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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없는 이야기의 매력 - 『톰팃톳』

세상이 꼭 착하고 바르게만 굴러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것. 그것이 교훈 없는 동화 『톰팃톳』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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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절대로 알 리 없지요.
내 이름은 톰팃톳, 톰팃톳, 톰팃톳이라네.

- 본문 중에서

여기 평범한 아가씨가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엄마가 저녁거리로 구운 파이 다섯 개를 몽땅 먹어치운다. 속이 상한 엄마는 밖에서 물레를 돌리며 “내 딸은 오늘 파이를 다섯 개나 먹어 치웠다네.”라고 읊조린다. 마침 집 앞을 지나가던 왕이 노래를 다시 청하자, 딸이 창피해진 엄마는 이렇게 노랫말을 바꿔 부른다. “내 딸은 오늘 실을 다섯 타래나 자았다네.” 깜짝 놀란 왕은 딸을 왕비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부 청혼이었다. 왕비가 되면 1년 중 열한 달은 마음껏 즐기며 지내되, 마지막 한 달은 날마다 실을 다섯 타래씩 자아야 한다는 것. 만약 그렇게 못하면 딸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러나 엄마는 딸이 왕비가 된다는 생각에 들떠 덜컥 약속을 하고 만다.


『톰팃톳』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다. 독일에서는 ‘룸펠슈틸츠킨’, 이탈리아에서는 ‘조로부부’, 스웨덴에서는 ‘티렐리 투레’라는 제목으로 각각 알려져 있다. 내가 『톰팃톳』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세계전래동화 전집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 이상교 선생의 글과 스베틀라나 우슈코바의 매력적인 콜라쥬 그림으로 다시 출판됐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왕비가 된 딸은 궁전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지낸다. 하지만 약속한 달이 되자, 왕은 그녀를 물레가 있는 방에 가둔다. 그때 울고 있는 왕비 앞에 나타난 까만 괴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톰팃톳’이다. 괴물은 긴 꼬리를 흔들며 거래를 제안한다. 자기가 왕비 대신 날마다 실을 다섯 타래씩 자아 줄 테니, 한 달 안에 자기 이름을 알아맞히라는 것. 그렇지 못 하면 왕비는 까만 괴물의 아내가 되어야 했다. 왕비가 거래를 수락하자, 까만 괴물은 정말로 하루에 다섯 타래씩 실을 자아서 가져온다. 그러나 괴물의 이름을 맞히는 일은 쉽지가 않다. 마침내 약속을 하루 남겨 놓은 날 밤, 왕이 저녁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그 자리에서 왕비는 우연히 괴물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톰팃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래동화다. 일단 재미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동화는 이것 말고도 많이 있다. 그럼 유독 이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교훈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의 동화에는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실컷 펼쳐지다가도 막판에 가서는 당위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정석이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강박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어렸을 때 동화책을 읽고 나면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불편함의 근원에는 교조적인 가르침이나 강요된 도덕률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삐딱한 기질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옳은 길은 오직 하나 뿐이고 반드시 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대놓고 반박하기 어려운 이런 식의 교훈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그러나 『톰팃톳』을 보라.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왕비가 된 딸은 요즘 시트콤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다. 그녀는 과부인 엄마를 돕기는커녕, 엄마가 저녁식사로 만든 파이 다섯 개를 혼자서 냉큼 먹어치워 버린다. 별로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데다 식탐(食貪)까지! 게다가 천하태평의 성품을 지녔다. 톰팃톳이 나타났을 때도,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이다. 그녀의 엄마는 한 술 더 뜬다. 당장 딸이 왕비가 된다는 것에 혹해, 무시무시한 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엄마에 그 딸이다. 비상식적인 발상과 태도를 보여주는 왕도 엽기적이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불쌍한 여자를 협박해 취하려는 까만 괴물 톰팃톳 역시 ‘찌질’한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착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존경스럽지도 않은 인물들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또한 『톰팃톳』은 다른 모든 동화들처럼 ‘우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주인공이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급박한 시점에 갑자기 등장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버리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나타나서 문제를 넙죽 해결해 준다. 이런 요소들은 치밀하지 못한 구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예기치 못한 요소들이 이 황당한 이야기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톰팃톳』을 다시 읽으면서, 폴 오스터의 인터뷰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내가 말하는 우연의 일치란 사건을 교묘하게 조작하려는 욕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질 나쁜 18세기 혹은 19세기 소설들에서는 기계적인 플롯 장치들, 모든 것을 산뜻하게 연결하려는 충동, 모든 등장인물이 서로 관계있는 해피엔딩 등이 많이 발견됩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의 존재, 인간 경험의 황당무계한 특성입니다. 어떤 순간부터 다음 순간까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한평생의 확신이 한순간에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중략) 우연? 운명? 아니면 단순한 확률 이론이 작용하는 사례? 그것을 어떻게 부르는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인생은 그러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나 지혜, 용기 등을 갖춘 주인공들이라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러모로 자연스러울 것이다. 백마 탄 왕자가 키스 한 번으로 모든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톰팃톳』은 다른 종류의 판타지를 준다. 즉, 평범한 사람도 삶에서 아주 가끔씩 스쳐가는 행운에 의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 어리석고 한심해 보이는 동화 속 캐릭터들이 예기치 못한 행운에 의해 난관을 극복해 나갈 때마다, 독자들은 은근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그들의 해피엔딩을 보며 때로는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반복되는 우울한 일상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도 종종 고민을 하게 된다. ‘어떤 교훈을 어떻게 줄 것인가’ 혹은 ‘교훈을 어떻게 교훈이 아닌 척하면서 프로그램에 녹여낼까’라는 고민들. 특히, 지금 연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유아를 대상으로 한 인형극이기 때문에, 아이템을 정하거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있어 ‘아이들에게 교훈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 늘 시달리고 있다. 한참 기획회의를 하다보면, 이야기는 재미있게 풀렸는데 정작 교훈이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마다 자문 교사의 가이드 아래, 어떻게든 교훈적인 요소를 만들어 넣곤 한다. 하지만 가끔씩 ‘삐딱한 본성’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왜, 반드시, 아이들에게 교훈을 줘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뿐 아니다. 전형적인 상업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컷 웃기거나 때려 부수다가, 막판에 어설프게 감동이나 교훈을 유발하려는 시도를 보면 짜증이 난다. 왜 이야기를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는가. ‘교훈’에 대한 지나친 강박은 때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별로 남는 건 없지만, 읽는 동안 유쾌했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닌가. 이유 없는 재미, 주석이 달리지 않은 웃음, 이야기 자체가 주는 쾌감도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펼쳐 보이는 이야기는 왠지 정겹고 편안하다. 보고 있으면 위안이 되고, 내 인생에도 해피엔딩이 찾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세상이 꼭 착하고 바르게만 굴러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것. 그것이 교훈 없는 동화 『톰팃톳』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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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팃톳

<스베틀라나 우슈코바> 그림/<이상교> 글7,650원(10% + 5%)

하루에 파이를 다섯 개나 먹어 치운 딸이 어머니의 실수로 하루에 실을 다섯 타래나 잣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왕에게 오해를 받습니다. 왕은 '하루에 실 다섯 타래'라는 조건에 혹해서 여자를 데려온 뒤,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목숨을 빼앗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꼬리가 길고 몸이 온통 검은빛인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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