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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의 사상가', 그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 함석헌 ①

그는 늘 꽃과 나무를 가꾸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늘 꽃삽을 들고 계셨다. 봄·여름·가을에는 그 꽃삽으로 정원의 나무와 꽃을 다듬으셨고, 겨울엔 온실에 들여 놓은 화분을 손질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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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책 만들기의 뒷풍경을 1년여(45회~50회 내외)에 걸쳐 <채널예스>와 <오마이뉴스와>에 공동 연재합니다. 김언호 대표는 이 연재를 통해 함석헌, 마르크 블로크, 윤이상, 에릭 홉스봄, 최명희 등 지난 30여 년 동안 수많은 독자들에게 지적 자극과 공론을 일으켜왔던 책의 역사는 물론, 지금 이 시대에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한 출판인의 모습, 그리고 우리 출판문화의 앞으로의 지향점까지 폭넓은 이야기를 다룰 계획입니다.

김언호 대표의 칼럼 <어느 출판인의 비망록>에 독자들의 사랑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는 늘 꽃과 나무를 가꾸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늘 꽃삽을 들고 계셨다. 봄·여름·가을에는 그 꽃삽으로 정원의 나무와 꽃을 다듬으셨고, 겨울엔 온실에 들여 놓은 화분을 손질하셨다. 온실에는 온갖 꽃이 피어 있었고 방안은 난과 그 난의 향기로 가득했다.

저 엄혹한 1980년대에 나는 나무와 꽃을 사랑하는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듣는 행운을 누렸다. 한길사는 『함석헌전집』 전 20권을 1983년부터 1988년까지 6년여에 걸쳐 출판했다. 선생님의 삶과 사색, 말씀과 글은 한국 현대사가 창출한 가장 빛나는 문화유산이다. 전집을 진행하면서 나는 1주일에 한두 번씩 선생님을 뵙곤 했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댁을 찾을 때마다 선생님은 늘 손에 꽃삽을 들고 계셨다.

함석헌 선생님(1980년대 중반)

6년에 걸쳐 만든 『함석헌전집』 전20권

함석헌 선생님의 성찰과 행동, 말씀하기와 글쓰기는 60여 년에 걸친다. 선생님은 1901년 3월 13일 압록강 하구인 평안북도 용천(2004년 4월 열차 폭발사고가 일어난 곳)에서 태어나셨다. 3·1운동에 참여한 다음 다니던 평양고보를 스스로 그만두고, 오산학교에 가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우고, 오산학교에 부임해 민족혼을 가르치다 일제에 의해 투옥된다. 해방 후에는 소련군에 의해 수감당하고 월남 후엔 자유당에 의해 다시 구속됐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박정희 군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고, 80년대에는 다시 신군부와 맞서다 1989년 2월 4일에 서거하셨다.

“도시에서는 상리(商利)가 나오고 농촌에서는 사상이 나온다”라는 말씀을 선생님의 강연에서 들은 적이 있지만, 선생님에게 나무와 꽃은 사상과 정신의 뿌리였다. 선생님이 남긴 수많은 말씀과 글에는 늘 나무와 꽃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죽었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972)

“새로 돋아나는 싹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습니까.”(1973)

“이른 봄 찬바람 속에 피는 수선화를 보십시오. 연하기 그지없는 것이라도, 세상 어떤 독재자의 손을 가지고도 그 황금입술의 나풀거리는 것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숨, 계절의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수선화에게 배우라』, 1975)


1988년 『함석헌전집』을 만들었던 나는 다시 1996년 1월 한길사 창사 20주년을 맞아 『함석헌선집』 전 5권을 만들었다.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과 「씨알 생명 평화」 같은 함석헌 연구논집 등 일련의 책을 기획한 나는 선생님과 그 어떤 운명 또는 인연을 나름대로 축적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어린 시절의 우상, 출판사 대표로 만나다

나는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함석헌 선생님의 이름을 알게 됐다. 부산에서 사범학교에 다니던 형님이 선생님 이야기를 늘 해주었고 나는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형님이 읽던 <사상계>를 읽어보려 했다.

1964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선생님이 강연을 하시면 늘 쫓아갔다. 1961년 <사상계> 6월호에서 박정희 군사 쿠데타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군사 통치를 반대했던 함 선생님은 1963년 6월부터 박정희 군사 정부에 의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나섰다. 서울 효창운동장과 광화문 시민회관, 대광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선생님의 강연은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972년의 10월 유신이라는 전대미문의 폭압적 통치로 정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 상황을 개선하고자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이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하고 나섰지만 그들의 운동은 강제로 중단됐다. 그리고 1968년 12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던 나는 1975년 3월 동료들과 함께 집단으로 ‘해직’당했다.

『함석헌전집』 20권

그렇게 해서 한길사가 탄생했다. 1978년 여름 서울 원효로 댁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책을 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때도 꽃삽을 들고 나무와 꽃을 돌보고 계시던 선생님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결국 1983년에야 전집 작업으로 함석헌 선생님과 인연이 크게 엮어졌다.

『함석헌전집』 편집위원회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천신만고 속에 발행됐던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회가 계승했다(선생님이 내던 <씨알의 소리>는 5·16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바로 안병무·계훈제·고은·김동길·김성식·김용준·법정·송건호 선생 등이다.

당초 안병무 박사가 우리에게 넘겨준 전집의 원고 분량은 10여 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료를 검토하면서 선생님의 많은 글이 빠진 것을 알게 됐고, 나는 간행을 진행하면서 자료를 보완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전집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 자체가 출판인으로서 큰 긍지와 보람이었다.

선생님의 저작 활동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에 걸쳐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시대의 격랑 속을 산 선생님의 저작과 말씀은 20권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일제와 남북의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투옥되고 수난 받는 가운데 상당한 분량의 원고가 유실됐다고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짝을 이루는 큰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도 유실되고 말았으며 해방 직후부터 계속된 ‘노자·장자 강의’도 책으로 엮이지 못했다.

'함석헌'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

1988년 전집 완간을 기념해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말씀을 듣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해 봄 일주일에 걸쳐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던 한길사 세미나실에서 선생님의 연속 강의가 열렸다. 함석헌 선생님은 판서를 하시면서 ‘씨알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우리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 생명과 평화, 민족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장례식에도 참례하지 못했다. 마침 그때 나는 베를린의 윤이상 선생님 댁에서 윤 선생님의 음악 전집 출판을 위한 자료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동두천에 있는 선생님 묘소로 가서 참례해야 했다. 선생님 장례식에서의 안병무 박사 추도사를 우리 출판사가 펴내던 책 소개 잡지 <한길 책 이야기>에 전문 게재했다.

선생님이 서거하시기 전에, 선생님의 모습과 말씀을 KBS에 남기게 하는 데 나는 약간의 노력을 한 바 있다. 나는 KBS 친구들에게 선생님의 모습과 육성을 KBS가 기록해놓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KBS는 국가 방?이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민족의 큰 사상가를 기록하는 일은 하나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KBS는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그램에 선생님을 세 번인가 모셔 ‘기록’으로 남겼다. 참으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함석헌 선생님의 글과 말씀, 사상과 정신이 우리의 현대사가 창출한 빛나는 문화적 성취라면, 선생님의 글과 말씀, 사상과 정신을 담은 『함석헌전집』은 우리의 빛나는 문화유산일 것이다. 나는 1993년 5월 선생님의 전집을 고급 양장본으로 제책해, ‘장서본’ 500질을 펴냈다. 『함석헌전집』은 1980년대에 활판으로 인쇄했는데 90년대에는 이미 활판인쇄소가 사라져 나는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활판인쇄소 한 곳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아울러 선생님의 강연을 CD 8장에 담아내는 기획을 했다. 선생님의 육성 또한 문화재기 때문이다.

1990년 한길사는 서울 강남 신사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서 나는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인 박상률 씨 등과 3년 동안 ‘함석헌사상연구회’를 진행했다. 함석헌사상연구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은 매달 한 번 모여 서너 시간씩 선생님 책을 ‘독회’하는 모임이었다. 3년 동안 우리 회사 회의실에 모여 선생님의 글을 번갈아 낭독하고 토론하면서 우리는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 문장과 말씀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이런 낭독을 통해 우리는 선생님의 문체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입말과 글말을 일체화한 함석헌 선생님의 문체야말로 그 사상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문화유산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도 함석헌 선생님의 문체 또는 수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한 번 쓰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신 바 있다. 그리고 『우리글 바로쓰기』『우리 문장 쓰기』를 써낸 이오덕 선생님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두 분 모두 그 작업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조만간 다른 연구자들이 ‘교향악 같은’ 선생님의 글과 말씀을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980년대 초반 함석헌 선생님 창동 자택에서 선생님과 필자

20년 만에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했소!

1985년 6월 13일 함석헌 선생님의 85회 생신을 축하하는 모임이 이화여대 후문의 한 음식점에서 열렸다. 전집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여러 참석자들이 노래 하나 하시라니까 선생님은 같이 부르자면서 ‘나의 살던 고향’을 부르셨다. 꽃삽을 들고 꽃과 나무를 가꾸는 정원의 할아버지는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수줍음 많은 함석헌 선생님은 정신의 협객, 사상의 협객이기도 하셨다. 평소에는 가타부타 별 말씀 없으셨지만 일단 씨알들이 운집한 강연회의 연단에 나서면 선생님은 씨알들의 영혼을 울리는 말씀을 한여름 날의 폭포수같이 쏟아내셨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늘 ‘함석헌 할아버지’를 모시고 말씀을 들으려 했다. 저 70년대 초반에 전태일이 노동자의 권리를 호소하면서 분신했을 때도 맨 먼저 달려가셨던 선생님이셨다. 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에 선생님이 어딘가에 가서 모임이라고 하고 말씀이라도 하려고 하면 경찰은 선생님을 못 가시게 ‘연금’하곤 했다.

1987년 봄, 선생님은 그 ‘연금의 망’을 뚫고 서울대에 가셔서 강연을 하셨다. 강연 전날 밤, 학생들이 학교 쪽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이튿날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에 진입,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강연하셨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강연하는 그날 아침에 선생님을 ‘자택 연금’하려 했지만 댁에 계시지 않아 당황했다고 한다.

“20년 만에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했소.”

댁으로 찾아간 나에게 선생님은 통쾌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협객의 사상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비호같이 행동하셨고 두려움 같은 걸 모르셨다. 군인들이 탱크 몰면서 총칼 들고 쿠데타를 했을 때도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에서 “나는 총칼 든 군인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라고 하셨다. 1950년대 후반 자유당이 마지막 패악을 저지를 때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면서 이승만 정권을 질타했다. 이것이 바로 들사람의 용기와 사랑, 정의와 진리의 편에 사는 협객의 사상과 용기가 아닌가.

다음 글: 흔적 없이 사라진 선생님의 집필실 - 함석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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