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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없이 사라진 선생님의 집필실 - 함석헌 ②

선생님은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광고 전단지를 적당하게 잘라 실로 꿰매고는 인쇄되지 않은 면을 메모지로 사용하셨다. 함석헌 선생님은 휴지 한 장 함부로 버리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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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너무 헤퍼요. 노자는 물자를 아껴 쓰라고 했지요.”

선생님은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광고 전단지를 적당하게 잘라 실로 꿰매고는 인쇄되지 않은 면을 메모지로 사용하셨다. 함석헌 선생님은 휴지 한 장 함부로 버리지 않으셨다.

‘타다만 <해전사>’와 동백나무

1987년 선생님이 외국 여행 중일 때 댁에 화재가 발생해 선생님의 귀중한 책들을 비롯한 삶의 흔적 또는 메모·기록들이 모두 타버렸다. 그 메모지에는 강연하러 가기 전 말씀하실 내용을 정리되어 있기도 했다. 사실 선생님은 강연 전 골똘히 생각하고 준비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그것들도 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귀국하신 후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우리가 펴낸 『오늘의 사상신서』 등을 갖다드린 적이 있는데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모서리만 타고 만 책을 그대로 서가에 꽂아두신 것이었다. 책 모서리는 탔지만 속은 타지 않아 조심스럽게 다루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사물은 소중해서 선생님은 하나라도 쉬이 버릴 수 없는 듯했다. 그처럼 어떤 존재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책을 만들면서 나는 선생님의 사진을 제법 찍어두었다. 동아일보사에서 같이 일하다가 1975년 함께 퇴사당한 사진작가 임학권형과 중앙일보사에서 일한 바 있는 사진작가 황헌만형에게 부탁해서 선생님의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남겨두었다. 물론 우리 출판사에서 강연하시던 모습도 찍어두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사진들과 다른 사진자료들을 사진작가 박영숙 씨가 작업해 2001년 선생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함석헌전시회'에 낼 수 있었다.

나는 파주 통일동산의 헤이리 마을에 집을 지어 이사 오면서 선생님이 가꾸시던 해장죽 몇 그루를 캐어와 정원에 심었다. 이 대나무는 선생님이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캐어다 뜰에 심어 가꾼 것으로 선생님 생전에 여러 사람들이 이 대나무를 분양 받아 가기도 했다. 나는 가끔 해장죽을 보면서 꽃삽을 들고 꽃과 나무를 가꾸던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을 생각한다.

함석헌 선생님 댁에서 가져온 대나무를 필자의 집에 옮겨 심었다.

상당히 굵은 동백 한 그루도 옮겨왔다. 40여 년 선생님이 키우던 것인데, 겨울에는 온실에 넣어 보호해야 한다. 대나무도 그렇지만 동백도 선생님의 고결한 사상과 정신을 닮지 않았는가.

이제 나는 선생님이 키우던 보리수도 옮겨오려 한다. 좁은 마당에서 나무가 자꾸 자라면서 집을 덮고 있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선생님의 큰아드님 함우용 선생이 말씀했다. 선생님이 온실에서 키우던 선인장도 계속 자라 잘라주고 다시 잘라주지만, 그 가꾸는 일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자유 없는 시대에 어찌 사상의 발전이 가능한가

첫 전집을 만든 지 벌써 19년이 됐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새 함석헌전집’을 준비하고 있다. 한 시대의 우뚝 서는 사상가의 저작집은 계속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과 저술이 우리 민족 공동체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고전이라고 확신한다. 새롭게 편집하고 있는 『함석헌전집』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충분히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여행할 때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한 권씩 가져간다. 2월 19일부터 1주일간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면서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갖고 갔다. 1970년부터 80년까지 <씨알의 소리> 권두에 실린 선생님 글을 모은 것으로 함석헌 사상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씨알의 소리>가 창간됐다 폐간되고, 법정 투쟁을 통해 복간됐다가 다시 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는 10년 동안 선생님의 고뇌와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씨알에게 보뮳는 편지』는 어려운 시대를 성찰하면서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을 격려하는 시편이자 철학적인 단편으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선생의 고뇌와 열정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선생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글에 대한 권력의 감시가 참으로 교묘하고 구조적이라서 사상과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고, 자유 없는 시대에 무슨 사상과 정신이 발전하겠느냐고, 그래서 문장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문장을 다듬는 것이 자기 자신에 의한 또 하나의 사상적 검열 같다고 말이다. 이런 말씀을 떠올리며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면 50, 60년대보다는 70년대 글들이 더 거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역으로 더욱 생동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최근 나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읽기로 했다. 선생님의 성찰을 통해 나는 70년대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흙, 씨알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가 부서진 것이다. 바위를 부순 것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흙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옵니다.”

스스로 일군 ‘씨알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명과 자연의 이치와 씨알의 사상을 성찰한 선생님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야간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모산(毛山)에 밤비가 내리고’라는 어린이를 예찬하는 명문을 깊은 밤 비 내리는 모산의 그 공민학교에서 써내시기도 했다.

격동하는 역사를 혼신으로 부대끼면서 써낸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들사람 얼’이란 불후의 명문에서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힘찬 기상과 살아 움직이는 자태를 노래하고 있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술을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인사를 모른다, 체면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든,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다 썩어져가는 이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한길사 안암동 사옥에서 전집완간기념 강연을 하고 있는 함석헌 선생님(1988년)
‘나라는 절대로 칼끝에 세우지 못한다’

선생님은 “나라는 절대로 칼끝에 세우지 못한다”라고 단언하셨다.

“칼끝에 쌓아올리는 그 탑, 그 부조리, 반역사의 교만한 그 탑은 반드시 무너지고야 만다.”

“사람은 절대로 먹는 것만으로 살지 못한다. 또 먹는다 해도 혼자나 먹는 것이 먹는 것 아니다. 골고루 먹는 것이 참 먹음이요, 참으로 밥을 바로 먹었을 때 밥은 결코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다. 정신도 함께 자란다.”

"씨알아, 일어서자! 밤낮 짐승노릇만 하겠느냐? 한번 사람답게 죽어보자!"

선생님은 “모든 이름은 다 깃발이다”라고 했다. 놀라운 레토릭이다.

“민중은 말 때문에, 의견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말이야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이야 무슨 생각을 가졌거나 그것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이 민중의 맘씨다. 말과 생각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고 죽이는 것은 명분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염치없다. 더럽다, 타락이다, 업신여기면서도 그 손에서 얻어먹고 그 행렬에 끼어가지 않나? 말은 지도라 하지만 사실은 따라가는 것이다. 정치가가 민중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민중이 나라를 이끌어간다. 모든 이름은 다 깃발이다. 깃발을 메는 것은 민중이요, 지도자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늘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믿으셨다. 그리고 스스로 퀘이커교도가 되셨다. 그러나 선생님을 기독교의 울타리에 두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분명히 말씀했다.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선생님의 집필실

지난 1998년 선생님이 계시던 서울 원효로 그 집을 방문한 나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선생님이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계시면서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씨알들과 더불어 씨알의 사상을 펼치던, 선생님이 저 불멸의 저술을 해내신 그 공간이 너무나 작았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Small is Beautiful’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함석헌선집』
이 작은 집에서 이렇게 빼어난 저술들을 창출하셨구나! 판자로 지어진, 참으로 작은 이 집이야말로 보존되어야 할 문화유산이다. 그때는 함석헌기념사업회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이 사시던 이 집을 서울시가 사들여 기념물로 만들어 달라고 건의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그곳에 갔을 때 함석헌 선생님의 그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님을 알리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참으로 황망하고 허탈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우린 이것밖에 안 되는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가!

몇 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할 때 마키아벨리의 고택을 방문했다. 고택이라고 해봤자 그 후 집이 개축되어 서까래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한 사상가의 역사와 정신이 그것으로나마 살아 전승되고 있다는 표지가 되고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이 거처하시던 그 판잣집의 나뭇조각 하나라도 남겨 놓았다면, 그것이라도 모아서 어디 놔두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생각했다. 콘크리트 블록이나 벽돌이라도 몇 장 보존해 두었다면 이런 안타까움을 덜할 것이다.

한 시대의 사상과 정신, 문화와 전통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함석헌이라는 시대와 역사에 우뚝 서는 사상과 정신의 아이콘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평화운동, 같이살기운동을 주창하고, 남과 북의 통일정신을 일깨운 우리 시대의 스승을, 꽃과 나무와 어린이를 사랑하면서 동서고금을 넘나들던 사상가를,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글을 구현한 시인이자 교육자를, 우리는 함께 만나야 한다.

그리운 함석헌 선생님!
선생님 말씀이 큰 소리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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