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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문학의 진경(眞境)

베트남 소설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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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웬옥뜨(1976- )는 베트남 ‘통일’ 이듬해 태어난 젊은 작가다. 『끝없는 벌판』(하재홍 옮김·쩐루언띤 그림, 아시아, 2007) 책 커버 날개의 저자 소개 글을 보면, 응웬옥뜨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가다.

베트남 농촌사회의 아픈 상처

내게 베트남은 터키에 비해 몇 배는 친근하다. 예전엔 이런 말을 함부로 못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75년 봄, 난데없이 TV에 등장한 베트남 관련 기록필름은 어린 내게도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은 물론 고마운 일이다. “하루 평균 오십여 명의 메콩 강 여성들이 한국 신랑을 맞이하는 오늘날”(하재홍)은 베트남과의 관계가 밀접하다.

응웬옥뜨(1976- )는 베트남 ‘통일’ 이듬해 태어난 젊은 작가다. 『끝없는 벌판』(하재홍 옮김?쩐루언띤 그림, 아시아, 2007) 책 커버 날개의 저자 소개 글을 보면, 응웬옥뜨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가다. “2005년 발간한 소설집 『끝없는 벌판』이 이틀 만에 초판 5천 권이 매진되면서, 베트남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 2006년 「끝없는 벌판」으로 권위 있는 베트남작가협회 최고작품상을 받았다.”

한국어판 『끝없는 벌판』은 표제작만을 싣고 있다. 옮긴이의 표현대로 「끝없는 벌판」에 “등장하는 참담한 가정사는 오늘날의 베트남 농촌사회가 안고 있는 뼈아픈 생채기”다. 술에 찌들고 폭력으로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는 “촌스럽고 고리타분한 사내들”부터 조류독감의 여파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아픈 상처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오리를 치던 그는 눈을 뜨고서 하늘을 말똥말똥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문 거품은 코를 찌를 듯한 악취를 풍겼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이 비워버린 살충제 병이 그의 옆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살기는 이다지도 어렵건만 죽기는 왜 저리도 쉬운 걸까.”

또 공복(公僕)이라는 자들은 세계 어디서든 어찌 이리 싹수가 노랄까!

“그들은 우리가 이같이 황량한 발판에서도 수만 가지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관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상냥하게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언제나처럼 우리에게 재앙을 안겨다주었다. 그들은 땡볕에 붉게 익은 얼굴 뒤로 곧 우리에게 내릴 형벌을 감추고 알량한 표정으로 유들거렸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문장을 무미건조하게 떠벌렸다(우리 집 오리들은 결코 ‘지시’ ‘근원 제거’ ‘종지부’ ‘해결’이란 낱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라는 단어에 아버지를 배제하는 남매의 누나, 생눈물을 흘리는 동생 디엔, 그리고 남매를 ‘사람’의 범주에 넣지 않는 아버지가 한 식구다. 고작 2?3미터 크기의 거룻배가 가난에 찌든 이들의 집이다.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래도 “둘이 하나였던 동-류(同類)”인 남매는 안 찌질거리고 소설의 분위기 또한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결말은 다소 진부하다.

응웬옥뜨는 베트남 작가협회가 펴내는 월간지 《문예》에 「끝없는 벌판」을 발표하고 나서 그의 고향인 까마우 성(省) 사상교육위원회의 소환을 받는다. 소환의 명분은 ‘정치?도덕?작가덕목 교육’을 시행하겠다는 것이었고, 이는 「끝없는 벌판」이 미풍양속에 어긋나며 희망의 전형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여론에 편승한 것이었다.

‘검열당국’은 「끝없는 벌판」의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단도직입적인 표현에 시비를 건 것으로 보인다. 검열당국의 ‘작태’는 오히려 「끝없는 벌판」의 전국적인 열풍을 부채질한다. ‘옮긴이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사랑 따윈 필요 없어, ‘끝없는 가난’을 벗어날 방편으로 외국인과의 결혼을 선택하는 그들 덕에 한국 노총각들은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대신 베트남 청년들이 노총각의 불효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빛과 그늘

응웬반봉(1921-2001)의 『하얀 아오자이』(배양수 옮김?박선양 그림, 동녘, 2006)는 베트남어 직역을 내세운다. 그 나라 말을 직접 번역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시대적 소임을 충실히 수행한 중역본(重譯本) 『사이공의 흰옷』(구엔 반 봉, 편집실 옮김, 친구, 1986)은 임무가 아직 남아 있다. 직역본을 뒷받침하는 일이다.

“길이 155미터에 무게가 500킬로그램에서 1톤에 이르는 포탄”(『하얀 아오자이』, 16-17쪽)은 잘못되었다. 아무리 초대형 폭탄이라도 길이가 100미터를 넘진 않는다. 155미터는 대포의 구경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것도 말이 안 된다. “155㎜ 포탄이나 5백㎏, 1천㎏의 폭탄들”(『사이공의 흰옷』, 8쪽)이 더 정확한 듯하다.

장편소설 『하얀 아오자이』의 응웬티프엉은 고리키 『어머니』의 파벨 블라소프를 닮았다. 파벨이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책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면, 프엉에겐 친구들이 변화의 동인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할 것 같다. 나 역시 현실을 직시하는 걸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었고, 타잉의 물음을 피했던 거다.”

『하얀 아오자이』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다. 1969년 5월 무렵 종군기자였던 응웬반봉이 만난 응웬티쩌우 여사가 그 주인공이다. 응웬티쩌우는 특출 난 인물이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응웬티프엉과 그녀의 친구들은 나라와 민족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당시 베트남의 보편적인, 순정한 젊은이들이다.

혁명적 낙관주의가 여전히 살아 숨쉬는 『하얀 아오자이』는 약간 동화답다. 그런데 이 순수한 이야기는 베트남에서 잊혀지고 있다 한다. “지금 베트남 청년들은 『사이공의 흰옷』을 모른다. 대신 그들은 서점에 가서 한국 인기 그룹의 브로마이드를 산다.” (김남일 산문집, 『책』, 문학동네, 2006, 169쪽)

바오닌(1952- )의 『전쟁의 슬픔』(박찬규 옮김, 예담, 1999)은 수작(秀作)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아주 빼어난 작품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 전장과 상대적으로 평온한 일상이 교차한다. ‘소설가 소설’의 성격을 지닌 이 작품의 화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먼지 쌓인 종잇더미에 담긴 이야기는 시간의 자취를 따라가며 분명하고 명확할 때도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호하고 불분명했다. 시간 설정이 뒤죽박죽이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전쟁기와 평화시대가 뒤섞여 있었다.”

베트남소설에선 처음 쓰인 기법이라지만 우리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방식이다. 『전쟁의 슬픔』을 읽으며 약간 놀란 것은 작품의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점이다. 가독성이 매우 높다. 소설 도입부에 묘사된 전쟁의 참상은 읽는 이를 빨아들인다. 문학성 또한 뛰어나다. 만만하게 볼 작품은 결코 아니다.

“전쟁의 슬픔은 이상하게도 병사들에게 사랑의 슬픔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 또는 홍강 너머로 사라지는 쓸쓸한 석양 같은 것이 떠오르게 한다. 전쟁의 슬픔은 우리를 과거로 이끈다. 그러나 그런 슬픔이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특정한 곳에 머물러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특정한 시점에 머무르는 순간 더 이상 슬픔이 아닌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더욱 그럴 것이다.”

『전쟁의 슬픔』에 대한 나의 호감은 필시 주인공 끼엔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대한 비관주의”에서 연유하리라. 내게 “나는 당원이야. 신지식인이지. 멍청이도 아니고 비관론자도 아니야.”라는 끼엔 어머니의 되뇜은 한마디로 ‘밥맛없다.’ 반면, 당에서 우파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힌 끼엔의 아버지에게선 연민의 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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