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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남자들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 카리 호타카이넨의 『그 남자는 불행하다』

그 남자들은 불쌍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 마티는 자포자기하는 대신에 스스로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집요함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일까. 정원의 그네에 앉아 아내와 딸을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은 잔잔한 감동과 함께 왠지 모를 안도감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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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원하는지는 몰라. 하지만 어떻게 얻어야 할지는 알고 있지.”
우리가 젊었을 때 조니 로튼(‘섹스 피스톨스’의 보컬리스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나도 조니 로튼을 따라 고래고래 악을 쓰며 노래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지만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그 불행한 남자의 이름은 마티 비르타넨(Matti Virtanen). 그는 원래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낮에는 창고 운반원으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가족들을 돌보며 가사 노동에 몸 바치는 것을 삶의 큰 기쁨으로 알고 살아온 중년의 핀란드 남자. 그러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난다. 아내와 어린 딸이 예고도 없이 집을 나간 것이다. 4월 초순의 어느 금요일 저녁, 하필이면 스웨덴과의 아이스하키 경기 중계가 한창일 때 말이다. 아내 ‘헬레나’는 이혼 소송을 청구했고, 6개월간의 별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유는 남편이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실 그녀는 집에만 붙어 있는 남편이 참을 수 없이 지겨워졌던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파국이었다. 애원하고 매달려도 헬레나는 요지부동이었고, 하루아침에 가족들을 잃게 된 마티는 고통과 상실감에 몸부림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 마티에게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온다.

‘저런 집을 갖고 싶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해가 인정사정없이 뜨겁게 머리를 달구고 있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허둥지둥 그 자리를 벗어났다. (…)
그 순간, 나는 그것이 내 소망이 아니라 헬레나의 소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
그녀는 집을 원한다.
나는 그녀를 원한다.
그렇다면 집의 도움을 받아서 내 뜻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길로 곧장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본문 중에서(‘마티’의 독백)

그 남자의 이름은 요르마 케세마. 제법 수완이 좋은 베테랑 부동산중개업자다. 일단 매물이 들어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치를 창출해 비싼 가격에 팔아치운다. 고객들의 예리한 질문을 어물쩍 받아넘기는 것은 그의 장기. 주택 관람이 있는 날에는 분위기 연출을 위한 소품을 구입해 사전에 관람할 집 마당에 세팅해 둘만큼 치밀하다. 주택 매매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가 뿌리는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가끔씩 그는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그의 휴대폰은 밤낮을 가릴 줄 모르고 에어컨이 없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느라 와이셔츠는 늘 땀에 젖어 있다. 걸음걸이는 부산하고 신경은 팽팽하며 항상 조바심을 내는 남자. 주말에도 세미나와 고객 상담일정으로 그의 스케줄은 늘 빡빡하기만 하다. 가끔씩 아내의 눈을 피해 바람을 피우기도 하지만, 마음은 늘 공허하다.

(…) 그러고는 테라스에 좀 더 머물며 요르마로 돌아오려고 노력했다. 또다시 “안녕하십니까. 홈타운의 케새마입니다!”로 주말을 온통 보낸 것이다. 고객을 상대하다가 보면 성씨만 가진 인간으로 변해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토요일 오후 혼잡한 1번 순환도로 한복판에서, 자신이 임의의 살덩어리로 존재한다는 것을 오로지 땀을 통해서만 깨닫는다.
-본문 중에서(‘케새마’의 독백)

마티가 살고 있는 아파트 위층에는 또 한 명의 불행한 남자가 살고 있다. 유제품 품질검사관 카를로 레후넨. 그는 흡연자들에게 강박증에 가까운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아래층에 사는 마티가 골초라는 이유로, 그를 거의 범죄자와 동급으로 취급한다. 베란다에서 수시로 담배를 피워대는 마티를 응징하기 위해 그는 마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결정적 증거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아파트 대부금을 오래전에 완납하고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남들 보기에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남자. 하지만 알고 보면 그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하다. 대범한 척하지만 쪼잔하고, 지나치게 섬세한데다 침소봉대하기를 좋아하며, 교양과 위선을 겸비했고, 본바탕은 선하지만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남자. 골초인 마티를 응징하려던 그는 되려 마티에게 크게 당한다.

8분.
저 녀석이 담배 한 개비를 피울 때마다 8분씩 수명이 줄어든다. 즉 하루에 스무 개비 피울 경우 160분의 목숨을 깎아 먹는다는 결과가 나온다. 한 달이면 4800분, 그러니까 80시간이며, 1년이면 960시간이니 도합 40일에 이른다. 저 개 같은 인간의 삶은 해마다 40일씩 단축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카를로’의 독백)

그 남자의 이름은 타이스토 옥사넨. 참전용사 출신의 70대 노인이다. 옥사넨 노인은 마티가 점찍은 노란 통나무집에서 살고 있다. 그 집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핀란드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한 단독주택으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노인은 50년 전 자신이 손수 지은 그 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마르타를 추억하며 조용히 살고 있다. 그의 일상은 조용하고 지극히 단조로웠다. 아들 내외가 자신의 통나무집을 부동산중개업자 케새마에게 매물로 넘기기 전까지는. 노인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낡은 집에 집착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둘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


나는 아들놈 앞에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래 봤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기 때문이다. 아들 녀석은 나와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나는 내 나라 내 조국 안에서 마치 외국인처럼 살아간다. 내가 아들 나이에 살았던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깊이 파묻혀버렸다. 지금의 이 나라가 내 나라를 뒤덮어 버렸다. (…)
나다운 삶, 그것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나만을 위한 시간, 그것은 또 뭐란 말인가. 모두들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같은 나라에서 살지는 않는다.
-본문 중에서 (‘옥사넨 노인’의 독백)

이 소설은 여러 명의 시점으로 모자이크처럼 구성되어 있다. 화자인 ‘나’는 마티이면서 케새마이고, 때론 카를로였다가 다시 옥사넨 노인으로 바뀐다. 그 남자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바로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 이야기의 핵심은 공동주택에서 살던 평범한 소시민 마티가 단독주택을 소유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으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해프닝이다. 그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헬싱키 시내에 위치한 괜찮은 단독주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마티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게 된다. 우선 세간을 모조리 팔아치운 그는, 낮에는 예전처럼 창고운반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에로틱 마사지와 장물거래로 돈을 마련한다. 뿐만 아니라 틈날 때마다 조깅복을 입고 쌍안경을 든 채 단독주택들이 늘어선 부유한 지역을 배회하며 ‘가진 자’들의 거주행태와 생활패턴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야심 찬 프로젝트는 예상과 달리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카리 호타카이넨
저자인 카리 호타카이넨은 핀란드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작가다. 1959년 출생. 지역방송국 리포터 출신인 그는 방송작가로 활동하다 『버스터 키튼의 삶과 업적』(1991)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다섯 번째 소설인 『고전주의자』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으며, 『그 남자는 불행하다』로 핀란디아 문학상과 북유럽 문학상을 석권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집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이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소설의 원제목인 『참호로(Juoksuhaudantie)』는 헬싱키 근교에 실재하는 거리 이름. 그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이 온갖 위선과 허위와 갈등 위에 위태롭게 존재하는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그러는 동안 총 서른아홉 집을 돌아보았는데, 그때 건네받은 온갖 다양한 팸플릿을 전부 모아두었지요. 그렇게 모은 팸플릿 뭉치만 대략 15센티미터 높이였습니다. 더 놀라운 건 그 팸플릿 속의 형용사들이 순전히 허구에 거짓말이라는 점이었죠.”
-저자의 말 중에서

이제 핀란드에서 집을 사고 대부금을 상환하는 것은 어느 정당을 지지하든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봉하는 종교가 되었다. 집값이 요동치고 거액의 돈이 오가고 이자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더니 급기야는 전국 각지에서, 무엇보다 헬싱키에서 독특한 부족을 양성해냈다. 그 부족은 은행 앞에 서서 제발 내 집을 갖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만트라를 읊었다. 그 부족이 10년 동안 지불한 이자만으로도 시골에 근사한 단독주택 한 채를 거뜬히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결국 이 작품은 평범한 남자들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다. 아니, 평범한 이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뭔가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자못 진지하고 나름대로 절박하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럽고, 한편으로는 연민을 자아낸다. 마티의 근본적인 목표가 다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집을 향한 그의 엄청난 집착과 온갖 괴상한 행동들 또한 참으로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는 지극히 가볍기만 하다. 그는 날렵한 칼잡이처럼 눈에 보이는 허상들을 찌르고 비틀고 발라낸다. 마지막에 앙상한 진실만 덩그러니 남을 때까지. 하지만 다행히도 카리 호타카이넨이 던지는 농담에 뼈는 있을지언정 독은 없다. 그 남자들은 불쌍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 마티는 자포자기하는 대신에 스스로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집요함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일까. 정원의 그네에 앉아 아내와 딸을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은 잔잔한 감동과 함께 왠지 모를 안도감을 안겨준다.


그 남자는 불행하다
카리 호타카이넨 저/김인순 역 | 책이좋은사람 | 2007년 12월

핀란드와 스웨덴의 아이스하키 중계방송에 푹 빠져 있는 사이 아내와 딸이 집을 나가버렸다! 가족이 인생의 전부인 남자 마티,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가족을 되찾을 길은 오직 하나뿐. 내 집을 장만하라!”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그 남자 마티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이 시대 한국 남자들의 자화상과도 놀라우리만치 닮은 핀란드산 초특급 블랙유머를 담은 이 작품은 핀란디아 문학상과 북유럽 문학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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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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