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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부록 #2

우리가 시간을 극복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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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극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고유한 미로, 고유한 세상, 고유한 얼굴 형상, 무한한 확장.

* 안톤 체호프

박노자가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안톤 체호프였다. 의대를 나와 의사로 살면서 정신없이 글을 써대다가 드디어 막 필명을 떨치기 시작할 즈음, 안톤 체호프는 자신의 글쓰기에 회의를 느끼고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깔리기도 전의 시베리아를 통과해 석 달 만에 사할린 섬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가 본 것은 유형지였는데, 박노자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체호프의 「사할린섬 견문기」 정도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귀여운 여인」이나 「갈매기」보다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체호프 단편선』 같은 단편선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편에서는 굽어진 거울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거울의 정체는 누구나 어떤 거울을 보게 되면 그 거울 속의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건데(물론 결론은 죽음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현명한 통찰력을 발휘하긴 싫고 그냥 인간적으로만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울한 여자 선배들을 보면 ‘나는 당신의 굽어진 거울. 당신은 내 마음의 굽어진 거울’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살다 보면 굽어진 거울은 다 필요한 것 아닌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견강부회도 이런 경우엔 용서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자비로운 신의 이름으로.) 하지만 언젠가는 체호프의 거울(미망과 미몽으로서의 거울)과 보르헤스의 거울을 진지하게 비교해 보고 싶긴 하다. 거울과 미로와 도서관과 나침반의 소설가 보르헤스가 거울에 대해 표현한 것 중에서 내가 읽고 가장 포복절도했던 것은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다.’이다. 물론 나중에 잘 읽어보면 포복절도할 문장은 전혀 아니지만.



 

각설하고 체호프에 대해서 말하자면 결코 다른 작가에게선 보기 어려운 체호프만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단편 소설 속 끝 문장들의 매력이다. 그의 끝 문장은 사건의 끝으로서의 문장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어떤 드라마를 예고하는 문장들이다. 종결되지 않는 사건에 대한 문장들인데 그럴 때 인간에게 결코 고상한 숙명이란 것은 없다. 우리는 그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라고만 묻고 싶어진다. 이런 문장들을 만나고 보면 인간의 운명에 이어 인간의 영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가장 희극적인 순간에 비극이 있고 웃기는 순간에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들이 있어서인데 그럴 때야말로 인간의 영혼의 역할에 대해 새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의 영혼이 여자들의 코르셋이나 브래지어 속 같은 곳에 감춰져 있는 것이라면(즉, 반은 정말로 가리고 싶은 마음, 반은 사실은 누군가 열어서 봐줬으면 하는 마음) 애써 들춰봐야 하는가? 돌아서서 모른 척해야 하는가? 나는 「귀여운 여인」 같은 체호프 소설들을 읽다 보면 진정으로 망설이게 된다.

체호프 소설에서 고상한 숙명만큼이나 미덥지 않은 것은 합리적인 의미이다. 체호프만큼이나 등장인물의 의상, 식습관, 일상생활의 평범함에 대한 묘사를 사전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해버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그런 묘사 속에서 일상은 분명히 운명과 연결되어 있는데도 주인공들은 어쩐지 운명의 주체라기보다는 에피소드의 담당자 같이만 느껴진다. 그럴 때는 합리적인 의미라는 게 뭐가 중요할까 싶고 그보다는 그냥 따뜻한 관심만이 중요한 것 같다. 하여간 체호프는 도처에 드라마와 비극이 있던 시대의 작가였다.

서비스 차원에서 내가 체호프의 단편소설 중에서 정말로 아름답고도 곱다고 느끼는 「미녀」의 한 문장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 소설 속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소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어쩐지 슬퍼 보인다.

마샤가 나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욕망도 열광도 쾌감도 아니었으며 어떤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이었다. 그것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마치 꿈처럼 모호한 슬픔이었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자신과 할아버지와 아르메니아 여인이 나아가서는 이 아르메니아 소녀까지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네 사람 모두가 인생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확실히 어떤 특정한 감정을 움직인다. 소설의 아름다움이 그러하듯이.

* 소로우의 일기

소로우를 처음 안 것은 입사해서 야근하던 날, 너무 배가 고파서 남은 초코파이라도 찾아 볼 겸 선배들의 책상을 둘러보다가 어떤 깔끔한 선배의 책상에 다소곳이 놓여있는 『월든』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날은 너무 배가 고파서 소로우란 이름이 ‘소보루’(빵)로 보였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빵 부스러기 하나 발견하지 못한 덕에 나는 책상 밑에 쪼그리고 앉아 (배고픔의 퍼포먼스로, 즉 누가 나를 구해주기를 갈망하면서) 『월든』을 읽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스가 치렀다는 열두 가지 고난도 내 이웃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난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헤라클레스의 고난은 열두 가지뿐이어서 끝이 있었으나 내 이웃사람들은 어떤 괴물을 잡아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이 없으며 단 한 가지의 고난도 끝장을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에 달군 쇠로 구두사의 머리를 지져줄 이올라스 같은 친구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머리 하나를 자를 때마다 머리 두 개가 돋아나는 것이다.’란 문장에 이르자 내 굶주림이 어쩐지 인류 전체의 고난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더욱 『월든』에 매달리게 되었다(역시 배고픔의 퍼포먼스로).

『월든』을 읽은 후로 『소로우의 일기』를 읽었는데 숲 속 은자 같은 그가 『시민의 불복종』의 지은이(그의 책이 나오고 그가 도망 노예들을 캐나다로 도망시켜 주던 그즈음, 유럽에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다. ‘한 사람의 인생을 특징짓는 것은 천성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반항이며, 겉으로는 순종하면서 안으로는 자신만의 삶을 사는 방식이 좋은 삶의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소로우의 말을 ‘시민 불복종’과 관련해서 읽으면 굉장히 와 닿는다)인 것이 놀랍고도 반가웠다. 1,000권을 발행한 첫 저서 『콩코드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중 4년 동안 팔리지 않은 700권이 돌아오고 그런데도 일 년이 채 안 돼 『월든』을 쓰게 되는 『소로우의 일기』 부분을 읽어 보면 여러분도 소로우가 얼마나 능청스럽게 멋지며 건강한 무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될 것 같다.

천 권의 책 중에서 706권이 마침내 나에게 돌아왔다. 그 책들은 소문보다는 더 내용이 충실했다. 내 등이 그것을 증언했다. 그 책들을 등에 지고 두 개의 층계참을 오가며 날랐다. 1,000권에서 되돌아온 706권을 빼면 294권이 남는다. 그중 76권은 기증본으로 나갔고 나머지 219권은 팔렸다. 나는 지금 900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 700권이 넘는 책이 내가 쓴 책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는 만족은 전과 다름없이 크기만 하다. 실제로 나는 1,000권이 다 상품으로 팔려나간 것보다 이 결과가 더 좋고 마음에 든다. 이 결과가 나의 은둔에 해를 덜 끼쳤고 나를 더 자유롭게 해줬다.

『소로우의 일기』 때문에 내가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인데

일단은 메아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 소로우는 메아리야말로 말로 할 수 없는 생각들을 떠오르게 하는, 심오한 소크라테스 식 대화법이며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대상이므로, 어찌 시간과 대기와 땅의 형태에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나는 그 뒤로 가끔 메아리를 들을 만한 곳에 가면 “야호!” 혹은 “심봤다!” 같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속에 있던 말 한마디 그걸 한다. 이를테면, “넌 괜찮니?” “넌 잘 있니?” 이런 말들. 메아리는 정말로 소크라테스 식으로 대답해준다.

귀뚜라미 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 소로우는 ‘귀뚜라미의 계절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떠날 날이 없을 것이다 .그 소리를 얼마나 잘 알아듣는가에 따라 한 사람의 정신이 얼마나 고요하고 건강한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 소로우는 개똥지빠귀의 소릴 듣고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은 들을 때마다 젊어지고 자연은 봄처럼 화창해진다’고 말했다. (이 문장을 읽고 난 내가 인간으로 화한 개똥지빠귀였으면 싶었다.)

등등등이다.

처세에 관한 책을 좀 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소로우의 일기』는 다시없는 적절한 책으로 보인다. 평범한 상황에서라면 이런 말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약속은 되도록 적게 하는 게 좋다.

삶이 기다리는 것이라면 곁눈질하지 말고 기다리자.

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준비와 초대에 걸리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나는 이 말을 무척 사랑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심할 때 얼마나 많이 뒤척거리고 얼마나 많이 마음속의 리허설을 하는가? 얼마나 많이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가?)



하지만 내가 『소로우의 일기』를 다시 한 번 펴 보고 싶은 순간은 항상 실패하는 순간이다. 자기 부끄러움으로 휘청대는 순간, 자신 없는 순간, 내가 형편없는 것을 남들이 알까 두려운 순간들인데 몇 군데를 발췌해 꼭 소개해보고 싶다.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나에게 비쳐지는 그의 인상이다. 재능이란 깊은 인격의 어느 한 측면에 불과하다. 우리는 새로운 행위를 할 능력이 아니라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재능을 얻는 것이다.

내 안에 무언가를 사랑하려는 정신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비난을 물리친다. 어떤 경우에든 나를 지켜주는 근거는 바로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이에 근거해서 나를 만나라. 그러면 나도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정신에 의지하자.

나의 인생 가운데에서 내가 다시 태어나도 기꺼이 다시 살고 싶은 시간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다.

사람들의 성공은 그들의 평균 능력에 비례한다. 꽃들은 강물처럼 바다에 이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돌이켜보면 자랑스러운 점은 거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업적이 내적인 열망이나 약속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만큼은 이를 완벽하게 안다. 우리의 이런 면을, 가장 강한 부분이 끝 부분이 아니어서 목표를 때리기 위해서는 목표보다 더 길어야만 하는 막대기에 비유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이웃에 대해 실망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희망도 절망도 아니며 과거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신비로워했던 것을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궁금해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인생을 결정지을 한 방울의 진실이라도 갖고 싶어 한다면, 새롭게 전진하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다 잊고 다시 새롭게 배울 용의만 있다면, 남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기의 비참함과 형편없음을 다 이야기해줄 수만 있다면, 동일한 사물도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는 내면의 깊이를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소로우의 일기』를 읽고 ‘단 하나의 기쁨으로라도 전체를 기뻐할 줄 안다’는 바로 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소로우 식으로 살면,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것 사이에 시가 생겨나는 경험을, 우리 스스로 한바탕의 시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소로우의 일기』 중에서 내가 방송할 때 금과옥조로 삼는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보려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수가 많다. 우리 앞에서 노동자가 무리를 지어 모여 있더라도 그들은 저마다 소규모의 서사시적인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석공은 아침을 먹고서 점심을 먹을 때까지, 그리고 점심을 먹고서 저녁을 먹을 때까지 아주 무표정하게 돌을 깨다가 하루 일이 끝나면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발견한다. 태양의 열기를 느끼면 그는 열을 막기 위해 창틀에 판자를 올려놓는다. 지금 시각은 정오로 치닫고 있다. 이윽고 그의 아내와 아이가 점심 식사를 위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가지고 온다. 그 석공은 노동의 무표정함을 누그러뜨리고 식구들과 함께 잡담을 나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 이상하게 우리 엄마가 첫 커튼을 달고 거실 창 앞에서 파안대소하던 그 행복한 얼굴이 생각난다. 창틀에 끼울 유리 한 장, 창에 칠 커튼도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준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의 수집가이고 싶다. 웃음과 주름과 한숨의 수집가.

* 보르헤스

<사랑과 영혼>의 명장면. 죽어 떠도는 영혼이 된 샘이 오다매와 함께 몰리를 찾아왔을 때 몰리는 오다매를 믿지 않는다. 그때 오다매는 샘의 말을 전하는데…… “당신은 성탄절에 내가 선물한 귀걸이를 하고 있고 내가 음료수를 엎질렀던 티셔츠를 입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몰리는 놀라움(안타까울 정도로)에 가득 차 오다매에게 문을 열어준다. 내가 선물한 귀걸이, 내가 흔적을 남겼던 티셔츠란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그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난 100%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한 대 쥐어 맞을 각오를 하고 말하자면) 보르헤스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라져 버릴 형상이라면 무엇이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가? 보르헤스는 이 한 세상 가열 차게 투쟁적으로 열정적으로 잘 살아보자고 말하는 작가라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한하다는 게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고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지금 이 순간의 내게 일어난 것을 해석해 보려고 (그러는 와중에 자기를 찾으려는 동시에 그럼으로써 시간을 초월하려는) 사력을 다했던 작가로 읽힌다.

누가 보르헤스를 읽으면 좋을까?

우선, 어려서 아서 코난도일을 좋아했다면, 히치콕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매트릭스>에서 불길하게 울리던 한 통의 전화에 두근거렸다면, ‘우리를 미치게 하는 마음속의 가시(splinter in the mind, driving us mad, <매트릭스> 중 트리니티의 대사)’를 가진 적이 있다면, 허무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져본 적이 있다면, 자서전적 소설이 시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어제 알았던 것을 오늘 모른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오로지 자기가 믿는 것만 옳다고 믿는 사람에게 염증을 느껴 본적이 있다면, 하필 지금 왜 태어났는지 속상할 때가 있었다면, 백과사전 읽는 게 취미인 적이 있었다면, 도서관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었다면, 서점에서 한 책의 인용문과 각주를 따라 다른 책을 사버린 적이 있다면, 계보를 따지기를 즐겨한다면, 여자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면(물론 한 시절에만 국한되어서), 가상공간에서 놀기를 좋아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보르헤스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읽으면 좋을 사람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 끌리는 사람들이다.

나는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들의 시간,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어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육지와 바다 위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구조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지요. 우리는 이 시간의 일부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호의적인 우연이 내게 부여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나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시간은 셀 수 없는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갈라지지요.

나는 내가 했던 한마디 한마디가, 내가 했던 몸짓 하나하나가 그의 완고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보르헤스를 읽겠다고 맘먹었다면 아무래도 도전은 『픽션들』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보르헤스는 『픽션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그의 독특한 스타일―미로, 존재하지 않는 소설에 대한 각주 달기로서의 소설, 상상의 책에 주석 달기, 철학적 계보 따지기. 숨겨진 비밀스러운 유사성 찾기, 백과사전적 해박함, 백과사전에 대한 패러디, 추리 소설적 기법,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동시에 몹시 환상적인 기법, 구체적인 경험이 아니라 논리에 의해 세상 구성하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가상의 세계 등장시키기―을 만방에 알렸다. 처음에 읽기 좋은 순서대로 꼽자면(솔직히 말하자면 이 단편들에 이 순서대로 차례차례 빠졌었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바벨의 도서관」「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일 것 같다. 보르헤스를 읽기 전에 한 가지만 염두에 둔다면 시간과 공간의 문제일 것 같다. 보르헤스는 아버지 쪽 집안의 내력대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서 마침내 국립 도서관장이 되었을 때는 장미와 호랑이의 노란색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이 보르헤스에게 미친 영향? 아마도 그에게는 공간보다 시간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외부 세계와 우리의 외부 세계는 분명히 다른 것이며 그래서 그는 ‘거울, 그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이를 보리라.’라고 현기증 날 정도로 현란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어느 날 말에서 떨어져 전신마비 상태로 누워 지내다 그가 본 모든 것을 외워 버리는 사람에 대한 글이다.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잎사귀들과 포도 알들의 수, 1882년 4월 30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있던 구름들의 형태, 전날 밤 네그르 강에서 노가 일으킨 물결들의 모양. 그리하여 그는 쉴 새 없이 상처의 화농과 이가 썩는 것, 피로의 진행과정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어제의 얼굴과 오늘의 얼굴이 다른 것에 놀라는 사람이다.)

바빌로니아, 런던, 그리고 뉴욕은 자신들이 가진 잔혹한 현란함을 가지고 인류의 상상력을 압도해왔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그곳들의 건물이나,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는 큰길에서는 아무도 남아메리카의 황량한 한 변두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행한 푸네스 위로 수렴되는 것과 같은 전혀 지칠 줄 모르는 어떤 현실의 열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 들여 버리는 것과 같다. (…) 그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는 마치 청동상처럼 기념비적이고 이집트보다 더 오래되고 예언과 피라미드들보다 앞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가 했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완고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완고한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것. 이 문장은 인간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약속에 관한 문장 같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나로선 결코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추리소설이다. 운남성의 성주 취팽은 홍루몽보다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쓰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길을 잃게 될 그런 미로를 만들기 위해, 즉 단 한 권의 책과 미로를 만들기 위해 성주의 권력을 포기했다. 한 권의 책이 무한한 책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취팽은 그 문제를 풀었다. 우리 역시 취팽의 무한히 확장되는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 책은 홀로 떨어져 있는 사물이 아니라 각 페이지가 개별적인 인간들과 맺는 무수히 많은 관계라는 것. 그러므로 셰익스피어를 읽는 순간 우리 모두 셰익스피어일 수 있고 호머와 단테를 읽는 순간 우리 모두 호머와 단테일 수 있다.

눈이 핑핑 도는 성교의 순간에 있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사람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암송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보르헤스와 친구 비오이 까사레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어느 날에서 출발한다. 비오이는 보르헤스에게 우크바르의 한 이교도 창시자는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했던 말을 전하고 보르헤스는 그 말의 출처를 묻게 된다. 비오이는 영미 백과사전에서 보았다고 말하지만 보르헤스는 어떤 사전에서도 그 말을 찾지 못한다. 다음 날 비오이는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걸어 우크바르 항목을 기재하고 있는 백과사전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비오이가 보았다는 그 백과사전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틀뢴의 제1 백과사전』이었다.

2년 전, 나는 어느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피상적인 언질을 발견했었다. 이제 우연은 내게 보다 정확하고 꼼꼼히 읽어야 할 어떤 무엇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 1941년 허버트 에쉬가 소장했었던 책에서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그 편지는 완벽히 틀뢴의 신비를 벗겨주었다. 틀뢴이라는 그 찬란한 역사는 17세기 초 어느 날 밤 루세른 또는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한 비밀 결사단체가 한 나라를 창건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2세기가 지난 후 그 비밀 결사대는 미국에서 다시 일어났다. 1814년 비밀 결사대원들 중 하나가 금욕주의자이고 백만장자인 에즈라 버클리와 면담을 갖게 된다. 애기를 듣고 난 버클리는 그에게 미국에서 한 나라를 창건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으니 혹성을 하나 창조하라고 제안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20권짜리 백과사전이 유통되고 있었다. 버클리는 그 상상의 혹성을 체계적으로 다룰 백과사전이 씌어져야 함을 암시했다.

결국 이 글은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며 짓눌리기도 하고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이란 것이 다름 아닌 틀뢴의 백과사전처럼 (즉,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세계도 그럴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생산물, 혹은 상상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끝없는 현혹, 혹은 가공의 현실 아래 놓여 있는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실천하는 도리밖에 없다. 즉,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가) 읽혀지는 방식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우리가 알고 행한다면 우리 또한 고유의 미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보르헤스의 글이 황당무계하다거나 무익하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암만 그래도 나는 한 가지만은 포기를 못하겠다. 보르헤스는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다. 즉,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무한하다고 했다. 한 권의 책의 운명은 씌어진 시간에 결판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어떤 의미 부여를 기다리는 형식이라 했다. 나는 이것이 책과 인간의 공통점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출생할 당시에, 대학에 들어갈 당시에, 취업을 할 당시에 결정난다기보다는) 어떤 의미 부여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이다.

음악, 행복의 순간들, 풍상에 찌든 얼굴들, 어느 황혼녘 들판, 어느 장소들, 그것들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거나 놓쳐서는 안 되었을 무언가를 말했거나 혹은 무언가를 말하려한다. 이것이야말로 미적인 것이다. (너무나 <사랑과 영혼>의 바로 그 장면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지난주에 내한한 재즈의 신 79살의 소니 롤린스(아마 살아서는 그를 다시 못 볼 거라 생각한다)는 마지막 곡을 부르면서 ‘music is everything’이라 했다. 그 말을 들을 때 또 보르헤스 생각이 났다.

내게 실제 일어난 일은 거의 없고 나는 많은 일들을 읽었을 뿐이다. 아니, 쇼펜하우어의 사상이나 영국의 언어적 음악보다 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 남자가 세상을 도안하는 일을 떠맡았다. 긴 세월에 걸쳐 공간을 지방, 왕국, 산악, 만, 배, 섬, 물고기, 방, 악기, 천체, 말, 사람들의 형상으로 채운다. 죽기 직전에야 그는 이 끊임없는 선들의 미로가 자신의 얼굴 형상을 그려낸 것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극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고유한 미로, 고유한 세상, 고유한 얼굴 형상, 무한한 확장.

☞ 1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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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앞으로 시작할 연재는 “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는 영화 <stand by me> 이후 나의 오래된 질문이자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같이 밥을 먹은 한 신사분은 “내가 태어난 이후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은 세상에 지적인 욕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해줬죠. “나이 든 우리 엄마도 새롭고 재미난 걸 보면 더 알고 싶어 하니까.”라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한 지적인 욕구에 관한 가장 따뜻한 말이었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 스스로 나에게 수도 없이 던지는, 그런 목이 메이는, 자신 없는, 주저주저하는, 누가 대신 대답해줄 수 없는 그 해묵은 질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으로 한편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읽었던 책, 다시 읽고 싶은 책, 기억 속에 영원히 넣어두고 싶은 책. 그런 이야기에 관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언제 만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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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황병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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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저/<박현섭>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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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로우의 일기 윤규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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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저/<강승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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