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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마지막 수업

우리 집 아이들은 ‘중고 피아노’가 무슨 최고급 피아노나 되는 줄로 착각한다. 피아노 사달라고 하도 졸라대기에 “나중에 ‘중고’라도 한 대 사주마” 했던 게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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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아이들은 ‘중고 피아노’가 무슨 최고급 피아노나 되는 줄로 착각한다. 피아노 사달라고 하도 졸라대기에 “나중에 ‘중고’라도 한 대 사주마” 했던 게 화근이었다. 중고 피아노를 입에 달고 다니던 큰 아이는 집에 놀러온 지 친구에게 자랑까지 늘어놓는다.

“우리 아빠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중고 피아노’ 사준다고 했거든~ 부럽지?”

며칠 전엔 아내가 광고전단지를 들고 오더니 디지털 피아노가 중고 피아노보다 훨씬 싸다며 그거라도 사줘야 할 것 같단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된 건데, 문제는 아이들이 아직까지도 ‘중고 피아노’만 고집하고 있다는 거다. 중고 피아노와 디지털 피아노의 (가격)차이를 설명해봐야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고, 그렇다고 새삼 아빠의 무능과 가난을 고백해봐야 소용도 없을 테고, 참나.

결국 결정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 출판사 사람을 만났다. 출판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두어 달 후 원고 800매를 넘기기로 했다. 잘 되면 딸아이 피아노라도 사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역시 걱정은 그때까지 아이들 성화를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것이다.

광화문성당 세미나실을 임시 강의실로 쓰던 성프란시스대학이 드디어 다시서기지원센터 내에 전용 강의실을 갖게 되었다.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제 집을 갖게 된 셈인데, 새로 옮긴 강의실은 무엇보다 사용시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게 좋고, 강의 후 식사 또한 가까운 식당에서 대놓고 먹을 수 있어 금상첨화다.

지난주 1기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지원센터 사무실에서 한 선생님을 만났다. 강의 초창기 이곳(채널예스)을 통해 그가 쓴 공지영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감상문 일부를 소개했던 주인공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1기를 마치지 못했던 선생님은 2기에 재입학해 열심히 공부해 보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시간에 맞춰 지하 강의실로 내려갔다. 예의 선생님들은 강의준비를 마치고 차분하게 앉아 계셨다. 회장 선생님의 "차렷, 경례" 구령에 맞춰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겠지만, 어제는 2학기의 마무리이자 1기의 마지막 수업인 만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먼저 지난주 있었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 선생의 특강 얘기부터 나눴다. 대부분 의미 있는 강의였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시 한 번 ‘똘레랑스’의 의미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이 질문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교수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염치불구하고 부탁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졸업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그간 센터에서 생활하던 분들이 졸업과 동시에 잠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당장 갈 곳도 없는데. 어렵기는 센터 밖에서 생활하는 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강의 듣는 동안은 자활근로비가 나왔는데, 졸업하면 그것마저 끊길 테니 당장 방세를 낼 수 없고, 그러면 다시 거리노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고, 더구나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노동일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제발 센터 측에 얘기해서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만이라도 숙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선생님들에게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의 졸업이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자존감을 회복했다거나 자활의지를 갖게 되었다는 등의 관념적 성취는 차치하고, 우선 생활의 변화를 걱정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거기에 일체의 관념적 포만감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다만 그간 잠시 걱정을 덜었던 잠자리와 식사문제를 다시 맨바닥에서부터 고민해야 하는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대학은 선생님들에게 가난하지만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 사회 어디에도 당당한 빈자를 배려하는 곳은 없다. 어쩌면 대학은 기왕의 허기에 정신적 허기까지 얹어주었는지 모른다.

결국 마지막 수업은 그런저런 고민과 걱정과 우려와 안룅까움과 아쉬움과 한숨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애초 준비한 계획한 수업은 각 분야별 읽을 만한 책과 읽어야만 할 책들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선생님들이 요구한 것은, 그리고 내가 군말 없이 동의한 것은 ‘읽을 만한’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두 시간 동안 선생님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지만 뚜렷한 방안이 나오지는 않았다. 요는 방을 구할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고작 함께 노력해보자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몇몇 휴대폰을 가진 선생님들을 조장으로 삼아 비상연락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내 연락처를 숙지했는지 거듭 확인했고, 이번 달 안으로 다시 논의할 기회를 갖기로 했다.

문득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끈이다. 관계의 끈, 관심의 끈, 인연의 끈, 신뢰의 끈….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여 이런저런 실망감에 상처를 입고 다시 이 사회의 어두운 곳 어딘가로 꺼져버리는 선생님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행한 일이 생겨서는 절대 안 된다. 비록 능력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선생님들에게 희망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괴롭고 외롭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라도 버팀목이 돼주어야 한다.’

강의실을 나올 무렵, 왕년에 잘나가던 트럼펫 연주자였던 회장 선생님이 즉석연주를 해주셨다. 어색하게 서서 트럼펫 연주를 들으며 순간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애써 닦아내지 않았다. 트럼펫 연주에 맞춰 나는 서서히 새로운 인생의 장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 새로운 인생의 장에는 성프란시스대학 1기 선생님들의 밝은 웃음이 들어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못 추는 춤을 신나게 추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살기가 느껴졌다.

그날도 딸아이들은 피아노 얘기를 꺼냈다. 좀 철이 들었다는 큰 아이가 대폭 양보한다는 표정으로 디지털 피아노도 좋으니까, 빨리 사주기나 하라는 아량을 내보였다. 그러나 아빠의 대답은 여전히 유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엔 피아노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 아직 맡은 수업을 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프란시스 대학 1기의 모든 학사 일정이 끝나고, 졸업식을 하고, 결국 선생님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해도, 나의 마지막 수업은 여전히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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