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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vs 종교’에서 ‘과학 & 종교’로

무리인 줄 알면서도 감히 어려운 주제의 칼럼을 써보기로 한 것은 지난해부터 이런저런 계기로 ‘과학과 종교’ 또는 ‘종교와 과학’의 상보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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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황당할 때가 있다. 책 내용이 어려울 것 같아 우선 리뷰나 소개 글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그것들조차 이해하기 힘들 때, 그럴 땐 그저 망연자실하게 된다. 더러는 그런 서평을 쓴 사람이 원망스럽다. ‘이 사람, 대체 이 서평을 쓴 이유가 뭘까?’

어려운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쓸 때는 일단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게 중요하다. 난해한 전문용어들은 되도록 쉬운 일상어로 바꿔주거나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난독의 우려가 있는 복잡한 문장이나 논리들은 예를 들거나 비유적으로 풀어주고….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 다루려고 하는 ‘과학과 종교’라는 주제의 무게에 눌려 긍긍하다 지레 겁이 나 스스로를 독려하는 말로 서두를 대신하게 되었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감히 어려운 주제의 칼럼을 써보기로 한 것은 지난해부터 이런저런 계기로 ‘과학과 종교’ 또는 ‘종교와 과학’의 상보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나는 종교를 불편하게 여겨왔다. 그 이전에도 그다지 탐탁하게 여겼던 건 아니지만, 특히 사회과학 주변서를 접했던 대학시절, 종교에 대한 나의 편견과 오해는 극에 달했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던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책으로 읽은 건 분명히 아니고)을 습관적으로 떠벌리고 다녔을 정도였다.(물론 지금은 ‘하워드 진’의 친절한 해설 덕분에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지만….)

최근 종교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물론 거기엔 이유가 있다. 우선 황우석 사건을 목도하면서 과학의 순수성에 대한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둘째, 성프란시스대학(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서 만난 종교인(성공회 신부님)의 헌신적인 삶의 자세를 보면서 종교의 순기능을 생각하게 되었다. 셋째, 작년부터 꾸준히 읽고 있는 일련의 책들이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중 오늘 쓰고자 하는 칼럼은 종교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변화시킨 세 번째 이유, 즉 ‘종교와 과학(혹은 철학)의 상보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몇 권의 책에 대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문장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보잘것없는 천박한 지식은 인간의 정신을 무신론으로 기울게 하지만 지식을 쌓아가다 보면 정신은 다시 종교로 되돌아온다.”(프란시스 베이컨의 『학문의 진보』에서 재인용)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책세상문고·우리시대022/ 이하 『철학적 반성』)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섬뜩했다. 충격이었다. 무려 40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이 나를 향해 이토록 무섭고도 적나라하게 충고할 수 있다니.

저자 이태하는 『철학적 반성』에서 우선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한다. “종교란 철학에 의해 부정되고 계몽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종교란 하나의 현실이며, 현실을 부정하는 철학은 말장난에 불과한 지적 유희로 흐를 수밖에 없다. 종교가 구체적인 삶의 양식이라면 철학은 삶의 양식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밝히는 반성적이며 비판적인 작업이 되어야 한다. 철학은 이러한 반성적이며 비판적 활동을 통해 종교의 정체성을 밝힘으로써 종교를 더 종교답게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들어가는 말’ 중에서)

이어 저자는 ‘과학과 종교의 상보성’에 대해서도 개념정리를 해준다. “과학과 종교가 경쟁적인 관계에 있지 않고 서로 구별되는 영역에서 기능한다면 동일한 대상에 관한 상이한 설명 체계라는 점에서 그들 간의 관계는 보완적(supplementarity)이라기보다는 상보적(complementarity)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경험적인 현상들을 정확하고 엄밀하게 설명함으로써 사건들의 원인을 추적하지만, 신학은 사건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적 세계에 관한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의 활용에 관한 지혜를 얻으려 한다면 과학적인 설명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상보적 관계에 있는 종교적인 설명이 필요하다.”(『철학적 반성』 35쪽)

그렇기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말 문제는 결코 아니다. 우선 『철학적 반성』을 통해서는 과학과 종교가 ‘상보적 관계’에 대해서만 이해한 것으로 치자. 이제 본격적으로 둘 간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본격 담론들을 살펴볼 차례다.

작년 우리 출판계를 빛낸 몇 권의 인문학 서적들이 있다.(나는 그 책들이 마냥 자랑스럽다.) 번역본 중에서도 의미 있는 것이 더러 있지만 아무래도 관심이 쏠리는 건 국내 저자들이 쓴 역작들이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독법』(돌베개), 리영희 선생의 『대화』(한길사), 도정일·최재천 교수의 『대담』(휴머니스트), 그리고 과학인 김용준의 연구노트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돌베개)가 그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오늘 칼럼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책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이다.

책의 부제 ‘과학인 김용준의 연구노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김용준 교수의 40여 년 간의 학문적 열정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역작 중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무게감에서도, 주제를 파고드는 학문적 열정과 내용의 엄정성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책은,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총체적으로 아우른 뒤 다시 신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숱한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그들의 기념비적 저작들에 대한 김용준의 알찬 해설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분과학문 체계의 한계를 벗어나 모든 학문의 역사를 통틀어 주요한 통찰을 제공한 학자들과 저서들을 폭넓게 다룸으로써, 저자는 종교와 과학의 문제가 전문가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화두임을 암시한다.

특히 책에서 저자는 근대 이후의 과학과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부닥친 한계와 딜레마를 넘어선 학문적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는 해석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것은 곧 과학과 종교의 지평융합(가다머가 주창한 ‘해석학’ 용어, 언어의 본질인 ‘자기상실성’으로도 설명되고, 주체와 객체가 뒤틀린다는 의미에선 양자역학과도 닿아있는 개념)에 대한 저자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종교와 과학 혹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지평융합의 출발은 과학계의 새로운 철학적 인식, 즉 지식 통합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시도를 주창한 과학자들은 토머스 쿤을 위시한 스티브 툴민(Stephen Toulmin),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메리 헤세, 리처드 번스타인 등이 있으며, 이후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그에 가세한다.

그 중에서도 근대 이후의 과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토머스 쿤이었다. 그의 과학에 대한 발상전환의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용준 교수의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보다 비교적 쉽게 읽히는 김호경의 『종교, 과학에 말을 걸다』(책세상문고·우리시대096)을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쿤은 과학적 진리를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쿤 스스로 내린 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과학적 진리가 절대적이었던 시절은 없다고 단언한다. 다만 한 시대에 일군의 사람들이 공유한 공통된 소신이 그 시대의 진리 역할을 자임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 수용된 모형 또는 유형을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패러다임의 의미는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특정 공동체의 구성들이 공유쿇고 있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의 총체’를 이른다. (『종교, 과학에 말을 걸다』 117~118쪽)

“과학이란 하나의 패러다임에 근거한 연구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과학의 유용성은 불변하는 진리성이 아니라 각 시대에 대해 가졌던 역사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은 각 시대가 세계를 이해한 방법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거울인 셈이다.”(118쪽)

참고로,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의 개념과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과학혁명의 사상가, 토머스 쿤』(사이언스북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앞선 논의들을 소개하자면, 쿤에 앞서 20세기 과학혁명의 전조를 보여준 사람들은 뉴턴의 물리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뛰어넘는 과학 이론인 양자역학을 상상했던(단지 상상한 것만으로도 위대하다) 닐스 보어와 그의 상상을 현실의 불확정성 원리로 이끌어낸 제자 하이젠베르크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종래 뉴턴 패러다임의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완충하였다는데 학문적 의의가 있다”(『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51쪽)고 김용준은 설명하고 있으며, 『종교, 과학에 말을 걸다』에서 김호경은 덧붙여, 즉 “양자역학은 불확정성 원리를 탄생시킴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었다. 이것은 곧 물질이나 사물에 대해 절대적 설명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통계적 혹은 확률적으로만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고 전제한 뒤, 그것으로부터 전혀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비과학적 용어인 “‘우연’이라는 불확정성의 단어가 첨가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 매우 중요한데, 그에 대한 김호경의 설명은 명쾌하다. “객관적인 어떤 것에 ‘우연’이 첨가됨으로써 근대의 절대성이 무너지고, 불확정성을 필두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곧 토머스 쿤이 이야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탄생인 것이다.”

쿤의 작은 혁명, 즉 과학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전복한 과학철학에, 해석학적 사유를 접목시킨 사람이 바로 해석학의 거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다.

“가다머의 관심은 이미 일정한 규칙으로 설정된 방법에 따라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진리의 총체에 있다. 따라서 그는 자연과학의 방법이 제아무리 엄격하고 철저하다 해도 그것으로는 결코 전체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총체적인 진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과학이란 결코 완성을 기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란 항상 뜻하지 않은 사건을 내포하기 때문이다.”(『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72~73쪽)

가다머가 주저 「진리와 방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전통적인 역사적 사유에도 분명히 진리의 영역이 있지만 예술 분야에도 자연과학 못지않은 지식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학만이 오로지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그의 저서의 중심 내용인데, 문제는 바로 자연과학이 진리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는 데 있다.(‘토머스 쿤’ 등이 과학의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써….)

“눈에 비치는 현실의 세계와 이성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지식의 세계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대상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의 최후 심판자는 논리적 무모순성이 아니라 역사적인 삶 자체다. 이것이 바로 「진리와 방법」을 통해 가다머가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 그의 철학적 해석학의 골자이다.”

김용준의 학문적 열정은 과학철학의 패러다임을 설명하는 해석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진화론과 우주론을 거쳐 ‘마음과 뇌’에 대한 치열한 연구, 그리고 그의 관심이 종국에 다다른 곳은 ‘진화신학’이다. 마침내 그는 결론한다. 과학이 절대성의 갑옷을 스스로 벗어던졌던 것처럼 신 역시 스스로 우리 안에 깃들어 세상사의 모든 일을 함께 도모하며 자연과 인간사의 주체로 자리하고 있다고….

“신은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개방성에 동참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우주적인 위계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의 유일한 역사를 포함한 모든 시대에 특수한 의미를 가져오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개방성이 바로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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