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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겨울에서 만나는 근대의 이면

첫눈이 내리던 지난 월요일 저녁, 필자는 인사동의 한 주점에서 아름다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첫눈치고는 제법 눈발이 굵은 눈을 맞으며 종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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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리던 지난 월요일 저녁, 필자는 인사동의 한 주점에서 아름다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첫눈치고는 제법 눈발이 굵은 눈을 맞으며 종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습니다. 매년 내리는 눈이지만 첫눈은 언제나 우리를 동심의 세계로 이끄는 마법 같은 힘이 있는 듯합니다. 컹컹 짖으며 뛰노는 바둑이는 없었어도, 마음은 고향 마을의 신작로며 눈 덮인 들판에 가 있는 것처럼 신이 났습니다.

주가 조작이니 위장취업이니 뇌물 제공에 비자금 조성 등 온갖 부정한 소문들로 세상은 우리네 가슴을 춥게 만들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내리는 첫눈처럼 곁에서 인정의 손길을 내미는 친구들이 있어서 우리는 마음속의 겨울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눈은 그치고, 그러나 여전히 바람은 찬 겨울의 문턱에서 필자는 벌써 눈꽃 찬란한 겨울 산과 고드름 빛나는 오두막으로의 겨울 여행을 그리워합니다.

상념도 잠시, 한 통의 전화가 치기 어린 제 서정을 깨고 맙니다. 생업과는 별개로 꽤나 열심인 시민단체로부터의 전화였습니다. “연탄 어떻게 됐어, 신청했어?” 겨울은 가진 것 없는 서민들에게는 참 살기 힘든 계절입니다. 특히나 올해는 치솟는 유가 등으로 한철 견디기가 어느 때보다 더욱 힘들 것이란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듭니다. “예, 신청했고 본부에 있는 지인에게도 특별히 부탁해두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독거노인들이며 결손 가정 등 챙겨야 할 이웃들은 늘어만 가는데 손길은 달리고 물자는 늘 부족하지요.

전화를 끊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주머니를 발견합니다. 머플러로 목을 감싼 그녀의 차림새에서 문득 고야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세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눈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달픈 일상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지요. 사무실에 가져다 두고 보는 화첩을 뒤져 고야의 <겨울바람>을 보다가, 내친김에 화가들은 겨울을 어떻게 그렸는지 궁금해 합니다.

고야의 <겨울바람>과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등 - 가혹한 민중의 삶

‘겨울바람’, 고야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aya1746~1828)의 그림은 어떤 범주로도 분류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벨라스케스에게서 사실주의를, 램브란트에게서는 통찰력을 배웠고, 그리고 자신의 표현처럼 ‘자연’에게서 배웠습니다.(『클릭, 서양미술사』) 그는 스페인의 궁정화가였지만 타락한 왕실과 부패한 교회의 광신주의에 맞선 참다운 예술가였습니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폭로하고 있는 악몽 같은 광경과 휘두르는 듯한 화필 등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검은 그림’ 시리즈를 통해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요.

『프란시스코 데 고야-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의 저자는 고야의 <겨울바람>을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의 취향의 문제이겠습니다만, 그 그림 속에 당시 스페인 민중의 참혹한 삶이 생생히 그려져 있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무적함대를 앞세워 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의 영화는 옛날이 되어 당시의 스페인은 프랑스의 속국 신세를 면치 못했고, 무능한 왕실과 귀족계급, 타락한 교회는 민중의 고혈을 빨아 제 배를 채우는 지경이었습니다.

거장 밀로스 포먼은 그 야만의 시대를 영화와 소설 『고야의 유령』에서 그려낸 바 있습니다. 아무튼 고야의 그림 <겨울바람>에는 당시를 살던 힘없는 민초들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살을 에는 삭풍 속에서도 힘겨운 행보를 해야 하는 민초들의 얼굴에서 고통스런 삶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나귀 등에 실린 죽은 돼지가 차라리 행복해 보입니다. 상반신을 가린 담요는 바람에 찢겨질 듯 뒤로 나부끼고 바람은 뾰족한 창처럼 그 사이를 파고듭니다. 눈조차 뜰 수 없는 그 걸음을 민초들은 살기 위해 걸어야 하지요. 마냥 신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냥개뿐입니다.

‘눈 속의 사냥꾼’(1월), 브뤼겔
‘우울한 날’(2월), 브뤼겔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 있는 겨울 풍경’, 브뤼겔

르네상스를 산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1525~1569)은 신화 속의 이상과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던 지중해의 르네상스 화풍과는 달리, 평민들의 삶을 코믹하고 사실적으로 그렸고 농부들의 일상을 주요한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초라한 농부들이 일하고 파티를 벌이고 춤추는 장면 등에 항상 풍자적인 요소가 나타납니다. 즉, 그는 일상의 장면들을 담아낸 풍속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승격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눈 속의 사냥꾼>은 계절별로 인간의 활동을 묘사한 연작으로 그 그림에도 ‘1월’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흰 눈과 대비되는 검은 윤곽만으로 보이는 지친 사냥꾼의 모습에서 우리는 서민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작업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힘들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고야의 시대는 한참 후의 일이지요.

그럼에도 서민들의 삶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2월’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브뤼겔의 그림 <우울한 날>에서는 겨울을 나는 민초들의 힘겨운 삶이 엿보입니다.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우리의 ‘보릿고개’가 연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화폭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그 안에는 헐벗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모네의 겨울 그림들 - 산업화 도시화의 어두운 그늘

인상파란 이름을 있게 한 장본인인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의 그림에는 겨울을 그린 많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1874년 첫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하여 마네와 함께 인상파의 태두가 되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영국 풍경화의 양 거두 컨스터블과 터너의 작품을 익히며 그림 공부를 했지요. 혁신적인 미술사조를 추종한 그의 무명 생활은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육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신조에 헌신함으로써 오늘날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차, 옹피에르의 눈길을 달리는 마차; 생시몽 농장’, 모네
‘건초더미’, 모네
‘까치’, 모네

모네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그치고 바로 그가 그린 겨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보게 될 작품은 <마차> <건초더미> <까치> 세 작품입니다. 언뜻 보면 우리나라의 화가가 그렸다 해도 그렇게 믿을 것만 같습니다. 서양의 겨울이나 동양의 그것이나 눈 덮인 세상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 세 작품 속의 겨울은 환하고 밝게 빛납니다. 마차는 눈 덮인 호젓한 들길을 가고 가축의 여물이나 퇴비로 쓸 건초더미에 지붕을 씌워 보관해둔 건초더미에서는 농부들의 지혜와 삶의 소중함이 배어납니다. 밤새 내린 눈이 지붕과 울타리, 온 들판을 덮은 농가의 아침에 까치가 날아와 앉아 있는 풍경에는 우리들의 어릴 적 고향마을이 있습니다. 산업화와 대량소비사회로 대변되는 근대 이전의 인정이 그림에서 묻어납니다.

‘아르장티유의 눈’, 모네
‘베티유가(街)’, 모네

그러나 이어서 보게 되는 <아르장티유의 눈>이나 <베티유가(街)> 등의 겨울은 이제 더 이상 환하고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림 어디에도 산업화의 물결과 도시화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럽고 배경은 칙칙한 회색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오늘날 파리의 잘 뻗은 간선대로의 이면에는 오스망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된 도시화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민중들의 애환과 눈물이 숨어 있음을 예고하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생라자르역’, 모네
‘생라자르역;노르망디로 가는 기차’, 모네
‘눈 속의 기차’, 모네
‘유럽의 다리;생라자르역’, 모네
‘유럽의 다리’, 카유보트
‘세느강의 해빙’, 모네

다음으로 보게 되는 <생라자르역>이나 <눈 속의 기차> <유럽의 다리> <세느강의 해빙> 등에서는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변모한 근대 도시의 우울한 얼굴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공장의 굴뚝 등에서 배출된 공해로 인해 희뿌옇게 죽어 있습니다. 노르망디로 가는 파리의 관문역인 생라자르역의 하늘에서 하얀 것은 기차의 수증기뿐입니다.

생라자르역 앞의 다리를 그린 유럽의 다리는 카유보트 역시 동명의 제목으로 그린 바 있습니다. 카유보트의 <유럽의 다리>가 산업혁명과 기술의 진전으로 이룬 근대의 약동을 밝게 그리고 그 근대의 활기찬 소비자를 그렸다면, 그 근대의 뒤편에서 죽어 가는 자연과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모네는 그렸던 것은 아닌지, 필자는 생각합니다.

세느강은 도시화로 배출되는 각종 생활하수와 산업오수로 그 본래의 청정한 색깔을 잃어버렸습니다. 배경으로 보이는 파리 시가지의 모습 역시 <인상, 해돋이>의 크레인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근대의 파수꾼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습니다. 아무튼 그랬거나 말거나 눈밭의 기차는 시커먼 석탄을 태우며 쉬지 않고 달렸을 것입니다. 근대는 그렇게 편리와 자연을 맞바꾸며 터널을 뚫고 나와 어딘지 모를 미래라는 불안한 지평을 질주하였을 것이지요.

겨울은 가고 봄은 올 것입니다. 세느강의 얼음이 녹듯 한강도 얼었다 녹으면 우리에게도 봄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부지발 근처의 세느강 얼음>의 사람들처럼 아직은 덜 풀린 겨울의 끝자락에서도 언 손을 호호 불며 물을 길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가는 한 삶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삶이 조금이라도 덜 추울 수 있도록 우리의 인정이 메마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부지발 근처의 세느강 얼음’, 모네

* 글과 관련된 그림과 해설은 필자의 블로그(//blog.yes24.com/epogue21)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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