』, 주제 사라마구

라거나

개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원하는 것은 아무도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니까.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라는.

산책길에 다른 <개>들을 만나곤 한다. 외동으로 자라서인지 몰라도 대화가 꽤 길고 깊다. 어쩌면 이런 대화를 나눌 지도 모르겠다.
- 너는 얼마나 기다려봤어?
- 아주 오래~
아주 오래. 매우 많이. 너무 길게.

주세붕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원을 세운 조선 중기의 학자인데, 그 서원이 바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옷을 입고 행동은 말이나 소같이 하는 자를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짐승의 가죽을 썼지만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것을 그냥 짐승이라고 천하게 여겨야 할까?

그래서 기도하는 바다.

모든 개들이 내세에 사람의 몸으로 환생해서 착한 사람이 되기 바란다.

라고.
아멘.

+
우리 병원에 오시는 손님들을 관찰하면 말이죠. 개를 키우는 사람은 대개 평범하다고 할까, 상식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타입이 유난히 많죠. 가장 무서운 사람은 새를 키우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은 정말이지 나사가 한두 개 빠진 게 아니에요.

과연 나는 상식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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