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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

끝없이 이어지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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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이면 아빠가 내 옆에 누워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오르려다 수수밭에 떨어진 호랑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눈먼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졌던 효녀 심청.

지금도 겁이 많은 편이어서 공포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옆자리에 누구라도 앉아 있으면 안 그런 척 하느라 억지로 보기는 하지만. 집에서 혼자 공포영화를 보다가도 결정적인 장면이 나올 것 같으면 음소거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꺼버리거나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



 

어렸을 적엔 더했다. 침대 밑에서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온다거나 귀신이 세수하는 주인공을 뒤에서 노려보는 모습이라도 봤다 하면 침대에서 자지도, 마음 놓고 세수를 하지도 못했다. 자고 있으면 침대 밑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갈 것 같았고, 세수를 하고 있으면 뒤에서 내 어깨 위에 손을 덥석 올려놓을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빠는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시라(물론 잘 보시지는 못하셨다, 기억해보면 아빠도 결정적 장면에서는 채널을 돌리시거나 텔레비전을 꺼버리셨던 것 같다) 언제나 쉽게 잠에 들지 못했었다.

그런 밤이면 아빠가 내 옆에 누워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오르려다 수수밭에 떨어진 호랑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눈먼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졌던 효녀 심청. 용왕님의 병을 낫게 하려는 거북이의 고단한 여행과 용궁에 사로잡힌 토끼의 간계. 깨진 독을 등으로 막아주던 두꺼비, 콩쥐와 팥쥐 이야기. 한 편 한 편 들려주실 때마다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아빠는 귀찮아하시지도 않고 그 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들려주셨고, 그렇게 하룻밤에 몇 개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아무리 무서운 영화도 그 세계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이 이야기로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만 하나 걸린 어두운 밤길, 떡이 든 광주리를 머리에 얹고 길을 걷는 여인이 떠올랐다. 구렁이를 활로 쏘아 죽인 선비와, 은혜를 갚으려 종을 머리로 받아 울린 까치가 그려졌다.

언제부터인가 밤이 무섭지 않게 되었고, 이야기도 듣지 않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주말마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렸고 나는 또 수많은 세계와 만났다.

지금은 학교 수업과 공부에 치여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한다. 다만, 읽는 것을 좋아하고 쓰는 것, 말하는 것도 그렇다. 되짚어보면, 그건 어렸을 적 잠자리에서 들었던 전래동화들 덕분이었다. 전래동화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할 수 있었다. 인물과 배경을 세우고 사건들을 끼워 넣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은 극간들을 상상했다. 책의 좋은 점이라면 그것이 아닐까. 영상은 영상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상상력을 앗아가는 것 같다. 상상력의 여지는 두지 않고 쉴 새 없이 관객을 몰아대는 것이 영상이니까.

다른 세계와의 만남, 지금도 나는 만남을 위해 읽는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전래동화를 통해 나는 다른 세계와 만나기 시작했고, 즐거움을 깨달았다. 눈물과 웃음, 아쉬움과 땀이 그곳에 서려 있었다. 같이 울었고, 같이 웃었다. 많이 배우기도 하고, 생각도 했다. 밤이 무섭지 않을 나이까지, 내 키가 한 뼘쯤 더 자라고 조금 더 먼 곳을 내다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그곳에서 살았다. 내게 많은 것을 준 세계들이었고, 시간들이었다.

언젠가 친척 동생이 집에 왔을 때, 선물이라도 하나 해줄까 하고 서점에 들렀었다. 어렸을 적 내 모습이 겹쳐 보이던 동생에게 전래동화책을 한 권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서점에서 전래동화는 찾기 힘들었다. 명작 동화집이 몇 권 꽂혀 있긴 했지만, 그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어렵사리 책을 한 권 골라 사오면서 나는 안타까웠다. 조상들은 전래동화에 이해와 배려를 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세계가 그 안에 있었고,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겪었던 세계들이 더 이상은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18살, 이뤄온 것보다 이뤄야할 것이 훨씬 많은 나이다. 누워서 옛이야기를 듣던 시간들이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음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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