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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엄마, 나문희

'나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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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문희는 어린애 연기를 소름 끼치게 해낸 것도 모자라서, 그 캐릭터가 제정신을 찾은 이후까지 연기해 냅니다. 그의 신들린 연기가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까지 <내가 사는 이유>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어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일.

첫째로 볼품없는 제 글을 좋게 읽어주신 채널예스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냥 예의 차리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제 글엔 너무 과분한 호사였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채널예스 담당자 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원고가 실린 다음에야 제가 처음에 보냈던 원고가 얼마나 많은 오타와 비문으로 가득 찼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경험이었지만, 한편으론 제 글이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독자 여러분을 만나게 해주고자 담당자 분들께서 얼마나 노력하시는지 알게 된 소중한 계기였습니다.

둘째로, 이번 칼럼대상을 정하기까지 많이 고심하며 느꼈던 겁니다. 처음에 채널예스에서 제게 의뢰했던 칼럼 성격은 최근 시류에 맞는, 화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 기사였지요. 그런 탓에 요즘은 포털 사이트의 연예 뉴스를 체크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 1월은… 참 잔인하지요. 참 많이들 싸우고 헐뜯고 아프고 죽고 또 죽어나가더군요. 당사자들, 혹은 남은 사람들에겐 그 고통과 갈등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온갖 매체가 꿀 만난 벌떼처럼 몰려들었으니까요. 전 여러 말을 덧붙이고 싶진 않네요. 이미 많은 매체에서 분석 기사를 한 무더기씩 생산해냈고, 제가 이 지면에서 달리 덧붙일 말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저 떠난 사람들의 명복을, 남은 사람들의 평안을,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를 바라는 게 고작이겠죠.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게요. 이대로 내버려두면 아마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똥폼’ 잡고 떠들어댈 거니까, 이쯤에서 접어야 모두가 행복한 거랍니다(…).

모퉁이 돌면 손 흔들고 있을 것만 같은, 모두의 엄마 ? 나문희

잠시 다른 이야기로 시작해볼게요.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 기억력은 이제 환갑이 되신 저희 어머니보다도 흐릿합니다. 인용이 틀렸다면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영화 <오아시스>로 문소리가 200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수상소감을 말하는 문소리를 보고 놀란 외국 관객이 제법 됐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 문소리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던 몇몇 외국 관객은 문소리를 진짜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알았던 거죠. 어떤 외국인은 한국인 기자에게 넌지시 ‘저 배우가 그새 저렇게 상태가 호전되었나요?’라고 물었다더군요. 그만큼 <오아시스>에서 문소리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뜻이겠죠? 게다가 <제8요일>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파스칼 뒤켄이나, <사랑해, 말순씨>에서 열연을 펼친 강민휘 같은 장애인 배우도 있잖아요. 평생 문소리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외국인들이 문소리를 장애인 배우로 착각했다고 한들 별로 놀랄 일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전 그 이야기를 듣고 MBC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70년대 마포 달동네를 배경으로 ‘깡패’ 손창민과 ‘작부’ 이영애가 나오는 드라마, 기억하세요?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들이 나온 드라마였지만, 전 10년이 지난 지금 그 드라마의 장면 대부분이 가물가물해요. 노희경 작가 작품 중에서도 유별나게 구하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작품 축에 끼는지라 이제 와서 다시 보려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다시보기 VOD 서비스도 안 되고, 방송국에 직접 문의해서 개인적으로 DVD를 주문 제작해야 하는데 전 그렇게까지 부자는 아니지요. 하지만 이상하게 나문희가 나왔던 장면만큼은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나요. 나문희는 그 드라마에서 충격 때문에 퇴행장애를 겪는 ‘숙자’로 나옵니다. 몸은 노인인데, 정신은 어린아이인 거죠.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의 한 장면(출처 : 이영애 공식 홈페이지)

나문희는 정말 아이처럼 까르르 웃고 떠들고 투정부립니다. 같이 어울려 노는 아역배우와의 앙상블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하지만 진짜 충격은, 작품 막바지가 되어 숙자가 정신을 되찾은 대신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억을 다 잃어버린 후에 찾아왔습니다. 예전의 ‘어린아이’였던 숙자를 좋아했던 꼬마가 와서 숙자 앞에서 떼를 쓰지요. 내 숙자 내놓으라며 엉엉 우는 꼬마에게 영문을 모르는 숙자는 정말 인자한 할머니의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왜 울고 그러니. 응? 할머니가 달래줄까?’ 하고 묻습니다. 아, 그 비극이란! 이 꼬마에게 여태까지 자신이 알던 그 정신 나간 계집애 숙자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버린 거잖아요. 전 나문희가 비장애인이고 베테랑 배우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수상소감을 말하는 문소리를 보고 놀란 외국인 관객처럼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멋지게 속아 넘어간 거죠.

나이 먹은 배우가 퇴행장애로 어린애가 된 사람의 연기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선을 넘어버리면 가짜라는 게 티가 나고, 그렇다고 모자라면 시청자를 설득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나문희는 어린애 연기를 소름 끼치게 해낸 것도 모자라서, 그 캐릭터가 제정신을 찾은 이후까지 연기해 냅니다. 그의 신들린 연기가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까지 <내가 사는 이유>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어요. 1997년은 개인사적으로 행복했다고는 말하지 못할 시기였기에 대부분의 기억을 의식적으로 지워 버리려고 발버둥쳤거든요.

예, 전 나문희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나문희 선생님’이라고 타이핑했다가 ‘나문희’로 돌아갔는지 몰라요. 아마도 이번 글도 객관을 유지하기는 글렀지 싶습니다.

요즘 전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문희를 TV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문형 TV를 설치한 덕분에 이젠 어지간한 드라마는 방송사 다시보기 VOD보다 훨씬 좋은 화질로 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저는 주로 제가 놓친 <거침없이 하이킥>을 챙겨보거나 <무한도전>을 보는 것으로 소일하곤 합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나문희는 참 불쌍하게 나와요. 불 같은 성격의 남편 이순재 밑에서 기 한번 못 펴고 살다가, 아들 둘 다 장성해서 장가도 보내고 이제 좀 편하게 사나 했더니 큰아들 준하는 정리해고 당하고 무위도식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고, 작은아들 민용은 이혼했으니 어린 손자를 대신 좀 돌봐달라고 합니다. 손자 준이를 둘러업고 집안일을 하고 있노라면 무서운 며느리 해미가 와서 세탁기는 그렇게 사용하는 게 아니라고 속을 박박 긁어놓고 가지요. 마음 털어놓고 이야기할 친구 개성댁은 교도소에 갇혔고요. 나문희는 그저 견딥니다. 가끔 해미가 없을 때 ‘그 싹퉁바가지’ 흉을 보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마음에 안 드는 큰며느리가 고분고분해지는 것도 아니고, 큰아들이 다시 직장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현실의 고뇌는 그냥 그대로 있고, 실권을 잃은, 아니 사실 실권을 누려본 적도 없는 나문희는 아마 그렇게 투덜대면서 늙어갈 겁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나문희(출처 : 거침없이 하이킥 공식 홈페이지)

이렇게 쓰면 <거침없이 하이킥>이 더할 나위 없는 비극처럼 느껴지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는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사람이에요. 극 초반에 보여줬던 놀라운 식탐이 그 증거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먹어야 사니까요. 그래야 다시 기운을 차리고 주책 심한 남편과 티격태격하며 손자를 돌보죠. 옛말에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수저는 위로 올라간다’라고 했던가요.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나문희는 아내와 집 두 가지를 동시에 잃은 민용을 거둬서 밥을 먹이고, 간만에 직장을 잡았다가 너무 어이없게 다시 해고당하여 상심해 우는 준하에게 그저 밥 먹자며 다독입니다. 준하의 방귀 냄새가 이상하자 나문희가 제일 먼저 단속하는 것은 준하의 입에 들어가는 끼니였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다 그런 거 아니냐고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수십 년 전 ‘순재 도련님’과 ‘식모’ 사이였던 시절에조차, 나문희는 이순재가 놀래 주려고 들고 온 뱀을 잡아 몰래 구워 먹습니다. 군불 앞에서 헤실헤실 웃으면서요.

나문희가 우리에게 밥 먹으라며 상을 권하던 또 다른 풍경을 볼까요? <굿바이 솔로>에서 나문희가 분한 캐릭터 미영 할머니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다가 결국 남들이 벌이는 말의 잔치에서 빠져나오?로 결심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귀를 닫고 입을 닫은 채, 조용히 밥을 지어 사람들에게 먹이고 동네 아이들을 예뻐하며 여생을 보내려 하지요. 상대의 얼굴을 늘 주의 깊게 바라보고, 마음 하나하나 숨김없이 얼굴 위에 꽃처럼 피워내는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조금만 예쁜 걸 봐도 까르르 웃고, 상대가 슬퍼하고 눈물 흘리면 같이 울면서 쓰다듬어주는 미영 할머니는, 주인공들에게 늘 밥 많이 먹으라고 당부합니다. 모쪼록 밥 많이 먹고 기운 내라고. 서로 사랑하면서도 끝없이 오해한 까닭에 상처입고 슬퍼하는 젊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밥 먹어’라고 적어 보여주지요.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거침없이 하이킥>의 문희와 <굿바이 솔로>의 미영 할머니를 섞어놓은 듯한 캐릭터, 벌교에서 국밥을 말아 파는 할머니 김점심(<열혈남아>)에 이르면 그 ‘밥’은 이제 사랑하는 사람만을 상대로 떠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벌교에 내려온 재문(설경구)의 정체에 대해 얼추 눈치 채고 있으면서도, 김점심 여사는 재문을 어떻게든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어르고 달래며 밥을 먹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포일링이 되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재문은 기어코 김점심 여사를 찾아가 밥 달라고 말합니다. 마치 엄마한테 말하는 것처럼 아무 거리낌도 없이 빨리 밥 달라고 말이죠. 재문을 흔들며 ‘어여 밥 먹어’ 하고 말하는 김점심 여사도 아마 재문을 아들처럼 생각했을 겁니다.

참 특이하죠? 나문희는 2006년 한 해 동안 밥으로 정말 여러 사람을 먹이고 달래고 어루만졌습니다. 이쯤 되면 나문희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온 캐릭터에게 ‘밥’은 그저 끼니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밥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위로고, 길 잃은 사람을 위해 불을 밝히고 선 등대와도 같아요. 밥을 차려준다는 것, 밥을 먹으라고 말하는 것은 애끓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밥 하나만으로도 사랑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엄마’라고 부르죠. (물론 이 이야기는 엄마만 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한 엄마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지요. 오독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문희는 자식들에게 밥을 먹였고, 젊고 서로 사랑하던 아이들에게 밥을 먹였고 심지어는 자식을 죽이러 온 사내에게까지 밥을 먹였습니다. 그러면서 매 순간 조금씩 모두에게 엄마가 되었습니다.


영화 <열혈남아>에서


영화 <열혈남아>에서

글의 말미고 하니, 왜 ‘화제의 중심’에 선 사람을 다루는 이 칼럼에서 새삼스레 나문희를 다뤘는지 말씀드릴게요. 이 글을 쓰려고 전 <굿바이 솔로>를 다시 봤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글을 쓰려고 <굿바이 솔로>를 다시 본 게 아니라, 그냥 미영 할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올 1월은 저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 많았는데, ‘화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너무 우울한 나머지 밥숟갈도 뜨고 싶지 않더군요. 그래서 불현듯 나문희가, 미영 할머니가 그리워진 겁니다. 힘들고 지쳐서 위로가 필요한 모든 분께, 미영 할머니를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배시시 수줍게 웃으며 삐뚤빼뚤한 글씨로 ‘어여 밥 먹어’ 하고 재촉하실 거에요. 어서 밥 먹고 기운 내라고요. 식사 맛나게 하시길. : )


p.s.
차기작인 김상진 감독의 신작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에서 나문희가 보여줄 모습은 앞에서 말했던 것과는 새삼 다를 겁니다. 나문희는 엄마가 납치되어도 몸값을 줄 생각이 없는 괘씸한 자식들에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몸값을 500억으로 뻥튀기해서 자식들에게 뜯어내려는 전설적인 해장국집 주인 권순분 여사 역을 맡았어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만, 설령 자식들을 된통 골려 먹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비정한 엄마로 나온다 해도 사뭇 유쾌할 거 같습니다. 물론 저야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느냐와는 상관없이 이미 설득당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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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땡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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