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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 또는 상실감 - 무라카미 류의 「어머니의 수프」

예전에 라디오에서 이런 코멘트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일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확실히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선의(善意)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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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부다페스트에 돌아갔을 때 옛 친구를 만났죠. 그 친구, 망명하고 싶어 했는데, 망명하지 못했지요. 지금도 망명하고 싶어 해요.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외로워지고 슬퍼지잖아요? 난 정말 복잡한 심경이었어요. 그렇지만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수프를 먹고, 이것과 똑같은, 토마토와 잉어로 만든 수프, 겨울이었죠. 너무 따뜻하고 맛있어서, 그만 친구의 일을 잊었죠. 일순간에, 전부 잊어버렸어요. 그 친구의 고민, 고뇌, 잊어버렸어요. 그건, 좀 두려운 일이 아닐까요?” (본문 중에서)

예전에 라디오에서 이런 코멘트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일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확실히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선의(善意)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책을 읽다가 어떤 음식에 대해 풍부하고 자세한 묘사가 나오면,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책의 내용이나 맥락과 전혀 상관없는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무라카미 류의 요리소설집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를 읽었을 때에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요리와 여자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모두 32편의 짤막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누벨 퀴진, 훈기 포리티니, 트뤼프 등 이름조차 낯선 요리에서부터 핫도그, 삼계탕, 오므라이스 등 일상적인 요리까지 모두 32가지의 다양한 요리가 개별 테마로 자리 잡고 있다. 목차만 봐도 저자가 ‘미식가’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소설집이다. 그는 아예 서문에서 진귀한 음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호사스런 음식 취향에 대해 거침없이 밝히고 있다.

나는 해외에서 많은 돈을 낭비했다. 유럽이 주된 무대였는데, 각국에서 최고의 호텔에 머물렀고, 최고의 스위트룸에서 사치스럽고 진귀한 음식을 맛보았다. 나는 그때까지 인생에서 최고의 낭비를 즐겼다. 이 요리소설집은 바로 그때 쓴 것이다. (저자 서문 중에서)


무라카미 류는 이 책에서 특유의 감각적이고 화려한 문체로 온갖 진귀한 음식을 묘사하고 있는데, 확실히 그런 묘사를 읽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많은 음식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의 수프」라는 소박한 단편이었다. 아마도 음식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몸이 서늘한 정도로 냉기가 감도는 10월의 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유럽 스타일의 다양한 바와 나이트클럽을 취재하기 위해 빈에 들른 젊은 일본인 두 명이, 가이드와 만나 빈의 골목을 구석구석 누빈다. 가이드는 중년의 헝가리 여성이었다. 그다지 빠듯하거나 복잡한 일정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선술집에서, 자연스럽게 술이 오가고 여자 가이드는 자신의 개인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헝가리 동란, 소비에트, 망명, 미국인과 한 번 결혼한 경력, 도쿄에서 조지 대학에 다녔던 일 등.

공기라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다. 가죽 블루종을 입었는데도 몸이 서늘한 10월의 빈의 냉기가, 나에게는 너무도 멀고 먼 헝가리 동란이라는 사건에 선명한 윤곽을 그려주는 것이다. 건물의 벽이나 포도에 깔린 돌에 피의 흔적이 되살아나는, 그런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차가운 돌이 정서를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담과 돌길에 둘러싸여 있으면, 여자 가이드가 말하는 친구와 가족의 죽음이, 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다음 날, 그들은 교외로 이동했다. 차 안에서 ‘요리’가 화제로 떠올랐고, 그들은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 뭐였는지 한 사람씩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헝가리 여성 차례가 되자, 그녀는 ‘따뜻한 수프’라고 중얼거린다. 그냥 그렇게만 말한다. 모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어젯밤 빈 거리의 차가운 포도(鋪道)를 떠올리며, 그 차가운 돌길을 걸어 집으로 갔는데 따뜻한 빵에 수프가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날 저녁, 헝가리 수프가 식탁에 올랐다. 가이드는 문득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맛있는 수프는 좀 두려워요.”
그녀는 토마토의 빨강과 잉어의 투명한 기름이 아름답게 조화된 수프를 입으로 떠 넣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두려워요?”
“그래요.”
“그건 또 무슨 뜻이죠?”(본문 중에서)


그러자 그녀는 헝가리에 남겨진 친구의 이야기를 한다. 맨 처음에 인용된 부분이다. 아마도 1950년대 중반, 헝가리 동란 때의 일일 것이다. 헝가리에서 민주화 움직임이 일어나자 소련이 무자비하게 군사를 개입해 진압한 사건이다. 암울한 시절, 망명을 절실히 원하던 친구의 고민들…. 그러나 그 모든 걱정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수프를 먹는 동안 마술처럼 사라져버린다. 아마도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고 복잡했던 자신의 심정과 불행한 친구를 떠올리며 잠시나마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 얼핏 모순되게 느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충분히 공감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애니메이션 영화 <라따뚜이>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음식비평가 안톤 이고. 이미 독설을 퍼부을 모든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기다리는 그에게 라따뚜이 한 접시가 놓인다. 그러나 라따뚜이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 순간, 그는 순식간에 어린 시절로 빨려 들어간다. 망가진 자전거와 상처투성이 무릎,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문지방에 서 있는 소년, 안톤 이고. 소년의 어머니가 지금 막 만들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 한 접시를 놓아주며 쓰다듬어 준다. 음식을 먹는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10초 남짓한 짧은 회상 장면이었지만, 무척이나 강렬하고도 따뜻했다. 아마도 소년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그날 하루 동안 있었던 모든 힘든 일을 한순간 잊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요리비평가 안톤 이고 역시, 소박한 라따뚜이 한 접시를 통해 값비싼 요리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소중한 기억을 되찾았을 것이다. 박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마도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 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 맛은 반세기도 너머 전의 고향의 소박한 밥상뿐 아니라 뭐든지 넝쿨 달린 것들은 기를 쓰고 기어 올라가던 울타리와 텃밭과 장독대뿐만 아니라 마침내 고향에 당도했을 때의 피곤한 안도감까지를 선연하게 떠오르게 만든다. (박완서의 ‘음식 이야기’, 수필집 『호미』 중에서)

더불어 박완서 에세이의 다른 한 장면도 떠오른다. 한국전쟁 피난길에 겪었던 에피소드로 기억하는데, 그때 먹었던 수수부꾸미에 대한 묘사였다. 때는 한여름이라 뙤약볕이 이글이글 내리쬐고 있었고, 사방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 열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시간, 저자는 길에서 쭈그리고 앉아 먹었던 수수부꾸미가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노라고 적고 있다. 내가 이 장면을 인상 깊게 느꼈던 이유는, 고통스럽고 짜증나는 상황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 미각의 간사함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 먹었던, 치 떨리게 맛있는 수수부꾸미는, 어쩌면 인간의 모순성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질적인 두 가지가 강렬하게 공존하는 아이러니. 그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런 것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란 어떤 것일까. 어차피 정답은 없다. 꼭 값비싼 고급요리여야 할 필요도 없다. 아마도 그것은 진심이 담겨 있고 추억이 담겨 있는, 혹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개인적 정경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런 음식은 감동을 준다. 너무 맛있어서, 친구를 잊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잊고, 자신의 존재마저 뒤흔들어 놓는 음식의 힘. 그런 강렬한 느낌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직 그런 음식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꼭 한번 경험해 보고 싶은 순간이다.

이 수프도 좀 무서워,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세 사람이 동시에 웃었고, 다음 순간 웃음이 딱 멈추었다. 친구, 가족, 애인… 수프가 누구의 고뇌를 잊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했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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