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파란 시간을 아시나요? 그림책 작가 안 에르보

“파란 시간을 아세요?”라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질문한 저를 안쓰럽거나 불쾌하다는 듯 쳐다볼 겁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파란 시간을 아세요?

파란 시간을 아세요?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기엔 조금 어두운 시간.
읽던 책을 그대로 펼쳐 놓은 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시간.

땅거미 질 무렵의 어슴푸레한 시간.
그림자는 빛나고 땅은 어둡고, 하늘은 아직 밝은 시간,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드는 시간.
세상 모든 것들이 조용히 밤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
하늘 끝자락이 붉어지고, 태양은 멀리 어딘가로 자러 가는 시간.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돌아갈 때는 조금 달라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간.

그런 파란 시간을 정말 아세요?


“파란 시간을 아세요?”라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질문한 저를 안쓰럽거나 불쾌하다는 듯 쳐다볼 겁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기운이 빠지고 차가운 달빛의 얼굴을 하고 있는 싸늘한 밤이 내려오기 직전의 잠시의 시간, 바로 이 시간을 두고 안 에르보는 ‘파란 시간’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파란 시간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라고 질문하면, 여러분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땅거미 질 무렵의 시간이 파란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시겠지요.

파란 시간은 태양 왕과 밤의 여왕 모두에게 내쫓김을 당한 후 갈 곳이 없어 여기저기를 떠돌다 그 둘이 활동하는 낮과 밤 사이로 끼어들어가서 짧고 불완전한 시간을 지내다, 나머지 시간에는 낡은 가로등 기둥 속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파르스름한 저녁 무렵, 마법의 새들이 놀라운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아름다운 공주가 해 뜨는 저 먼 곳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파란 시간’은 즉시 길을 떠나 마침내 아름다운 장미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새벽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됐느냐고요? ‘파란 시간’은 밤마다 까만 새가 되어 먼 곳에 있는 새벽공주를 찾아간답니다. 그래서 파란 시간은 태양 왕이 나타나기 직전의 새벽 잠깐과 밤의 여왕이 내려오기 전 잠깐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라네요.


그런데 뚜렷한 개성을 가진 태양 왕과 밤의 여왕의 캐릭터에 비해 마른 체구에 장대발을 타고 초라한 골무 모자를 쓰고 있는 파란 시간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걷기만 하는 캐릭터입니다. 몇몇 그림책 평론가들에 의하면, 위용을 갖춘 태양은 아버지를, 밤은 어머니를 상징하고, 이에 비해 낮과 밤 사이에 끼어 제자리를 잡지 못해 떠도는 모습의 파란 시간은 어린이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즉, 파란 시간의 모습은 어른들이 꾸며놓은 세상 속에서 그 어느 곳에도 뚜렷하게 속하지 못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어린이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는군요. 조금은 과장된 평이라고 이 마녀는 생각하지만, 분명한 것은 『파란 시간을 아세요?』의 작가 안 에르보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란 추상적 개념을 시각적이며 시적으로 표현한 위대한 그림책 작가라는 것이지요.

일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꺼내 색을 입히는 작가 안 에르보Anne Herbauts

1999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달님은 밤에 무얼 할까요?』로 볼로냐 어린이 그림책 부문 예술상을 받고 『파란 시간을 아세요?』, 『작은 걱정』 등으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제법 친숙하고 유명한 안 에르보는 뜻밖에도 아직 젊습니다. 1976년에 태어났으니 청춘의 작가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안 에르보는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세세한 것들을 포착해내는 사려 깊은 관찰력으로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비의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끌어내어 아름다운 그림책에 담아낼 줄 아는 노련한 작가입니다. 특히 ‘시간’과 같은 무형의 어려운 개념을 적절한 은유로 깔끔하게 표현하는 능력 있는 작가이지요.

안 에르보는 1976년 벨기에 위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왕립 브뤼셀 미술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를 전공했고, 1997년에 첫 번째 단행본 『보아 뱀』을 출간했습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에두아르’와 ‘아르망’은 이후 시리즈물로 연결되는데, 우수를 담은 듯한, 사색에 잠긴 듯한 키다리 인물과 귀여운 상상력이 가미된 괴물은 한눈에 작가 안 에르보를 알아보게 해줍니다. 길고 가느다란 선, 작은 머리, 마르고 긴 팔다리, 커다란 몸통 등은 작가인 그녀를 대신해 주는 캐릭터의 특징입니다. 그의 그림책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시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제 작업에 들어가면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하다고 하는군요.

그는 자신이 끌어낸 일상 속의 개념들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크레용과 연필, 수채 물감과 콜라주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넘나듭니다. 『빨간 모자 아저씨의 파란 집』이나 『엄마는 작아질 거야』처럼 부드러운 선에 몽환적인 색조가 어우러진 작업, 『파란 시간을 아세요?』에서의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것 또한 그의 화풍입니다. 한편 그는 철학적인 관념도 딱딱하게 전달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어린이들의 호흡에 맞게 문장을 다듬기 위해 다양한 연수와 현장 실습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노력파 작가라고도 합니다. 그런 꾸준한 노력에 힘입어 지금까지 안 에르보는 늘 깨어있는 호기심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책을 창작해 왔습니다. 이미 국내에 번역된 여섯 작품 이외에도 국내에는 미처 소개되지 않았지만, 벨기에 자국 내에서 프랑스어 작품상을 받은 『나의 어린 왕자』, 『가벼운 공주』, 『엄마는 작아질 거야』 등의 다수의 작품이 이 마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군요.


다음은 월간 일러스트(www.illusthouse.com)에 실린 조미선 기자와 작가 안 에르보와의 인터뷰 기사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중고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브뤼셀에 있는 오뤼에 셍 피에르 미술 학원에 다녔는데, 방과 후에는 늘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브뤼셀 미술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를 전공했고 우연히 카스테르만 편집자 눈에 띄어 졸업과 동시에 그림책을 내는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소재를 즐겨 사용하는데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간은 제가 특히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입니다. 저와 시간은 이상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시간이 저를 엄청나게 괴롭히기도 하고, 제가 시간에 대해 기준이 없기도 합니다. 가끔은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초연해지기도 하고요. 저는 이미지와 텍스트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고, 잡을 수 없는 것을 움켜쥐고, 보이지 않는 것에 깊이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시간은 여기에 알맞은 소재이고 오브제인 책 또한 시간의 장소입니다. 책을 읽는 시간, 한 페이지씩 넘어가는 과정, 이미지 속 여행 등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리듬을 거치며 만들어지는데 그 역시 시간의 일부입니다.

글, 그림 작업에 순서가 있다면 어떤 것이 먼저인가요?
글과 그림 모두 제게는 중요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동시에 구상합니다. 떠오르는 문장과 생각을 적는 동시에 이미지도 간단하게 그려 둡니다. 그런 후 점차 이미지와 텍스트 윤곽을 잡아가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름다운 이미지나 훌륭한 텍스트를 남기는 것보다 그 둘을 어울리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한데,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서 지속적으로 영감을 받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머릿속은 벌써 그것을 변형시키기에 바쁩니다. 항상 은유에 대해 생각하는 셈이지요. 과거와 현재를 병렬하거나, 일상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빨간 모자 아저씨의 파란 집』은 그리스를 추천하는 여행 잡지에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하얀 집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담아냈습니다. 느낌과 대상 사이를 보다 철학적으로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빨간 모자 아저씨의 파란 집』이나 『파란 시간을 아세요?』를 보면 선호하시는 색이 분명히 보이는데요.
저는 뜨거운 빨간색과 아득한 느낌을 주는 파란색을 아주 좋아합니다. 대개는 네 가지 색으로 출발해서 혼합된 색을 만들어 내지만, 연한 색을 쓰든 짙은 색을 쓰든, 항상 무언가 색을 통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기법과 타이포는 이야기의 일부이면서도 독립된 요소입니다. 『빨간 모자 아저씨의 파란 집』은 상당히 뜨겁습니다. 저는 건조한 열기를 이미지로서, 재잘거리는 새들을 텍스트로서 담고 싶었습니다. 『파란 시간을 아세요?』에서는 하늘, 색감, 약한 윤곽선, 투명함 등을 통해서 낮과 밤을 해석했습니다. 색은 하늘을 막아서는 안 되고, 종이와 그 위에 떨어지는 빛 사이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업하신 책 중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모든 책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종종 제 그림과 마주하면 비평적 입장이 되곤 하는데, 그림 놀이와 책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있게 다뤄보고 싶습니다. 모든 책은 세계의 일부이고, 겨우 윤곽이 잡힌 아주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시간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단어와 이미지를 더 찾아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란 시간을 아세요?』를 좋아합니다. 그 그림책을 쓰고 그릴 때도 그랬지만 이 책은 저를 진정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평소 생활할 때나, 새로운 책을 구상할 때, 상당히 열을 내는 편이라 할 수 있거든요.

좋아하는 예술가는 누구이지요?
그림책 작가이며 화가인 크베타 파코브스카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고 그의 그림에 매료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볼프 에얼브루흐도 좋아합니다. 영화감독 인 장 뤽 고다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많은 작품으로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영화도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또한 저는 풍부하고 창의적인 아시아 현대 영화도 상당히 좋아합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으신지요?
계속해서 이야기 세계를 탐구할 것입니다. 현재 어린이 책과 만화를 준비 중이고, 앞으로 는 장편 애니메이션이나 데생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 분야를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독자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요?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받으면 항상 감동 받습니다. 비록 제가 한국어를 읽을 수는 없지만, 직선으로 네모반듯한 타이포가 제게 새로운 것을 말해 줍니다. 참고로 저는 각진 것을 좋아합니다. 제 이야기가 세계 반대편 독자에게 읽혀지고 제 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도 있습니다. 제 작품이 보편성을 띠도록 애쓰는 것도 그러한 까닭입니다. 제 그림책들이 한국 독자가 가진 어떤 부분, 추억, 생각, 고통 등을 어루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따금 한국 독자가 벨기에 독자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 작품을 보는 한국 독자는 이야기 속을 함께 여행하는 믿음직스러운 친구입니다.

달님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줄이야!

달님은 낮에 잠을 잔답니다. 그렇다면 달님은 밤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여러분은 쮾고 계시나요? 달님은 긴 낮잠에서 깨어나 우선 먼저 하늘에 별을 잔뜩 그린 후, 숲과 들에 자욱한 안개를 걷고, 도시와 마을의 소음을 몰아낸대요. 그런 후 자장자장 우리 모두가 잠들 수 있도록 덧문과 커튼을 치고, 우리가 잠자는 틈을 타서 좋은 꿈의 씨앗을 뿌려주고, 신비로운 새를 풀어놓습니다. 아침 해님이 좋아하는 이슬도 뿌린 다음, 시간이 남을 때면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예쁜지 미운지 비춰봅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쌔근쌔근 잠이 들어버리지요.

밤에는 달님이 그저 혼자 외롭게 밤하늘을 지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제가 마술 빗자루를 타고 분주히 날아다니는 동안, 달님은 무척이나 바쁘게 지내는군요. 달님의 동그란 얼굴은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심지어 뒤에서 봐도 동글동글하기만 한데, 거기에다 동그란 두 눈은 포근한 웃음까지 짓고 있지요. 그런데 웬 딸기코? 아마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다분히 철학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다 보니, 『달님은 밤에 무얼 할까요?』에서 안 에르보는 최소한 주인공만이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글이가 제격이다 싶었나 봐요. 밤하늘을 올려보며 둥근 달이 떠있을 때면 ‘저 달에 정말로 토끼가 살고 있을까?’ 아니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처럼 ‘예쁜 댕기를 두르고 있는 여동생이 호빵처럼 부푼 동그란 얼굴로 어서 새벽이 다가와 잠시나마 오빠 해님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라고 잠시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안 에르보의 상상처럼 우리가 잠드는 동안 달님이 적막과 고요와 어둠을 만드느라 달님이 바쁘다는 생각은 미처 해본 적이 없답니다.


그래요. 밤이면 밤마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떠있는 평범한 달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제아무리 평범한 소재라 해도, 안 에르보의 상상의 세계 속에서는 독특하게 재창조되네요. 그의 작품은 아이들이 소화하기에는 어렵다는 평이 중론이지만, 게다가 이 그림책 역시 그 중론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림책 속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기에 이 책을 감상하는 어린이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겠죠.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는 달님의 지그시 감긴 눈 아래의 가지런한 눈썹, 밤하늘에 은하수를 가득 띄울 만큼 무수히 많은 별을 노란 크레용으로 그리는 볼이 살짝 달아오른 달님의 얼굴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꼬박꼬박 아저씨의 즐거운 일탈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움직이면서 내는 작은 소리, ‘땡’ 커다란 괘종시계의 분침이 12에 도착하면서 시침을 발길질하며 내는 큰 소리,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우리는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라는 것을 시위하는 시계 소리는 어지간히 귀에 거슬리지요. 그런데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꼬박꼬박 아저씨는 이 시계 소리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는 정해진 일만 하고 살아요. 얼마나 지겨울까요? 아침 8시는 주전자 방, 이 방에서 아저씨는 커피를 마셔요.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오나 봐요. 꼬박꼬박 아저씨가 9시의 방으로 가기 귀찮아질 정도로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어요. 매 시간 정각이 되면 정해져 있는 방으로 꼬박꼬박 아저씨는 이동해야 하는데, 오늘은 주전자 방이 더 아늑하고 커피도 더 맛있게 느껴졌어요. ‘에잇, 모르겠다. 오늘은 좀 꾸물거려야지’라며 늦장을 부리는데, 주전자 방의 시간을 담당하는 요정이 화를 내며 남은 커피를 몽땅 쏟고 나가버렸어요. 이때 어디선가 꼬마 괴물이 불쑥 나타나 “바깥세상을 구경하러 가도 될 시간이에요”라며 아저씨를 꼬드겼어요. 솔직히 꼬박꼬박 시간에 맞춰 생활해야 하는 아저씨는 너무 심심했거든요.

꼬마 괴물을 따라 낯선 숲 어귀까지 다다르니, 작고 아담한 집 한 채가 나왔지요. 이 집에는, (쉬이) 바로 저, 이야기를 만드는 마녀가 살고 있답니다. 이야기 마녀는 곰곰이 생각을 모으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다듬어서 이야기 하나가 완성될 때면 빈 병에 담고 또 하나가 완성되면 또 그 병에 담아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답니다.(혹시 지금도 제가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겠죠?) 꼬박꼬박 아저씨와 꼬마 괴물은 마녀의 빈 뒺 속의 이야기를 살펴보다 진이 빠졌어요. 이야기 마녀의 집에서 나올 때 장난꾸러기 꼬마 괴물은 마녀의 실패를 몰래 훔쳐 나왔는데, 이야기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마법의 실이 감긴 실패를 숲 속 저 멀리 휙 하고 던져버렸어요. 이제 정말 큰일 났네요. 이 사실을 안 마녀가 꼬박꼬박 아저씨와 꼬마 괴물을 가만 놓아둘 리 없으니까요.

이제부터 심심함은 옛날이야기가 되고, 박진감 넘치고 아슬아슬한 모험이 시작되지요. 이야기 마녀를 피해 도망친 나뭇가지에 매달린 방울을 잡아당기자, 스르르 방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눈이 아주 사나운 소리 괴물이 커다란 냄비에서 소리를 튀기고 볶고 다지고 있어요. 소리 괴물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다음 방울을 잡아당기자, 또 다른 모험의 세계로 빠지게 되죠. 결국 둘은 이리 가지도 저리 가지도 못하고 길을 잃고 숲 속에서 헤매다 실패에서 풀어져 뒹구는 실에 걸려 꼬마 괴물이 넘어지게 되요. 이것이 전부냐고요? 오호, 천만에요. 둘은 살구 속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 온갖 사랑 악마들을 만나게 되고 두꺼비도 만나고 새들과도 만나게 되지요. 그러다 어느새 실패를 찾아 실패에 이야기 실을 감는 마녀가 가까이 오는 것을 발견한 둘은… 호호, 이야기 마녀의 포로가 되었느냐고요? 글쎄요.


이 그림책은 동화 작가 노경실 씨가 추천사에서 밝혔듯이, 문학과 미술이라는 두 장르를 통해 끝이 없을 것 같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신비로운 책이에요. 대롱대롱 실에 매어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듯 꼬박꼬박 아저씨와 꼬마 괴물의 행로를 쫓아가다 보면, 시끄럽게 째깍거리던 초침 소리도, 댕댕거리며 성질을 내던 괘종시계 소리도 잊게 되거든요. 문학적 완성도도 높지만 식판보다 더 큰 크기의 지면을 채우고 있는 익살스러우면서도 기발한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림책이 이래서 좋은 것이구나’라며 한참 한 장 한 장에 시간의 공을 들이게 된답니다. 여전히 삐죽하고 기다란 골무 모자를 쓴 꼬박꼬박 아저씨는 『파란 시간을 아세요?』, 『빨간 모자 아저씨의 파란 집』에 등장했던 주인공과 흡사한 모습이고, 뾰족 빨간 코의 둥근 얼굴의 이야기 마녀는 『달님은 밤에 무얼 할까요?』의 달님을 닮아있으니, 안 에르보의 책에 조금은 익숙한 독자라면 “아하! 안 에르보!”라고 무릎을 치게 될 것입니다. 파울 클레의 그림처럼 조금은 어린이 그림 같은 듯하면서도 추상적이고, 작가 안 에르보가 존경한다는 체코 출신의 그림책 작가 크베타 파코브스카의 입체적 화풍이 살짝 느껴지는 그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신비감으로 독자들의 시간을 앗아가 버리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답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3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장재현 감독의 K-오컬트

2015년 〈검은 사제들〉, 2019년 〈사바하〉, 2024년 〈파묘〉를 통해 K-오컬트 세계관을 구축해온 장재현 감독의 각본집. 장재현 오컬트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준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오리지날 각본은 영화를 문자로 다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독자를 오컬트 세계로 초대한다.

위기의 한국에 던지는 최재천의 일갈

출산율 꼴찌 대한민국, 우리사회는 재생산을 포기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원인은 갈등이다. 대한민국의 대표 지성인 최재천 교수는 오랜 고민 끝에 이 책을 펴냈다. 갈등을 해결할 두 글자로 숙론을 제안한다. 잠시 다툼을 멈추고 함께 앉아 대화를 시작해보자.

어렵지 않아요, 함께 해요 채식 테이블!

비건 인플루언서 정고메의 첫 번째 레시피 책. 한식부터 중식,일식,양식,디저트까지 개성 있는 101가지 비건 레시피와 현실적인 4주 채식 식단 가이드등을 소개했다. 건강 뿐 아니라 맛까지 보장된 비건 메뉴들은 처음 채식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할 말, 제대로 합시다.

할 말을 하면서도 호감을 얻는 사람이 있다. 일과 관계, 어른으로서의 성장을 다뤄온 작가 정문정은 이번 책에서 자기표현을 위한 의사소통 기술을 전한다. 편안함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대화법, 말과 글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방식을 상세히 담아낸 실전 가이드를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