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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그대가 울고 있을 때 읽는 책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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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나의 사랑하는 후배가 문자메시지를 한 줄 보냈다. 그 메시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시계를 보았다.

며칠 전에 나의 사랑하는 후배가 문자메시지를 한 줄 보냈다. 그 메시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시계를 보았다. 열 시 반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언니, 매일 새벽 세 시에 내가 우는 것 알고 있었어? 언니가 알아? 아느냐고? 그러고 나서 그녀는 우주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엉엉엉 한없이 울었다.

우리는 5년 전에 처음 만났다. 그 5년 동안 그녀가 내게 보여준 세계는 너무나 다채로운데도 나는 그 순간 그 모든 걸 너무나 생생하게 어제 일처럼 한꺼번에 회상했다. 그녀와 있으면 시간은 서서히 흐르지 않고 빅뱅의 그 순간처럼 한꺼번에 폭발하듯 흐른다. 그녀가 수화기 너머로 우는 동안 5년 동안의 시간이 다 우는 것 같았다.

야구선수 이상훈이 은퇴하고 기타를 들었을 때, 그의 은퇴 이유 “쪽팔려서”가 얼마나 인간적인 말인지 알려준 것도 그녀고, 박지성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달리는 순간의 그의 가슴팍이 얼마나 시골 소년의 순결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려준 것도 그녀며, 우주인이 되려면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함도, 장국영과 이과수 폭포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녀다. 영화 <비포 선셋>에 나왔던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잘생긴 청년에게 하루키의 책을 주문해 사다준 것도 그녀며, 그리니치 천문대의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면 뭐가 보이는지 알려준 것도 그녀다. 우리가 언젠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되면 빅토리아 사막에 별을 보러 가자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내가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 <쥴 앤 짐>의 잔 모로에 대해 말해준 것도 그녀다. 며칠 전엔 그녀는 나의 자연사 박물관이 되어주겠다 약속했다. 영원히 함께 하자는 그녀식의 어법이다. 5년 동안 그녀와 나의 삶은 수면 밑의 비밀 통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나는 1945년 프랑소와 트뤼포와 로베르 라슈네라는 두 친구가 주고받던 편지의 한 문장을 떠올렸다. 아직 열세 살이던 그들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매일 너에게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어. 너도 그렇게 해다오. 나도 세비네하고 너도 세비네하고 우리 함께 세비네하자 .내게 편지해. 내게 편지해!” (세비네 후작부인은 시골로 시집간 딸을 위해 베르사유 궁과 온갖 주위의 사소한 일을 적은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는 부인이 사망한 지 30년 되던 1725년에 책으로 나왔다.)

그날 목련이 핀 밤길을 걸어 돌아온 나는 언제나처럼 나를 이해해주는 침대에 엎드려 트뤼포 전기를 읽었다. 어린아이처럼 울던 그녀를 위해 내가 해주고 싶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므로 적절하고 실천적인 위로를 해줄 수 없었다. 내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꼭) 세상을 재해석해 재편해주는 것뿐이었다.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라는 말로 수많은 영화팬을 영화관으로 끌고 간 트뤼포의 인생에 끌린 이유는 100가지는 족히 되지만 그래도 그날 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기억하는 그의 표현 하나를 그녀에게 바치고 싶어서였다. 그 표현은 바로 ‘새로운 이상한 나라의 현대적 엘리스’였다. 그래서 나는 니나 시몬의 노래를 들으며, 트뤼포의 책을 읽으며 세상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상한 나라의 현대적 앨리스가 새벽 세 시에 잠들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트뤼포는 미혼모의 아이였다. 갓난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결혼한 엄마는 트뤼포 말고는 다른 아이를 낳지 못했고 결국 그를 가정에 받아들이지만 그에게 사랑을 주지는 않았다. 성장기의 트뤼포는 들릴락말락 종이 스치는 소리마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면서 의자에 앉아 몇 시간씩 책을 읽으며 엄마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라던 아이였다. 부모에게 사랑받으려고 부모가 외출한 사이 벽과 천장과 문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거나 낡은 전기 회로를 고치려고 플러그를 꽂고 선을 이어보기도 하는 아이였다.

트뤼포는 어느 날 친구를 발견하는데, 책에 대한 열정과 영화에 대한 관심에서 완전히 일치했던 로베르 라슈네를 ‘친구친구친구’라고 (마치 그녀가 ‘언니’란 단어를 다섯 번씩 내뱉듯이) 부르며 사랑했다. 그 둘 사이의 연대감에 대해서 트뤼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 모두가 미래를 내다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까운 미래였으며 가까이 있어야 할 미래였다.’ (이것도 그렇다. 우리는 만나면 음모를 꾸민다. 음모와 암중모색의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그들 앞의 생이 탄탄대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트뤼포는 젊은 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는다. 나의 눈동자가 땅으로 되돌아올 때 세상은 내게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항과 창조가 늘 함께했던 트뤼포야말로 자기 삶을 파괴적일 정도로 뜨겁게 살아나갔고 수많은 연애 사건(까트린 드뇌브…)과 수많은 필화 사건(고다르와의 싸움을 보라)과 수많은 불후의 명화(<쥴 앤 짐><400번의 구타> 등)를 남겼다. 마르크스는 해석이 아니고 변혁이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이전의 세계를 완전히 뒤엎어버렸지만 트뤼포는 변혁함으로 해석도 바꿔버린 셈이다. 나는 그의 전 인생을 읽으며 줄리안 반즈가 플로베르를 입체적으로 살렸듯 새로운 사전을 만들어 그녀에게 바침으로 그녀를 입체적으로 살려내고 싶었다.

* 상호연대감 - 현실과 맞서는 무기.

* 도덕 - 도덕임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오로지 타인의 도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존재하는 것.

* 명예 - 하루 3편의 영화를 보고 일주일에 세 권의 책을 읽는 것.

* 연민 - 세상의 비난받는 자들 모두와 함께 나누는 감정.

* 부끄러움 - 우리는 손목에 수갑을 차고 샤워장으로 간다. 처음에는 병원을 통과해갈 때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나중에는 나의 부끄러움 자체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매독치료를 받을 무렵.)

* 얼간이들 - 건방지고 불손한 내 시선 뒤에 어깨를 따뜻하게 두드려주기만 해도 금방 눈물을 쏟는 어린 소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 직업 - (5년에 걸쳐 528편의 글을 발표하며 본명과 필명을 섞어 일주일에 평균 두 편을 써가던 시절) 하루 한 편의 영화, 이틀에 한 편의 글, 매일 밤 강심제와 담배와 커피. 생활과 직업의 구분은 없었다.

* 권위 - 저는 자신을 증오하는 독학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합니다. 필요하다면 밤마다 일을 해서라도 저의 영역을 최대한 넓혀서 가급적 빨리 전문가가 되는 것만이 저를 구원할 겁니다. (즉 권위란 지적 우월성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아는 상태에서 오는 것.)

* 카메라 - 브래지어의 섬유소재와 색상을, 마침내 그 안에 젖가슴이 지닌 생명력까지 드러내는 데 적절한 앵글을 잘 아는 숙련된 시선, 여성이 걸어갈 때 어렴풋이 나타나는 작은 팬티의 대각선 무늬와 그 가장자리 선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앵글에 대한 숙련된 시선. (즉,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걸 잡아내는 능력.)

* 파렴치함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함.

* 인생 - 난 그 누구에게도 내게 스무 살 시기가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말을 절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 시기는 불행했다기보다는 매우 무미건조했다. 우리는 희망으로만 살았을 뿐이고 어쩌면 아예 살아가지도 않았다.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라고 묻는 사람에게 우리는 즐겨 대답했다. ‘우리는 살지 않는다’라고.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고, 영화였고, 영화에 대한 토론이었고, 영화에 대한 글쓰기였다.

* 68년도의 대학생 - 나는 대학생들을 좋아하며 그들의 투쟁에 찬동한다. 나는 대학생이 될 행운을 갖지 못했다. 나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질 못했다. 나는 대학생이 될 행운을 갖지 못했다. 14세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던 것이다.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학문의 추격을 받는다. 그 때문에 나의 교양은 도처에 구멍이 나 있으며 이해의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늦다.

* 야생과 문명 - 박해받은 유년기라는 치명적인 상처를 지닌 어른의 모습, 애정 생활에서의 환멸과 직업상의 실패에 대해 끊임없는 죄의식을 지닌 남자의 모습,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고독자의 모습, 야생은 언제나 문명화된 분신에 대해 우월성을 지니고는 트뤼포를 성공의 한가운데서 추방자로 살도록 했고, 명성을 획득했음에도 주변인으로 살도록 몰고 갔다.

* 파트너 - 전천후 잡역부.

* 완성 - 암중모색과 시행착오를 목격해 왔다. 다시 말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았던 것이다.

* 완벽과 성공 - 비천하고 부도덕하고 추잡한 용어.

* 뇌 - (뇌출혈 수술을 마친 후) 스무 해 전, 저의 두 번째 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가 개봉되었을 때 평론가들은 제 머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제 뇌수술을 받았으니 아마도 저는 좀 더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 장례식 추도사 - ‘자신이 꼭 필요한 인간이라고 느끼는 자는 누구라도 더러운 자다(샤르트르의 말)’라는 말이 채택될 뻔했지만 영화 <멋진 인생>을 패러디한 대사가 채택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살을 시도하지만 천사에게 구출되어서 자신이 빠진 자기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인생을 지켜보게 된다. 만일 그가 없었으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까를 보게 되는 것이다.) ‘만일 프랑수아 트뤼포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가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더라면…’ 장례식장은 그 말로 넘쳐났다.

사전을 작성하다 보니 트뤼포 장례식장의 추도사야말로 그날 밤의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위로란 걸 알았다.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네가 내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주로 간다. 왜냐하면 내게 ‘인생, 그것은 단파 라디오였다!’이기 때문에. 다음 회를 기대해 달라. 절찬 상영 중. 우리는 우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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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 트뤼포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저/<한상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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