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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하-선우은숙의 이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요즘 며칠 동안 전해진 유명 연예인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면서, 필자는 세태의 변화를 실감한다. 특히 이영하-선우은숙 부부의 파경 소식은 어느 일방의 부적절한 처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서로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이라 말해지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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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허니문>, 레이턴 作(『그림 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
화가 부부의 따스한 사랑이 느껴진다.

요즘 며칠 동안 전해진 유명 연예인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면서, 필자는 세태의 변화를 실감한다. 특히 이영하-선우은숙 부부의 파경 소식은 어느 일방의 부적절한 처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서로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이라 말해지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보수화의 물결 속에서 전체주의 양상을 강화시키고 있는 데 비해, 개인은 오히려 날로 진보의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다. 고루한 전통은 해체되고 개인을 억압하던 인습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국가주의의 광풍 속에서 사장되다시피 한 개인성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이혼을 굳이 눈살을 찌푸리고 볼 이유는 없다. ‘싫은 데, 혹은 같이 사는 것보다는 헤어지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면, 굳이 같이 살 필요가 없다’는 가치관의 변화가 오늘의 세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가정의 해체라는 현대사회의 그늘을 경시하거나, 결혼이 나와 타자 사이에 관계를 맺는 가장 개인적인 일인 동시에 이 세상이 계속되어지도록 기능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혼이란 제도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찌든 개인’보다는 이혼을 통해 ‘행복한 개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더 가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사랑은 개인적이나 결혼은 사회적이다. 결혼은 그래서 결혼제도라 말해진다. 제도란 인간이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미리 약속하고 짜놓은 틀이다. 때문에 우리는 혼인신고를 하고 성혼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선서를 한다. 이는 제도에 대한 개인의 피동적 수락이다. 그러나 제도에 대한 수락 이전에 개인성의 존중이 우선이다. 이것을 우리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은 이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늘 곱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최근에 급증하고 있는 황혼이혼의 경우는 바로 이런 개인성의 발견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일지라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미 아비로 살기보다는 아무개란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들을 황혼이혼의 법정에 세운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겠다는 사르트르-보부아르의 후예들이 내차는 ‘거침없는 하이킥’이 반도를 진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이혼은 결코 윤리적 판단 위에 서 있지 않다. 결혼이 제도의 수락이듯이 이혼 역시 제도가 보장한 사회적 행위틀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연애는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결혼은 사랑 없이도 유지될 수 있다는 역설은 제도의 측면에서는 참이다. 그 허울뿐인 제도에 갇혀 살기보다는 맘껏 사랑하고 한껏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선하다는 주장이 이제 이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변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 황당한 책의 제목처럼 아내는 사랑하기 때문에 두 남자와 살겠다고, 사랑하는데 왜 안 되는 것이냐고 인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규율당하는 제도의 맹점을 힐난하고 조롱한다. ‘폴리아모리(다자간 자유연애)’, 복혼이 오히려 애초의 인간 사회의 모습에 더 가깝고 진정한 것이라고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비록 ‘FC 바르셀로나’의 광팬이지만 사랑하는 그대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를 진정으로 축하해 줄 수 있다고 아내는 말한다. 이만큼 우리 사회의 의식과 사고는 변하며 자라왔다.

그러나 문학이 아무리 상상력의 소산이라지만 저 아내의 말은 아무래도 황당하다. 나름대로 자유로운 필자의 소견으로도 그것은 상상력의 세상에서나 그럴싸한 파격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파격과 일탈이 빈번할수록 살기 힘든 지옥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필자의 논지는 졸지에 횡설수설이 되고 만다. 대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가 중하다는 것이야? 수상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세상의 틀에 맞춰 살란 말이야? 아리송하다.

<대사들>, 홀바인 作(『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이론의 저자 권택영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홀바인이 그린 위 그림에서
이미 근대 관념철학의 선구자 데카르트적 주체의 소멸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두 남자 사이의 책상 위에는 과학적 발견에 의해 만들어진 각종 도구들이 널려 있는데,
그 아래 비스듬히 그려진 해골은 이런 인간의 창조력을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비웃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림이 지닌 욕망의 시선이고 그 응시에 의해 데카르트적 통합된 주체는 해체된다.

비밀은 ‘어긋남’에 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이란, 세상이란 아귀 맞지 않는 것이어서 우리의 삶은 불완전하다. 까뮈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부조리’(『이방인』)고 루카치 식으로는 ‘타락’(『루카치 미학』)이다.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곧 실존철학(『구토』『벽』 등의 사르트르 저작)이기도 하다. 소쉬르의 언어학(『일반 언어학 강의』 등)에서 비롯된 구조주의나 프로이트가 발견해낸 정신분석학(『꿈의 해석』 등)의 세계 역시 바로 이런 어긋남에 대한 위대한 탐구와 사유의 결과물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사고를 빌려 한층 발전시킨 라캉이나 르네 지라르 같은 이들은 세계와 개인의 어긋남을 ‘욕망’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준다.(『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 등) 그 복잡한 이론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욕망은 삶의 동인이요, 나와 타자 사이에 관계를 맺도록, 또한 관계 사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며 거의 유일한 끈이다.

결혼과 이혼이란 문제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란 정의는 개인과 세계의 대립, 혹은 세계와 개인의 간극이란 미학의 기본 테제와 흡사하다. 예술 속의 모든 주인공(‘문제아’)들은 ‘나’와 세계의 대립 혹은 불일치라는 실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때의 주체인 ‘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주체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라캉의 깡통’과 만나게 된다.

‘내가 바라보는 깡통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발견, 대상을 바라보는 ‘나’ 역시 그 대상뿐만이 아니라 어딘가의 무수히 많은 응시자들에게 보여지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위대한 발견 덕택에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보임을 모르는 쪽이 대상은 실체여서 나는 그것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 쪽이라면(재현), 보여짐을 아는 것은 대상 역시 주체를 응시하기에 이미지는 두 욕망의 시선(응시)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것이다.

필자의 지난 글을 읽은 독자라면, “아하, 이미지!” 하실지도 모르겠다. 이미지란 마음속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주입된 것, 곧 사회의 산물이란 정의를 기억하실 것이다.(『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때문에 우린 같은 이미지에서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미지가 실체가 아니라 서로 바라보는 대상 사이의 욕망의 교차점에서 생겨나는 심상이란 다소 어리둥절한 정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볼 뿐만 아니라 보여지는 존재다. 보여짐이 없는 삶은 얼마나 단순하고 행복하랴. 그러나 인간은 불행히도 바라봄만이 있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지식의 열매를 먹고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껴 서로의 몸을 감추려 한 것은 바로 보임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것은 보여지는데도 보여짐을 모르는 것,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대상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경우다.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오아시스를 꿈꾸며 걷는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다다르면 오아시스는 저만치 물러나 있다. 우리 삶의 목표도 다가서면 저만큼 물러나는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닌가. 돈도 권력도 성욕도 잡는 순간 저만치 물러나 손짓하는 끝없는 유혹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이다.”라고 말한다. 때문에 신기루가 없으면 사막을 걷지 못하듯 욕망의 지연이 없으면 인간은 살지 못한다. 라캉에 의하면 삶을 지속시키는 이 욕망의 지연은 ‘잉여쾌락’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믿고 다가섰는데 오히려 더 외로운 것은 대상은 늘 ‘흘러넘침’이어서 차액이 남는다. 이 차액 때문에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고 다시 대상을 추구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한평생 허덕거리다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삶의 허망함을 느낀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이것만 하고 나면 행복해지겠지, 그런 가운데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삶의 전부였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욕망이 한 번도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았을 뿐이고, 역설적으로 삶은 그랬기에 지속되어 온 것이다.

사랑은 추상적인 요구인데 그가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적결합이라는 욕구의 충족이다. 요구와 욕구의 충족은 늘 남아 다시 그를 욕망의 회로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 차액, 나머지가 욕망의 동인이요, 삶의 동인이다. 욕망은 살아 있는 한 충족되지 않는 결핍이요, 때문에 “(온전한 대상으로서의) 그 여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구아나 도마뱀은 찬란하고 영롱한 색채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그 색채를 탐내 사람들이 도마뱀에 화살을 꽂는 순간 영롱함은 사라진다. 욕망은 완벽한 충족을 모르기에 삶은 지속된다.

<올랭피아>, 마네 作
마네의 <올랭피아>를 비롯한 근대의 누드들은 수줍음이 없다.
당당히 관객을 응시하는 그 시선에는
전통과 인습의 타파 위에 새로이 모색된 근대의 질서가 자리한다.

주체는 대상의 응시를 인식하지 못해야만 환상을 지닐 수 있다. 환상이란 주체의 시선과 대상의 응시가 교차되는 어느 지점에서 생긴 이미지이다. 그러나 주체는 이 사실을 모르고 이미지를 실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편안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 이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사람들이 만든 제도도 이와 같아서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 이미지가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안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된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것은 타락(낙원에서 쫓겨난)한 인간에게 던져진 숙명 같은 어긋남이다.

그림이나 문학 같은 예술은 바로 이 어긋남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인 동시에 어긋난 실존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살도록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순결한 작업이다. 나와 세계의 단절을 극복하도록 끊임없이 부추기고 그 어긋남의 세계에서 절대 좌절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이혼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게 하는 마취제 같은 것이다.

올랭피아를 비롯한 근대의 누드들이 혁명적인 것은 그 모델의 계급성에만 있지 않다. 보임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바라보는 관객을 대상으로서 똑같이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욕망하듯이 나 역시 욕망하고 있다는 시선을 굳이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두 욕망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충돌은 일어나고 그 충격 에너지에 의해 세상은 움직인다. 이미지가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에야 편견은 깨어지고 주체와 객체(세계)는 편안해지고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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