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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신윤복, 지금 당신 곁에 있다

오늘에 남은 그림 속에서 ‘바람의 화원’은 내내 살아있었다. 다만 그가 바람이었기에 우리가 볼 수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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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인 팩션(faction)은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 주로 소설 쓰기의 한 기법으로 사용되었지만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등으로도 확대되는 추세이며 문화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서 팩션이 문화현상의 하나로까지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2003년 3월 미국에서 출간된 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브라운(Brown, Dan)의 소설 『다 빈치 코드』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부터이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오늘날 사극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극들 역시 팩션 드라마라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왕과 나>의 내시 김처선과 폐비 윤씨의 멜로 라인이나 <정조 이산>과 도화서 다모 송현의 로맨스, 그리고 익위사 관원인 대수와의 우정은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극적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에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한층 흥미를 북돋는 팩션 드라마의 장점은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상상력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역사성과 오락성을 함께 구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화제(話題)를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오락성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역사를 왜곡할 위험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적 팩션의 무한한 가능성 - 바람의 화원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을 읽기 전, 필자는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등 몇 편의 역사소설을 제외하고는 감명 깊은 팩션과 만나지 못했다. 『바람의 화원』을 읽게 된 것도 그림 읽기에 매료되어 틈틈이 미술 관련 서적을 읽고 있는 필자 개인의 취향 때문이었지, 위 소설이 한국적 팩션의 수작이란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아뿔싸!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내 감성을 벼락 치듯 내리치는 작품의 마력에 빠져 도저히 헤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필자에게는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자 놀라운 독서의 경험이었다.

『다 빈치 코드』라니?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작가의 상상력은 한 모국어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필자에게는 자부심이었고, 소설적 긴장은 곧바로 현실의 팽팽한 떨림이요 일상의 파문으로 이어졌다. 읽기를 끝마친 지금, 필자는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달리 내 감성의 울림을 전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는 우리 예인의 긍지가 살아 펄떡였고 그 시대 조선의 삶이 활동사진처럼 살아 꿈틀거렸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두 천재들의 혼이 묵담으로 혹은 화려한 채색으로 묻어났고, 그들의 붓질에 역사는 적나라한 나신을 드러냈다.

이정명은 김홍도와 신윤복, 두 천재 화가의 삶을 역사 속에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여 오늘 우리에게 내어 놓았다. 사실(史實)과 상상력의 절묘한 배합은 소설 속에서 영복이 만들어낸 색과도 같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새로운 색으로 두 예인의 예술과 삶을 극적으로 그려냈다. 그 안에는 두 천재의 예술이 있는가 하면 뒤주 속에서 죽어간 아비의 비극에도 드러내 울지 못했던 정조의 눈물이 감추어져 있었다. 역사를 쓴 인물이 있었고 인물이 새긴 역사가 오늘에 되살아나 현대를 거닐었다.

김홍도, 「주막」, 종이에 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설은 마치 영화 제작을 위해 그려진 콘티Continuity처럼 두 천재 화가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읽는 독자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야기는 그들의 작품에서 사실성을 획득하고, 두 화가의 예술적 천재성을 꿰뚫어 본 르네상스 군주 정조의 혜안에서 예술혼은 불타오른다. 그림은 단순한 심미적 대상에 그치지 않고 이제 현실의 세상을 파악하는 더없이 유용한 도구가 된다. 두 천재 화가의 붓질에서 저잣거리와 백성들의 삶은 생동하고 반상의 허위와 허례는 부끄러워 숨을 곳을 찾는다.

정조의 명에 의해 10년 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수석화원 강수항과 수종화원 서징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두 화원의 천재성에 저절로 이마에는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다. 아니 그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추적해가는 서스펜스와 작가의 기막힌 추리적 기법에 독자들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해진다. 유일한 단서인 얼굴 없는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의 비밀이 풀리고, 죽기 전 강수항이 그려 건네준 다섯 명망가의 초상화 각 부분이 합쳐져 살인자의 얼굴로 드러나는 대목에서 소설적 긴장은 절정을 이룬다. 또한 출생에서부터, 신윤복에게 숨겨진 비밀의 꺼풀이 하나씩 벗겨지는 그 놀라운 반전은 독자들의 예단을 무참하게 비웃는다.

신윤복, 「쌍검대무」,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관

조선 후기 궁중화원 김홍도와 신윤복은 18세기 정조 시대의 혁신적 화풍을 이끈 천재 화가였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궤적은 극과 극으로 다르다. 궁중화원으로 활동하며 당대에 이름을 떨친 김홍도의 기록에 비해 신윤복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도화서 화원이었으나,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후문만 떠돌 뿐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근역서화징』(1928)에 나오는 두 줄이 신윤복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작가는 단 두 줄의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화석처럼 오래된 그림에 소설적 상상력을 불어넣어 그 속의 인물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소설 속에 함께 수록된 두 천재 화가의 그림들은 마치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밀랍인형들처럼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뛰쳐나와 18세기 조선의 비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림 속에 잠들어 있던 김홍도가, 신윤복이 깨어나 대장장이의 땀을 말하고 주막거리의 소소한 소문들을 들려준다. 기생들이 은밀한 속살을 보여주면 음욕에 사로잡힌 양반들은 체면도 내동댕이친 채 그녀의 치마폭으로 기어든다. 홍도의 붓질에서 남성이 불끈하면 윤복의 세필에서는 여성이 교태를 흘린다.

현대에 살아난, 아니 살려낸 천재들의 미학

두 천재 화원의 예술혼을 살려내는 것은 또 다른 작가의 천재성이다. 이 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미덕은 결코 “신윤복과 김홍도, 조선의 뒷골목을 그리다”라는 책표지의 카피에 있지 않다. 소설은 조선의 뒷골목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았을지언정,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지금 우리 곁에서 우리가 사는 현대의 골목길을 휘젓고 다니는 까닭이다. 비록 두 천재 화가는 조선을 살았으나 작가는 그들을 오늘 우리 곁으로 불러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아니 읽은 다음에도 필자는 바로 옆에서 아무 때나 그들을 만난다.

“화원이 그리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아니올지요.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은 화원이 본 것이 아니라 대상의 형태를 빌어 표현된 화원 자신의 꿈과 욕망과 희노애락일 것입니다.” (『바람의 화원』 1권 164쪽)

“실체를 그릴 수 있는 화인은 없습니다. 단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비친 상을 종이에 옮길 뿐이지요. 화인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실체는 그리고자 하는 화인의 욕망에 투영된 그림자가 될 뿐입니다. 그러니 화인이 아무리 있는 그대로를 그리려 해도 그것은 이미 실체가 아닙니다.” (『바람의 화원』 2권 26쪽)


김홍도, 「무동」, 종이에 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윤복의 말에는 현대의 미학이 숨 쉬고 있다. 작가는 윤복의 입을 빌려,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의 실체가 아니라 대상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현대 예술철학의 위대한 명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위대한 발견으로 알게 된 정신분석학적 성욕망이 윤복의 그림에서 은밀한 추파를 던지고, 홍도가 바라보는 곳에서는 ‘라깡의 깡통’에서 발견한 ‘봄’과 ‘보여짐’의 어긋남이 대상과 주체의 모호함을 희롱한다. 졸고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 이미지」를 보자.

내가 바라보는 깡통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발견, 대상을 바라보는 ‘나’ 역시 그 대상뿐만이 아니라 어딘가의 무수히 많은 응시자들에게 보여지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위대한 발견 덕택에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보임을 모르는 쪽이 대상은 실체여서 나는 그것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 쪽이라면(재현), 보여짐을 아는 것은 대상 역시 주체를 응시하기에 이미지는 두 욕망의 시선(응시)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것이다.

자신이 그린 대상에 대한 윤복의 인식은 위에서 말한 미학적 발견에 다름 아니다. 위 인용문 외에도 소설의 전편에는 20세기의 위대한 발견이라 할 수 있는 ‘욕망’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이 윤복과 홍도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토설된다. 라깡의 구조주의 욕망이론이 있는가하면 르네 지라르의 매개된 욕망도 도처에서 출몰한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변화와 이를 종이에 담으려는 두 화가, 특히 마지막 그림 대결에서 색맹의 결점을 일몰 때의 석양빛까지를 묵담에 반영하여 일절로 승화시킨 홍도의 기예에서 우리는 근대 회화의 혁명이라는 인상파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화인이 그리는 것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된 대상일 뿐입니다. (『바람의 화원』 2권 27쪽)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 간)의 저자 임철규에 의하면 눈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관이다.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며, 인식한다는 것은 전체 중의 부분만을 파악한다는 것이기에 눈이란 진정 감옥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말은 눈으로 본다는 행위는 인식한다는 것이고 인식이 있고 난 후에야 우리는 사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눈은 대상을 전체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부분만을 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부분을 전체로 인식하는 인식파편화의 오류를 저지른다. 눈의 작란(作亂)은 곧 인식의 파편화를 부른다. 졸고 「내게 눈은 달려 있나」의 한 문단을 보자.

어떤 사물에 대한 개념화 작업은 이전에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인식했던 경험의 내용, 우리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우리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는 어떠한 대상도 개념화할 수 없다. 즉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작란이 다름 아닌 개념화인 것이다. 경험의 단편에 속하는 그 때의 기억이란 얼마나 국소적이고 파편적인가. 하이데거의 계승자, 쟈끄 데리다는 ‘본 바’는 ‘회의’의 대상임을 암시하며 스켑티시즘(skepticism)이란 영단어를 거론한다.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여 개념화하는 이러한 ‘폭력’에는 눈이 초래한 기억의 단편적인 작란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책에서 인용한 윤복의 대상과 실체에 대한 태도는 곧 필자의 졸고에서 인용한 개념화의 산물이다. 눈의 작란과 각 개인의 경험과 기억의 작란에 의해 개별적으로 개념화된 대상을 그릴 뿐이라는 것이 그림에 대한 윤복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홍도와 윤복은 ‘동제각화’(하나의 주제를 각기 그리는 것)의 대결에서, 같은 우물가나 빨래터를 보고서도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신윤복, 「단오풍정」,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관

그림을 보는 작가의 뛰어난 심미안과 함께 탁월한 미학적 지식과 감각이 있었기에 소설은 탄생할 수 있었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뛰어난 문체와 문장에서 소설은 빛나는 걸작으로 빚어졌다.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단 두 줄의 기록만을 남기고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영원한 사라짐이 될 수 없었다. 바로 그의 그림이 남은 까닭이다.

오늘에 남은 그림 속에서 ‘바람의 화원’은 내내 살아있었다. 다만 그가 바람이었기에 우리가 볼 수 없었을 뿐이다. 다행히 우리의 시대에 또 다른 천재가 있어 그 바람을 우리 곁으로 불어오게 하였다. 지금 우리 곁을 스치는 바람에도 신윤복은 있을 것이다. 현대의 뒷골목으로 부는 윤복의 바람 속에서는 홍도의 애타는 부름 소리도 들린다. 오늘 작가는 그것을, 차마 여자로까지 만든 무한한 상상력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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