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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께 깨진 날 읽는 책

너도 부장이 되어봐라. 그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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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자발적인 소외 상태였던 적이 있다. 여름 소나기가 퍼붓던 어느 날부터 그 이듬해 벚꽃이 질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이 집에만 있었다.

대학 시절 자발적인 소외 상태였던 적이 있다. 여름 소나기가 퍼붓던 어느 날부터 그 이듬해 벚꽃이 질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이 집에만 있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오면 집 앞 부대찌개 집에서 소주를 마시거나 낮에도 어둠침침한 레스토랑에서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타면 방배동 카페 골목까지 걸어가 로바다야끼에서 삼치구이를 먹었다.

그 시절의 한 주는 월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에서 출발했다. 내게 목요일은 타임지가 배달되던 날로 기억된다. 목요일 아침엔 새벽부터 긴장해서 타임지를 기다렸다. 언제나 제일 먼저 찾아 읽는 페이지는 에세이였다. 에세이에는 항상 like(‘좋아하다’라는 의미 말고 ‘00처럼’으로 해석될 때의 like 말이다)로 연결되는 문장이 있다는 걸 발견해서였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처럼, 스푸트니크 충격처럼, 에밀졸라와 샤갈처럼, 소련에 진군하는 독일군처럼, 매카시 치하의 찰리 채플린처럼, 우드스탁의 젊은애들처럼...' 이런 문장들을 난 거의 이해하지 못했었다. 영영사전을 옆에다 펴놓았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동어 반복적으로 요약, 정리되는 세계를 잘 믿지 않는다.

‘00처럼’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나는 내 고통이 유일한 고통이 아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세계를 확장하고 갈등을 푸는 나름의 방식을 개발하게 되었다. 갈등을 푸는 내 방식은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역지사지’가 아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내가 바꿔보고 싶은 것은 처지가 아니라 상황이다. 처지를 바꾼다는 것은 그 인격까지도 바꿔볼 수 있을 때만 공정한 것이고 인격을 바꾼다는 것은 어쩐지 내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서 문제를 풀어버리는 것 같아서 싫다. 하지만 ‘00처럼’의 세계에서는 조금은 더 익숙한 방식으로, 그다지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우리 부장님들은 내게 말하곤 한다. “너도 부장이 되어봐라. 그럼 안다.” 그러면 나는 (부장이 된 나를 상상하는 대신) 속으로 말한다. ‘부장님은 꼭 멕시코의 판초 빌라 같군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나는 우국충정은 있으되 조직이 탄탄치 못해 절망한 끝에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반란군 대장에 감정이입 한다. 즉각 탄탄한 조직원이 되고 싶어 한다.)

요즘엔 갈등을 인체에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멋진 문장을 찾아내 실용화하는 중이다.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이 문장은 뉴욕의 떠오르는 별 니콜 크라우스가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몽땅 다 잃고 혼자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 노인이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을 설명한 글이다. 국장님께 혼났을 땐 오른쪽 신장이, 부장님께 혼났을 땐 왼쪽 신장이, 동료 PD와 싸울 땐 작은창자가 고통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분할해 놓으면 온몸이 아프고 부서질 것 같다는 감정의 과장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랑의 역사』 최고의 명문장은 역시 고독에 관한 문장이다. 나 같은 확신범은 갈등이 생기면 분노하거나 절망하기보다도 고독을 느낄 때가 많다. 문제가 생겼을 때 고독해지는 이유는 타인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는, 즉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어울리지 않는 순간에 떠올려서다. 상황의 문제를 인격의 문제로 대체해 버리면 할 수 있는 말은 ‘나를 뭐로 보고?’고 그 질문은 던지는 순간 펑하고 터지는 일만 기다리는 폭탄과도 같다. 나치 학살에서 살아남아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뉴욕으로 왔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열쇠장이가 된 노인은 이런 가짜 고독 말고 제대로 된 고독에 대해 내게 이렇게 말해준다.

“어느 날 저녁인가는 영화를 보러 나갔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유대인 마술사 후디니의 탈출 묘기를 보여주었다. 후디니는 땅속에 묻혀도 탈출할 수 있었다. 쇠사슬로 꽁꽁 묶인 궤에 들어가 물에 빠진 후에도 튀어나왔다. 그는 연습을 거듭하다가 몇 초 만에 빠져나왔다. 그 후 나는 내 일에 더욱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열기 힘든 자물쇠를 집에 가져와서 시간을 재보았고 연습 끝에 결국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잠자리에 누워 더욱 어려운 도전 과제를 떠올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다른 사람의 아파트 열쇠를 딸 수 있다면, 카네기홀의 문을 따고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날 막을 수 있을까? 몇 주 동안 계획했다. 시도해 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새벽에 56번 거리에서 카네기홀 뒷문으로 들어가는 데 103초가 걸렸다. 집에서 같은 열쇠로 연습할 때는 겨우 48초가 걸렸는데, 날이 추워서 손가락이 곱은 것이다.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 스스로 입증해 본 것으로도 충분했다.”

이 아름다운 문장의 끝은 이렇다. “고독할 때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위안이 된다.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있어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 문장을 몇 번 따라 읽으면 누군가 등을 쓸어주는 기분이 된다. 그게 부장님의 손이어서는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정말 멋진 상사가 나오는 글도 있다. 물론 『야간비행』이다. 리비에르는 야간 비행 조종사들을 책임진 사람으로 자기에게나 타인에게나 아주 엄격하고, 명분이 뚜렷한 실수라도 용서하는 법이 없다. 부하들을 사랑하되 그들이 알지 못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통도 기쁨도 함께 따르는 인생이라면 큰 의미가 있는 의연한 삶을 살도록 부하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간비행』의 서문을 써준 앙드레 지드는 리비에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리비에르가 단련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결점인 듯하다’라고. 리비에르 자신은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외롭단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고독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 화내지 않으리라. 나는 잔걸음으로 인파 속을 걸어가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와도 같다. 그 아버지 마음속에는 집안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간직하고 있다. 엄격함으로 직원들을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

상사와의 갈등은 많은 경우 이렇게 정리된다. ‘의도는 좋았는데 방식이….’ 그럼 우리 관계는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의 관계처럼 팽팽하다. 의도도 좋고 방식도 맘에 든다면? 남은 일은 입안의 혀처럼, 눈의 눈동자처럼, 신을 따르는 욥처럼! 의도는 좋았는데 결과가 꽝이라면? 모든 길은 옳았으나 우리가 옳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사처럼! 의도도 나쁘고 결과도 나쁘다면 당분간 광야를 헤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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