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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소한 한순간, 돌이킬 수 없는 - 치누아 아체베의 「설탕쟁이」

한 꺼풀 벗겨내면 너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역겨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는 슬픈 진실이다. 결국 「설탕쟁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사소한, 그러나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은 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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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마실래?” 클리터스가 물었다.
“그래.” 그녀는 기분 좋은 듯 가르랑거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가 있어? 게다가 설탕까지? 아이, 좋아라! 나도 좀 가져가야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머시가 설탕 더미에 손을 넣고 한 주먹 움켜쥔 채 핸드백에 넣으려던 찰나였던 것 같다. 클리터스는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떨어뜨리더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건 확실히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클리터스가 아주 해괴한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중략)
“이거 놔!” 머시가 갑자기 분노와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어떻게 했는지 가까스로 클리터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머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그의 얼굴에다 설탕을 던졌다. 그리고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울면서 뛰쳐나갔다. 클리터스는 설탕 조각 여섯 개를 바닥에서 집어 들었다.



친구들은 클리터스를 ‘설탕쟁이’라고 불렀다. 그는 ‘단니’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달콤한 걸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의 의치 서른두 개가 모두 ‘단니’라고 했다. 이야기는 클리터스가 설탕 한 움큼을 창밖으로 집어던지면서 시작된다. 일이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일어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오늘 내가 더 위대하다는 것을 설탕한테 보여주려고. 드디어 내가 설탕을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며 마음껏 내버릴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러자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마이크가, 클리터스와 설탕과의 길고 질긴 악연을 회상한다.

이야기는 1960년대 후반 ‘비아프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아프라 전쟁은 나이지리아 내전(內戰)이다. 다른 시각에서 말하면, 나이지리아 전통 부족인 ‘이보(Igbo) 족’의 독립전쟁이다. 아프리카라는 공간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전쟁 중에 생활필수품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 특히, 설탕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사치품에 속했다. 마이크나 클리터스 같은 흑인 청년들에겐 더욱 그랬다. 그러나 불행히도 클리터스는 ‘결핍의 날이 흘러갈수록 설탕과 차에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충족되지 않았기에 그의 식탐은 더욱 심해졌다. 불쌍한 친구를 보다 못한 마이크가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지만, 그럴수록 설탕에 얽힌 굴욕적인 에피소드만 늘어갈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크가 드디어 0.2킬로그램짜리 설탕 한 덩어리를 구해 클리터스에게 선물한다. 기쁨에 넘친 클리터스. 바로 그날 저녁, 클리터스의 여자 친구 머시가 두 사람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다. 맨 처음에 인용된 부분이다. 그것은 클리터스가 설탕 때문에 맛본 ‘가장 굴욕적인 패배’였다.

“그리고 설탕 때문에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지.” 갑자기 나는 잔혹해졌다. “그래, 아주 착하고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여자를 잃었어. 그것도 내가 사다 준 설탕 조각 여섯 개를 나눠 주기 싫어서.”
(중략)
“그 설탕을 네가 사 왔다는 것 잘 알아. 그건 네가 이미 얘기했잖아.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럼 뭐가 중요해?” 이렇게 되물으며 나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예전의 절박했던 시절처럼 지금도, 평화를 사랑하는 두 친구 사이라 해도 아무런 예고 없이 내뱉은 분노에 찬 말 한마디 때문에, 갑작스러운 비이성적인 독설에, 제정신을 잃고 쉽사리 격렬한 싸움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설탕쟁이」『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Telling tales)』에 수록된 치누아 아체베의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집에는 아서 밀러, 오에 겐자부로, 권터 그라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주제 사라마구 등 전 세계 거장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수익금 전액을 에이즈 관련 단체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발간됐다는 이력도 특이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집이 매력적인 이유는,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아프리카 문학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딘 고디머, 에스키아 음팔렐레, 은자불로 은데벨레, 그리고 치누아 아체베가 당신에게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똑. 똑. 똑.

아프리카 문학의 대표주자인 치누아 아체베는 1930년 나이지리아 동부 지역인 오기디에서 태어났다. 나이지리아 전통 부족인 ‘이보’족 출신으로, 비아프라 내전에도 참전한 바 있다. 아프리카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모든 것은 무너진다(Things fall apart)』를 비롯해 많은 소설과 시, 수필 등을 발표했으며, 그의 작품은 전 세계 50여 개 언어로 번역·출간됐다. 대개 아체베의 작품은 ‘아프리카 정신’이라는 거대 담론으로 분석되곤 한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설탕쟁이」는 좀 다른 맥락으로 읽힌다. 물론 이 소설 역시 비아프라 전쟁을 배경으로 흑인 남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뭐랄까, 이건 어쨌든 ‘아프리카 정신’이나 ‘전통의 계승’ 같은 묵직한 주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매우 가볍고 유머러스하다. 그러면서도 인간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문장마다 뚝뚝 묻어나온다.


「설탕쟁이」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아주 짧은 한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무의식적인 행동, 사소한 말 한마디로 폭로되는 또 다른 나. 그 실체라는 것은 대개 추한 것이다. 역겨움과 혐오를 동반하는 그 무엇. 클리터스에게 설탕은 시한폭탄의 뇌관 같은 것이었다. 평소에 그는 선량하고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설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의 이성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킨다. 고작 설탕 여섯 조각 때문에, 그는 헌신적이었던 여자 친구의 인생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한순간일 지도 모른다. 단지 한순간이다. 오직 몇 마디의 문장과 행동이 오갔을 뿐이다. 그러나 깨닫고 수습하기엔 너무 늦다.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기에, 그 한순간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시는 건너지 못할 깊은 골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은 쉽게 상처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선뜻 클리터스에게 돌을 던지기도 어렵다. 그의 ‘가장 굴욕적인 패배’가 혐오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내면에 시한폭탄의 뇌관을 하나씩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설탕쟁이’ 클리터스처럼 우리들도 무심코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꺼풀 벗겨내면 너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역겨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는 슬픈 진실이다. 결국 「설탕쟁이」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사소한, 그러나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은 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울 만큼,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일이었다. 고통은 그 친구보다 나에게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가 받은 고통도 항상 나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다.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나딘 고디머 편/이소영,정혜연 공역 | 민음사 | 2007년 12월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이 수록된 선집이다. 나딘 고디머, 가브리엘 마르케스,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 등 노벨 문학상 수상자 다섯 명을 비롯하여 살만 루슈디, 수전 손택, 치누아 아체베, 미셸 투르니에 등 이름만으로도 현대문학의 역사라고 할 만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작가들이 모두 저작권료 없이 수익금을 에이즈 관련 단체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작품을 내놓았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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