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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을 시작하며

나의 일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나의 영혼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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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침대야말로 인생과 사람을 가장 궁금해하는 곳 아닌가? 거기서 겉옷쯤은 벗어던지고 그다음 그다음을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 나의 일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나의 영혼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충만하다.

어느 해 겨울, 나는 방콕에서 코사무이로 가는 방콕항공 비행기를 탔다. 갈색 피부의 타이 스튜어디스의 이국적이면서도 단정한 용모를 흘낏거리기도 무료해서 기내 잡지를 꺼내 읽었다. 타이의 수많은 섬에 흩어져 있는 고급 리조트 광고가 태반이었다. 내 목적지인 코사무이 리조트 광고가 유달리 많았다. 호텔 광고의 사진은 한결같이 세련되고 유혹적이었다. 에메랄드 바다, 태양, 야자수, 비치, 물이 철철 넘쳐흐르는 수영장, 잘 그을린 여자의 몸, 샌들, 슬리퍼, 식탁보, 음식, 와인이 이 각도 저 각도로 생생하게 찍혀 있어서 내가 그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간다는 게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동공이 먼저 활짝 확장하는 사건이 생겼다(태고적부터 뻔뻔한 남자가 미인을 발견하는 그 방식으로 몸의 반응이 먼저, 정신의 각성이 나중이었다.) 한 장의 광고 사진(!) 때문이었다. 그 광고 역시 리조트 광고였다. 나를 놀라게 한 광고 사진은 딱 한 컷, 침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검은 침대와 깨끗하게 정돈된 흰 시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리조트의 이름은? 바로 ‘라이브러리(도서관)’였다. 열대 리조트의 이름이 라이브러리인 것과 열대 리조트 광고가 달랑 침대 하나인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를 자극했다. 우리가 기를 쓰고 바다를 찾아가는 이유를 그 광고가 다 설명해 버린 듯했다.


그 광고를 보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호텔방>이 떠올랐다. <호텔방> 그림 속엔 홀로 있는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는 여행 중인 듯 침대 옆에는 여행 가방이 놓여있다. 그런데 그녀는 여행 가방을 풀지도 않은 채 붉은 속옷만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걸터앉은 그녀가 하는 일은 두툼한 책 한 권을 읽는 것이었다. 책 읽기에 꽤 몰두한 그녀의 방은 어두웠고 가구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고개 숙인 목선만큼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오롯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그림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여행지의 낯선 호텔에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 속의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 버리는 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버릇이니까.

내 직장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내 침실엔 거대하고 납작하고 아주 낮은 다다미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침대는 삼면이 검은색 나무 프레임으로 둘러싸였다. 발치 부분 나무 프레임의 한가운데는 은도금이 되어 있어서 가끔 얼굴을 비춰볼 수도 있다. 헤드 부분엔 푸른 하늘과 불안정한 하얀 구름과 작고 검은 새가 그려진 커튼이 벽화처럼 붙어 있다. 침대의 프레임엔 수많은 책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 나는 마지막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 그 나무 프레임을 채우려고 새가 모이를 집어 나르듯 많은 책을 사 날랐다. 그러므로 내 침대는 내 둥지였던 셈이고 밤마다 나는 나 스스로 나 자신을 키우는 어미 새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옆으로 누워 책을 읽다가 가끔 골반 한쪽이 내려앉을까 자세를 바꾸는 것 말고는 오로지 눈동자만 움직이는 그 시간이(!) 내 내장 지방이 쌓이는 시간이었던 동시에 내가 간신히 인생의 해답을 얻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 이 침대를 들여놓던 날, 잠들 때 잊지 않으려 중얼거렸던 문장은 백석의 문장이었다.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시의 첫 구절을 기억하고 그 다음 날 거울에다 아름다운 나타샤가 나귀를 타는 장면을 분홍 립스틱으로 그려놓았다. 그 다음 날 읽은 책은 『인간 등정의 발자취』였다. 그 책에는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도약하기 직전의 사진이 인간의 고매한 정신의 비약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나온다. 그 책을 읽고 잠든 날 아침, 나는 도약하는 자세를 한 내 사진을 찍어 보았다.(사진은 요샛말이 각이 안 잡혀서 민망했다.)

침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콜레트라는 프랑스 작가가 생각난다. 어떤 이가 그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녀는 평생 자신쟀 독서에 충실했다. 곳곳에서 그리고 삶의 모든 단계에서 그는 방해받지 않을 장소, 오로지 책하고만 있을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 생의 마지막 몇 년간, 질병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녀는 애정에 차서 뗏목이라 불렀던 침대를 스스로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방문객을 맞이했고 80회 생일을 축하했으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의 80회 생일날 이벤트를 미리 정해놓았다. 나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잠옷을 입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거위털 이불을 덮고 가냘픈 손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의 침대 곁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 주의 신간 정보도 빼놓지 않고 물어볼 것이다.

맛집을 추천하는 책도 있고 술집을 추천하는 책, 와인과 커피와 옷과 자동차와 여행지와 박물관, 온갖 것을 추천하는 책이 있고 나도 그 책들 덕에 인생의 풍요를 좀 맛봤다. 그래서 나도 어느 날 오후에 불현듯 생긴 사소한 욕구에 답해주는 책에 대한 글로 보은하려 한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걸려올 단 한 통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추천하며 심신을 안정하라 말해주겠다. 첫사랑 애인이 전화해서 만나자 했다고 난리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마담 보바리』를 손에 쥐여줄 것이며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쥐여줄 것이다. 맹추 같은 남자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눈먼 바보에게는 『노트르담의 꼽추』를 줄 것이다.

나에게 모든 책은 이렇게 읽힌다.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전 세대, 전 지역의 현자가 수만 가지 스토리를 동원해 윙크를 하며 내게 인생의 힌트를 주는 것으로 말이다. 끝없이 응시하다 보면 무의식적 영감이 생기게 마련(!)이라고들 말한다. 끊임없이 책을 읽다 보면 나 역시 인생에 대해 영감을 얻을 것을 믿고 있다(!).

더구나 침대야말로 인생과 사람을 가장 궁금해하는 곳 아닌가? 거기서 겉옷쯤은 벗어던지고 그다음 그다음을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 나의 일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나의 영혼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충만하다. ‘나와 같이 가자’고 이끄는 억센 손을 잡고 봄밤에 담을 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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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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