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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하고 처량한 중년 아저씨, 영웅이 되다 『제브라맨』

영웅이 꼭 멋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너무 완벽하면 오히려 거리감이 생기기도 한다. 스파이더맨이 인기를 끈 이유 하나는 가면을 벗은 파커가 실제 젊은이들의 모습과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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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꼭 멋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너무 완벽하면 오히려 거리감이 생기기도 한다. 스파이더맨이 인기를 끈 이유 하나는 가면을 벗은 파커가 실제 젊은이들의 모습과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집도 가난하고 공부도 그저 그렇고 힘센 애들에게 괴롭힘 당하기도 하는, 과학과 사진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 스파이더맨으로 변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본심을 말하지 못하고 늘 망설이기만 한다. 불안한 파커에게 만화의 주 독자인 청소년들은 동질감을 느꼈다. 소심하고 나약한 자신에게 스파이더맨 같은 슈퍼 파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으로 스파이더맨을 응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브라맨은 어떨까. 쿠도 칸쿠로가 쓰고 야마다 레이지가 그린 『제브라맨』의 주인공 이시가와 신이치는 42살의 초등학교 교사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이시가와는 거의 무능력자에 가깝다. 바람난 부인, 원조교제에 빠진 딸, 이지메를 당하는 아들은 이시가와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하고 말을 걸면 ‘죽어버려’란 대답만 돌아온다. 학교에서는 이시가와가 교단에서 떠들건 말건 아이들은 철저히 무시한다. 그런 가족과 학생들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시가와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30년 전 방영되었던 특촬물 <제브라맨>에 빠져드는 것이 유일한 취미다. 인터넷에서 <제브라맨>의 정보를 구하고 의상을 만들어 직접 입어본다. 이시카와는 자신의 말처럼 코스프레 변태 중년 아저씨일 뿐이다. 언제나 ‘괜찮아, 더 심한 집도 있어. 나는 행복해’라고 자위할 뿐인 이시카와는 한심하고 처량한 중년 아저씨다.

어느 날, 제브라맨의 의상을 모두 갖춰 입은 이시카와는 기쁨에 겨워 모험을 한다. 의상을 입고 거리에 나가고 싶은 기분에 취해 집 앞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빼오려 한 것이다. 하지만 딸을 만난 이시가와는 놀라 달아나다가 <제브라맨>에 등장한 악당 ‘집게 잭’이 여고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헛것이 아닌가 의심하던 이시가와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제브라맨> 2화에 나왔던 장면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경하던 특촬물의 세계가 이시가와의 현실과 겹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딸이, 아내가, 아들이 차례로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사건은 모두 <제브라맨>의 에피소드와 연결되어 있다. 대체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시가와가 사는 도시에 1976년 수수께끼의 발광체가 떨어졌고 1978년 이 도시에서 촬영한 <제브라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단 7화만으로 종영된 <제브라맨>은 지금 현실 속에서 되풀이된다.

『제브라맨』의 원작은 영화다. V시네마의 제왕으로 불리는 배우 아이카와 쇼의 100번째 출연작인 <제브라맨>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끄는 쿠도 칸쿠로가 시나리오를 쓰고 기묘한 영화를 탁월하게 만들어내는 거장 미이케 다카시가 연출을 한 괴작이다. 쿠도 칸쿠로는 드라마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키사라즈 캣츠 아이> 등의 각본을 쓰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코믹하면서도 의미심장하고, 파격적이면서도 세련된 쿠도 칸쿠로의 작품은 일본 젊은 세대의 새로운 바이블이 되었다. 쿠도 칸쿠로는 <한밤중의 야지 기타>로 감독 데뷔를 하기도 했다. 만화 『제브라맨』은 쿠도 칸쿠로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제브라맨>을 바탕으로 야마다 레이지가 재구성한 작품이다. 기본 설정은 같고 기본적인 스토리도 거의 비슷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만화가 더 복잡해진다.

만화건 영화건 기본적인 테마는 같다. 이시가와는 소심하고 나약한 중년의 남자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로 도망가서는 그저 안전하다고 되뇔 뿐이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머리를 모래 속에 묻어버리고 마는 타조처럼.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동경하는 제브라맨이 되어 버린 이시가와는 생각한다. 아니, 싸우는 동안에 알게 된다. 그가 특촬물에서 보았던, 영화나 만화에서 보았던 히어로들이 왜 그렇게 분노하면서 싸우는지를.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슬퍼도 싸워야만 하는 게 히어로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단지 내가 눈길을 피해왔을 뿐, 사실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된 것일지도 몰라’라고. ‘네 인생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냐?’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피해왔음을.

얼룩말의 보호색은 밀림에서 모습을 감추는 데 효과적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얼룩말에게는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다. 제브라맨 역시 어떤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배트맨은 첨단의 기술을 이용하여 도움을 받지만, 제브라맨은 오로지 ‘스스로 단련시킨 신체만을 사용해 싸’운다. 이미 가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중요한 무언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추악하고 자기밖에 사랑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 어른들은 그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결국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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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브라맨 1

Yamada Reiji 글/Kudou Kankurou 그림3,150원(1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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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야지,기타SE

<나가세 토모야>,<나카무라 시치노수케>,<츠마부키 사토시>8,000원(1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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