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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라고요?'

스벤 린드크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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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언론인 스벤 린드크비스트(Sven Lindqvist, 1932- )는 『야만의 역사』(김남섭 옮김, 한겨레신문사, 2003)에서 유럽인이 저지른 인종 대학살의 뿌리를 파헤친다.

완역판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지음, 김영선 옮김, 시공사, 2007)를 읽다가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선을 타게 된 계기를 묘사한 대목에서 좀 놀랐다.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주종관계는 어릴 적 읽은 어린이문고판에서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의 난파선 승선 목적은 그의 한계를 더 심각하게 노출한다.

“하루는 알고 지내는 농장주와 상인들과 흑인 노예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중 세 사람이 나를 찾아와 전날 밤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면서 한 가지 비밀스러운 제안을 했다. 그들은 비밀을 꼭 지키라고 당부하고는 기니로 갈 배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신들이나 나나 다 같은 농장주인데 하인만큼 꼭 필요한 게 뭐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흑인들을 데려와 드러내 놓고 사고팔 수는 없으니 흑인 매매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을 이곳으로 몰래 데려온 다음 자신들의 농장에서 나누어 갖자는 얘기였다. 한마디로 나한테 화물 관리인으로 배에 올라서 기니에서 무역을 맡아 줄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나는 자본을 전혀 대지 않아도 노예를 나눌 때 자기들과 똑같은 몫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접한 책 제목 수천수만 개 가운데 제일 듣기 싫고 되뇌고 싶지 않은 제목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를 들겠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사회가 얼마나 안정되고 합리적인지 몰라도 이 세상에 그런 나라는 없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계층 간 이동이 쉽지 않은 계급사회다. 영국이 누리는 풍요로움의 원천은 식민지 수탈이다.

이념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나, 굳이 내가 공감하는 정치적 입장을 말하라면, 나는 반제국주의자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제국주의 시대에 산다고 생각한다. 한미 FTA만 해도 ‘최초의 세계제국’ 미국이 만만한 우리나라를 드러내놓고 집어삼키려는 의도가 깔렸지 않던가. 거대제국이 억지를 부려도 그 세력권 안에서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소국’은, 식민지 모국이나 다름없는 나라의 의중을 따를 수밖에 없다.

누가 더 야만적인가?

스페인에서 시작된 유럽 나라들의 식민지 침탈은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등으로 이어진다. 스칸디나비아 3국과 스위스는 이런 나라들과 보조를 맞춘다. 이른바 서구 열강은 그들의 제국을 건설하면서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른다.

각 나라가 자행한 야만적 범죄의 잔인함은 도토리 키 재기다. 그렇지만 제국의 면적이 가장 넓고 제국을 오래도록 유지했다는 점, 추악함을 숨기고 번듯한 신사 이미지를 분칠했다는 점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죄질이 가장 나쁘다.

스웨덴 언론인 스벤 린드크비스트(Sven Lindqvist, 1932- )는 『야만의 역사』(김남섭 옮김, 한겨레신문사, 2003)에서 유럽인이 저지른 인종 대학살의 뿌리를 파헤친다. 『야만의 역사』는 여행기 형식이다. “이것은 이야기이지, 역사 연구에 기여하려고 쓴 글이 아니다. 이것은 사하라 사막을 버스로 여행하면서, 동시에 절멸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컴퓨터로 여행한 한 인간의 이야기다.”

린드크비스트는 사하라에서 가장 메마른 지역인 타데마이트(Tademait)를 종단한다. 이 ‘사막 중의 사막’에는 어떤 식물의 흔적조차 없다. “땅은 열기 때문에 돌멩이에서 뿜어 나오는, 검게 빛나는 사막의 광택으로 덮여 있다.” 그의 여정은 알제리의 엘골레아에서 시작돼 인살라와 타만라세트를 거쳐 니제르의 아를리트, 아가데즈, 진데르까지 이어진다.

린드크비스트에게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있다. “모든 야수들을 절멸하라”가 ?것이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의 원제목은 이 책의 화두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은 린드크비스트의 여정을 이끄는 별자리 구실을 하기도 한다. 사막 여행을 통해 린드크비스트는 “유럽이 4개 대륙의 ‘열등 인종들’을 절멸시킴으로써 히틀러가 유럽에서 600만 유대인들을 절멸시키는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발견한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은 일반적이면서도 특별하다. 지금은 히틀러가 러시아 혁명 이후 1930년대 소련에서 있었던 ‘쿨락(부농)’의 절멸과 스탈린의 숙청을 본뜬 것으로 보진 않는다. 이보다는 “‘열등 인종’은 천성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우량 인종의 진정한 동정심은 그 길을 가는 그들을 도와주는 데 있다는 신념이 히틀러의 어린 시절 동안 인간에 대한 유럽인의 관점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였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나치 유대인 학살의 특이점은 낮은 수준의 과학을 이용해 한꺼번에 몰살한 것이다.

그런 낌새가 전혀 없진 않았어도 이제 보니 미국 출신 탐험가 헨리 스탠리는 몹시 나쁜 놈이다. 아프리카에서 실종된 리빙스턴을 찾아내 일약 스타가 된 스탠리의 그 이후 행보는 목불인견이다. 그런데 영국 사람들은 스탠리를 떠받든다. 우리는 영국을 잘 모른다. 대영제국의 어두운 역사에 대해선 더구나.

“누구도 옴두르만(수단 중부의 도시)에서의 승리를 의문시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 승리로 영국인들이 48명밖에 희생되지 않았던 반면 수단인들은 1만 1,000명이나 살해된 사정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누구도 왜 부상당한 수단인 1만 6,000명 가운데 거의, 혹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는지 묻지 않았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와

린드크비스트는 유럽이 세계의 패권을 손아귀에 넣은 것은, 그들이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니라 싸움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멀리서 적을 죽이는 기술은 오래전부터 유럽인들의 장기였”고 “유럽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무력이었다.” 또 “궁극적으로 그들의 왕국은 그들의 배에 장착된 대포의 위력에 달려 있었다.”

『야만의 역사』보다 두 달 앞서 한국어판이 출간된 『폭격의 역사』(김남섭 옮김, 한겨레신문사, 2003)는 백인우월주의가 낳은 또 다른 학살과 야만의 기록이다. 다음은 이 책에 대한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의 설명이다.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이 책에서 인종주의, ‘유색 인종’을 무가치한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사고방식이야말로 가축 도살을 방불케 하는 서구인의 융단 폭격의 정신적인 기반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야수적인 폭격으로 수만 명의 생명을 잃은 북한 주민의 동포로서,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킨 뒤에도 이라크의 황폐화를 꿈꾸는 미국의 발악적 만행의 동시대인으로서, 우리는 『폭격의 역사』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질 충분한 이유가 있다.”

『폭격의 역사』는 ‘뱀 주사위 놀이’의 말판을 닮은 미로(迷路) 형태의 구성이 이채롭다. 한눈을 팔다간 글의 진행방향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입구는 22개나 되지만 출구는 따로 없는 ‘이 책을 읽는 법’을 살펴보자.

“각 입구는 이야기나 주장으로 시작하는데, 당신은 화살표(⇒)를 따라 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움직임으로써 이야기가 계속되는 섹션의 숫자를 쫓아가게 된다. 입구 1로부터 섹션 166으로 나아가 173에 이를 때까지 섹션을 하나하나 계속 읽어나가면, 섹션 173에서 또 하나의 화살표를 따라 입구 2로 되돌아간다.”

책을 읽다가 길을 잃을 경우, 책 내용의 이정표 구실을 하는 ‘차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린드크비스트는 이 책에서도 문학작품을 언급한다. 여기선 더 많은 작품(주로 SF와 미래소설)을 거론하는데 그것들은 무거운 주제의 긴장감을 완화하며 가독성을 높이는 윤활유로 작용하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양차 대전 사이의 소설들은 종종 어떻게 문명인들이 서로를 폭격하여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는지를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초강력 무기에 관한 소설들은 보통 정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초강력 무기는 평화와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느 때처럼 미래주의 소설은 몇 발짝 앞서 있었다. 윌 젠킨스의 『미합중국의 살해』(1946)에서 대륙간 미사일은 이미 현실이다. 미국은 그 독점을 상실하였고, 7,000만 명의 준비 안 된 미국인들이 핵 기습에서 살해되었다. 전쟁 억지가 실패했을 때, 남겨진 것은 보복이다.”

2차 대전 중 연합군은 독일 드레스덴을 여러 차례 무차별 폭격하여 민간인 10만 명(일설로는 20만 명)의 목숨을 앗는다. “영국의 함부르크 공습은 독일이 영국의 도시들에 가했던 공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약 5만 명이 단 하룻밤 사이에, 즉 1943년 7월 27일 밤에 죽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부녀자와 아이들과 노인들이었다.”

린드크비스트는, 히틀러가 독일 도시에 대한 영국의 폭격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고려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기는 미국과 영국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유대인이 몰살당하는 것보다 유대인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더 두려웠던 까닭이다.

“유럽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나락으로 계속 떨어진 것 같다. 즉 한쪽은 인종 학살보다 이주를 막는 데 더 관심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자국의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중단시키기보다 유대인들을 살해할 수 있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뒤를 이은 미국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주의에 입각한 폭격은 2차 대전 후 더욱 노골화한다. 이제부턴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 유색 인종을 쓸어 없애려 적극적으로 나선다. 한국전에서 미국은 100만 회가 넘는 공습으로 한반도의 북부 지역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베트남에는 미국이 2차 대전에서 투하한 양의 네 배를 웃도는 800만 톤의 폭탄을 쏟아 붓는다. 이 위력은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640개와 맞먹는다.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1961년 여름 그가 중국 베이징 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처음 익힌 말을 실마리로 미국, 자유 언론, 민주주의, 선거, 여론, 의회 같은 것에 품었던 자신의 나이브한 인식을 털어놓는다. 그가 맨 먼저 배워야 했던 중국어 문구는 꽤 까다로웠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익힌 중국어 어구는 이렇다. 美帝國主義是全世界人民的最兇劫的敵人

「“미 제국주의는 전 세계 인민의 가장 사악한 적이다.” 나는 미국 정책에 대한 중국 정부의 왜곡된 이미지에 끊임없이 항의하였다.

“미국은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 민족 자결권을 옹호해왔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베트남에서도 그럴 겁니다.”

“당신은 미국의 자유 언론을 과소평가하고 있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사실은 언제나 조만간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신은 여론을 억누를 수가 없지요.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다시 선거에서 뽑힐 수가 없을 겁니다.”

“의회만이 전쟁을 선포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중국 친구들에게 설명하였다. 당신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10년이 지났는데, 의회가 그 선거권자와 자식들을 아시아의 새로운 전쟁터로 보내 그곳에서 죽게 하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전쟁은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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