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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사이비 철학자

지하철은 지나치게 오래 타면 안 된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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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난 확신할 수가 없다.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미치거나, 완전히 정상일 수는 없는 거다.
마음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예전에 지하철은 모든 면에서 책 읽기에 대단히 적절한 공간이었다. 물론 앞사람 등짝에 코를 박아야 할 만큼이나, 옆 사람 겨드랑이에 머리가 끼일 만큼 복잡한 경우는 제외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너무하리만큼 소란스럽고 산만하다. 그렇다고 버스처럼 구경할 바깥도 없는데 멍하니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라고 말한다면 유비쿼터스 시대에 촌스럽기는, 할지도 모르겠다. 하나 어쩌랴. 난 지하철에서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으니.

고로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책 선택이다. 그래도 마냥 되는 대로 산 것은 아니어서, 단순한 기준도 잡혔고 실천에 대한 요령도 생겼다.

첫째. 어렵거나 심하게 진지해서는 안 된다. 십중팔구 졸고야 만다. 내 친구의 경우 신나게 졸다가 정신 차려보니 입가에 침 한 줄이 아주 곡선미를 살려 흘러 있었다고 한다. 근데 그걸 또 어떤 아저씨가 빤히 쳐다보고.

둘째. 지나치게 쉽거나 짧아도 곤란하다. 탱글탱글 남아도는 시간이 무서워진다. 그러다 딴생각에 빠져드는 것도 아서야 할 일. 내릴 역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인데, 혹여 다행스럽게 계시가 떨어진대도 그게 하필 꼭 문 닫히기 직전이어서 꼴이 아주 우습게 되기도 한다.

셋째. 두꺼운 책은 절대 삼가야 한다. 읽고야 말리라는 욕심에다가, 그런 책 붙잡고 있으면 남들이 날 다르게 봐줄지도 모른다는 허영심에 백과사전급 책 끼고 나갔다가 객사하는 줄 알았던 그날의 기억. 생존과 직결되는 사안이 되겠다.

며칠 전. 거기서 다 벗어나 있겠거니 싶어 택한 책, 『혈통』. 읽는 동안 딱히 내가 주의해야 할 일이 없어 보였다고나 할까. 게다가 저자인 파트릭 모디아노도 처음부터 그렇게 방향을 잡아주었으니, “나는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리고 아마도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삶을 끝내기 위해 마치 조서 혹은 이력서를 작성하듯이 페이지를 써나간다. 이것은 사건과 행위의 단순한 필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고백할 것도, 해명할 것도 전혀 없으며, 내관(內觀)과 자기성찰에 대한 취향도 없다.”란다.

읽다 보니 마태복음의 포스가 느껴지면서 예전에 주워들었던 우스개가 떠올랐다. 수업 땡땡이친 신학생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 어디서 나왔어?
- 람 부분에서.
- 참을성이 없구나.
- 나는 요담 나올 때.
- 얼추 버텼네.
- 나는 엘리웃.
- 엘리웃? 거의 다 갔구만. 거기까지 갔는데 좀 더 참지 그랬어.

뭔 소리일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요담은 다윗이 등장하고 넉 줄 뒤에, 엘리웃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온다. 말하자면 『혈통』도 그런 식인데, 그렇다고 그저 죽 따라가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그럼 소설이 아니게? 행간을 살피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혈통’이라니. 민감하다.

0시와 0시 1분 사이
그 간단한 거리를 건너뛰느라
열두 번이나 우는 뻐꾹새

- 「밤 안면도에서」中, 김석환

십여 년 전. 공짜 신문 석 달치에 헤벌쭉해져서는 덤으로 챙겨온 뻐꾸기시계. 한데 나무에서 살아야 할 뻐꾸기가 헐값에 플라스틱에 집 짓고 살더니 목소리가 날로 날카로워지는 것이었다. 이런 짠한 것. 좋다, 나가 살아라, 보낸 곳은 재활용 센터. 아, 슬픈 혈통.

나는 혈통 있는 척하는 한 마리의 개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뚜렷한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너무나 파란만장하고 불확실해서 마치 반쯤 지워진 글자들로 신분증명서나 행정서식을 채우려 애쓰는 것처럼, 나는 이 흐르는 모래 속에서 몇 가지 흔적이나 몇 가지 표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 『혈통』, 파트릭 모디아노

한동안 혈통에 집착했던 적이 있었다. 순전히 전주이씨를 친구로 둔 덕이었는데, 그 기억에 의존해 얼마 전에 인물 하나를 창조했더랬다.

“내가 보기에 치근, 그는 타인의 시선을 유난히 밝히는 사람이었다. 논다니, 백수건달 주제에 그래도 세워야 할 면은 있는지, 그래도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만은 난동도 행패도 삼가려고 용을 쓰곤 했다. 나는 그 내력이 궁금했다. 관고려조 금자광록대부 예부상서官高麗朝 金紫光祿大夫 禮部尙書 무슨 무슨 부원군府院君을 시조로 모신 거룩한 핏줄이라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는 6대조 할아버지의 기개를 내려 받아서? 그 험한 시기에 여든하나를 채우고 돌아가셨다는 5대조 할아버지의 끈기를 탁해서? 아님, 스물여섯에 요절한 고조부의 여한이 유산이어서? 그 꿍꿍이가 무언지는 몰라도 그가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버지가 갱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어놓은 임시 족보에서 그의 이름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아버지더러 작은아버지라 부르지 않는가 말이다.”

혈통의 기본(하늘이 총명함을 아껴서 한 사람에게 아름다움이 다 돌아가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 정약용)과, 혈통의 속성(아래와 위는 정해진 위치가 없고, 높고 낮은 것은 정해진 명칭이 없습니다. 아래가 있으면 반드시 위가 있는 법인데, 낮은 곳이 없다면 어찌 높은 곳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는 법이지만 높은 데 올라가면 스스로 낮다고 생각한답니다. 결국 높다는 것은 낮은 것이 쌓여서 된 것이므로 아래는 위의 한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늘 높은 것을 추구하면 그 높은 위치도 낮게 보이게 쉽고,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자는 아무리 올라가도 낮아 보입니다. - 강희맹)을 고래고래 나타내는 글. 결국엔 내다버리고야 말았지만 말이다.


철그덩 철그덩 우아하게 흔들려가는 동안, 내가 가진 DNA의 내력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뭣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도 모를 벤 상처가 세 군데나 있는 손이 갑자기 우스워지면서였다. 분리독립이란 있을 수 없는 세습의 세계에서 개선과 퇴화는 규칙에 의한 것일까, 순전한 우연에 의한 것일까? 어두운 유리에 비치는 불투명한 내 모습은 무엇과 무엇의 타협일까? 혹은 어떠함과 어떠함의 접점일까? 도대체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나무일까?

첫 바람에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낙관적인 나무들이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힘겹게 자라는 데 익숙한 근엄한 나무들도 있었다. 죽은 자의 왕국인 땅속 깊이까지 뿌리를 내린 견고한 성처럼 흔들리지 않는 나무도 있었다. 기름진 땅의 산물인 풍성한 나무는 초록빛으로 넘쳐났고 그 풍요한 모피를 펼쳤다. 이 세상에서 아주 드물지만, 날씬한 몸매에 항상 꼭대기가 하늘을 향해 있는 몽상가 같은 나무도 있었다. 오래된 의혹으로 둥글게 감고 있는 옹이가 많은 나무, 뒤틀린 나무, 위태로운 나무가 있었다. 알파벳 소문자 i처럼 곧고 조금은 건방지고 묘하게 거만한 귀족적인 나무도 있었다. 나뭇가지로 아낌없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너그러운 나무도 있었다. 쉬지 않고 땅을 붙들어놓고 일하느라 바쁜, 줄지어 선 옹색한 나무도 있었다.
-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지하철은 너무 오래 타면 안 된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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