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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우리의 영봉 설악은 울긋불긋한 고깔모자를 쓰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단풍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라는 소식이다. 바야흐로 여행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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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우리의 영봉 설악은 울긋불긋한 고깔모자를 쓰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단풍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라는 소식이다. 바야흐로 여행의 계절이다. 내려오는 한랭전선을 따라 산들이 아름다운 단풍색으로 물들면 산들은 몰려든 여행객들로 몸살을 앓을 것이다. 봄의 꽃구경, 가을 단풍구경을 나선 인파들을 보면서 필자는 ‘왜 우리의 여행은 천편일률적인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아쉬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제철 과일이 맛나고 그 계절의 소산이 아무래도 풍성한 것은 틀림이 없으니, 계절의 풍취를 만끽하기 위한 여행을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이름난 경승지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여행에서 과연 얻고 돌아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하는 말이다. 한번에 몰려든 인파로 길은 막히고 유명 관광지는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다. 그러니 사람도 고생이고 그 고장도 피로하다. 복잡한 도시 생활과 다를 바 없는 이런 여행의 패턴을 벗어나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다음은 필자가 기왕에 쓴 리뷰(『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 리좀)의 일부다.

여행, ‘개인’을 찾는 고귀한 경험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에서 느끼는 짜증과 고단함을 고스란히 싣고 가는 여행에서 대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단순히 목적지의 경승을 보고 현장존재증명 같은 사진 찍기에 열중하다 보면 돌아오는 차 안에는 피곤만이 실려 있다. 사는 곳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일시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느끼고 자신 안에서 무엇인가 찾아 돌아올 여행에서 ‘여유’는 여행의 필수품 같은 것이다. 짊어진 배낭에 넣어가야 할 것은 주전부리가 아니라 시간적 여유가 우선이다.

(중략)

때문에 기자는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들에게 여행의 패턴을 다양화해볼 것을 권한다. 자가용이나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몰려다니는 여행, 가족 아니면 친분 있는 사람들과 무리 지어 떠나는 여행. 이런 천편일률적인 여행의 틀에서 탈피하여 가끔씩은 혼자 떠나는 여행, 인적이 드문 곳으로의 여행,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나누어 떠나는 여행,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 등 다양한 여행의 방식을 고루고루 경험해보기를 권한다.


여행을 지독히 좋아하는 기자의 경우, 자주 여행을 다닌다. 그때마다 다른 여행의 방식을 통해 매번 다른 감상과 느낌과 인상을 가지고 돌아온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여행은 내게 있어 삶을 살도록, 갑갑한 세상살이를 견디도록 해주는 종교 같은 것이다. (가정을 꾸린 탓으로) 가족 단위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혼자 여행을 다닌다. 때론 아내만의 여행을 보내기도 한다. 떠난 사람은 홀가분해서 좋고 남은 사람은 그리워할 수 있어 좋다. 부부가 반드시 같은 여행지를 기억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내는 발리를 알지만 나는 모른다. 떠날 때는 시큰둥하다가 돌아오는 시각에 맞춰 공항에 마중 나갔던 날, 우리는 집으로 오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런 식이다. 아이들과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떼어두고 둘만이 다니는 여행은 젊은 날의 연애 시절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일부러 고물 버스를 타고 터벅터벅 걷는 재미에 가난했던 젊은 날은 아름답기만 하다. 늙어 보이는 남자와 젊어 보이는 여자의 동행을 보고 수군수군 불륜을 의심하는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다가도 그 세태에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 식이다.

가정이나 사회나 함께 사는 이들의 사이가 불편한 것은 ‘개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모든 사람이 한쪽으로만 모여들면 살기 쉬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이란 ‘이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개인을 인정해보라. 가족 간의 불화는 거의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아내는 살림살이에 대해 남편의 더 많은 기여를 기대한다. 남편은 육아며 살림은 아내의 몫이라며 바깥일의 고단함을 항변한다. 아내에게 아내만의 개인성이 있음을 존중할 때 가부장은 사라진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의지함으로 생기는 일상의 우울은 찾아볼 수 없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개인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된 후에야 진정한 사회의 통합이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획일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미 짜여진 폼에 맞춘 세상살이를 하고 그 폼에 맞지 않으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한 폼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심한 비난과 성토를 해댄다. 바둑판이 이미 형식이 갖추어진 평면이라 해서 그 위에 놓이는 바둑돌이 형식을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무쌍한 관계의 망을 형성하기에 형식을 넘어선 자유를 완성해내는 것이다.

여행이란 바로 이런 개인을 찾는 아주 고귀한 경험이다. 혼자이든 함께이든 여행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개인을 찾아가는 여정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 개인으로의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를테면 함께 떠난 가족이며 동료들은 이제 단순히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그 상대방의 개인성을 내가 배려하고 존중해야 할 중요한 대상으로 다가온다. 자연스러운 관계의 모색이 그들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내가 있는 위치에서 그들과 맺어야 할 적당한 거리와 흡인과 자장의 세기를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올 가을엔 여러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아요

가을은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계절이다. 현란한 색의 잔치가 끝나면 숲은 나신을 드러내고, 색감으로 우리의 눈을 유혹했던 잎들은 떨어져 뒹군다. 무협 또는 불교식 언어로 회광반조(回光返照)의 계절이다.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라는 뜻으로,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마음속의 영성(靈性)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선홍빛 찬연한 단풍나무 잎사귀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잎에서 우리가 끝내 쓸쓸함과 무상감을, 한없는 기다림을 지우지 못하는 것도 가을의 색인 까닭이다. 봄이 설렘이라면 가을은 반추(反芻)다. 뜻 그대로 되새김질하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다다른 삶의 시점에서 지나온 시간을 되새기며 앞으로의 시간과 남겨진 일상의 낱알들을 주워 모아야 하는 계절인 것이다. 바로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살펴보고 우리들 관계의 망을 새로 짜기 시작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그래야 시린 겨울을 견디고 다시 올 찬연한 봄의 신록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번 가을에는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가을의 쓸쓸한 얼굴을 만나보면 어떨까? 아니, 숨 죽여 울고 있는 가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어떨까? 그 안에서 함께 울고 있는 인생의 사연들과 대면해보면 어떨까? 필자는 생각한다. 봄과 여름을 온전히 던져 이루려 했던 필자의 수고가 허망하게 물거품이 된 지난 월요일, 필자는 고향 근처의 갈대숲에 있었다. 꿈이 스러지고 마음이 상해서일까? 필자는 활자로만 읽었던 갈대의 울음소리를 생전 처음 들었다. 신경림이 일찍이 알려주었듯이 그것이 “까맣게 몰랐던 제 울음소리”인 것을 비로소 알았다.

갈대 사이를 지나치는 바람의 꽁무니를 따라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곧 내 음성인 것을 알았다. 부대끼며 부비며 토해내는 갈대의 소리가 곧 내 인생의 울먹임인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내 음성과 내 울음을 듣고 나서야 어찌할 수 없는 현실과, 그럼에도 버리지 못한 미망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갈대숲 바깥의 수면 위로 튕겨 오르는 햇빛의 날카로운 비상을 보면서 필자는 겨우 하찮은 인생의 욕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랬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읽으며 내 삶을 결심하던 날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갈매기는 날아야만 하고,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정선의 민둥산에서도, 전남 장흥의 천관산에서도, 포천의 명성산에서도, 심지어는 서울 한복판 월드컵공원에서도 억새풀 축제가 한창인 모양이다. 아직 단풍구경 가기에는 이른 10월의 휴일에 여러분도 필자처럼 갈대숲을 찾아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여러분의 인생과 마주하기를 바란다. 하구, 뭍의 고랑을 타고 그 주변의 사람과 삶의 사연들을 간직한 채 흘러온 물길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삶을 향해 바다로 흘러드는 곳, 그곳에 갈대가 있다.

황홀한 낙조와 함께 못다 한 이야기를, 채 멈추지 못한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순천만에, 서천의 신성리에 갈대가 있다. 올 가을에는 어디서든 갈대의 울음소리를, 아니 내 삶의 진솔한 울먹임을 여러분도 듣기를 바란다. 인생은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가는 것이듯, 우리는 누구나 어느 한 지점에 다다르고 다시 또 한 지점을 향해 가야 하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의 통과의례일 터, 필자는 올 가을엔 여러분의 여행이 바로 그 소중한 통과의례의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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