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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자유주의에 대한 탐구

정치학자 스티븐 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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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나의 이념적 지향을 말하자면, 독일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 편에서 밝혔듯이, 모럴리스트에 가깝다. 그런데 모럴리스트는 섣불리 내세우기 곤란한 세계관이다.

굳이 나의 이념적 지향을 말하자면, 독일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 편에서 밝혔듯이, 모럴리스트에 가깝다. 그런데 모럴리스트는 섣불리 내세우기 곤란한 세계관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이념적으로 불투명하다거나 도덕군자연(道德君子然)한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 그런 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서 도덕에 관한 논의를 하지 않게 된 이유와 비슷하다.

영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룩스는 『마르크스주의와 도덕』(황경식?강대진 옮김, 서광사, 1995)에서 “마르크스 이래로 마르크스주의는 도덕에 대하여 공식적인 비판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와 도덕 사이를 도덕적으로 연관 지우려는 실질적인 시도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룩스는 역사학자 E.P. 톰슨의 견해를 빌려 그렇게 된 사정을 말한다.

“도덕적 가치의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침묵은 너무나도 요란스러워 귀가 먹을 지경이다’라고 톰슨은 말했다. 우리도 지금껏 보아왔듯이 ‘마르크스의 그 분노와 연민을 본다면 마르크스는 모든 펜 놀림마다 도덕주의자였다.’ 톰슨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빅토리아 왕조의 자본주의 시대에 구가됐던 도덕주의에 대항하여 싸워야 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침묵과 부정에 이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룩스는 이어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이 제시한, 역사적 유물론을 정초한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윤리적 논의에 관해 조심스러웠던 까닭을 인용한다. “도덕주의는 인과적 이해가 들어갈 자리에 허황되게도 도덕적 판단이 침입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일상생활이나 정치적인 가치 평가 모두의 경우에 윤리적 용어 자체의 ‘인플레이션’을 유도하여 잘못된 수사학으로 이끌어간다.”

『마르크스주의와 도덕』을 쓴 룩스의 “목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정초하고, 그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이론이 마르크스주의가 실천에서 저지른 도덕적 재난들을 어떤 관점에서 또 어느 정도까지 해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대답까지 내놓을 수는 없다.)”

룩스는 이 책이 단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소책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도덕Marxism and Morality』은 “현대의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가 몰락하기 직전인 1985년 출간되었다.

“오히려 이 책은 사회주의 정신은 마르크스주의 윤리와 사회주의 정신 사이의 제반 연결 고리 중 일부가 끊어졌을 때만 융성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며, 연결 고리의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가정을 발전시켜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 수 있는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접근 방식의 과오가 실천상의 잘못들과 어떤 관련이 있으리란 확신을 갖고서, 그러한 잘못들이 뭔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룩스는 ‘도덕’을 “최소한 옳음과 좋음의 영역, 그리고 책무, 의무, 공정함, 덕, 인격, 좋은 삶과 좋은 사회의 본성 따위의 문제, 또 그 배후에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제반 가정, 그리고 사회생활을 위한 전제 조건과 그 가능한 변화의 한계 및 실천적 판단의 근거 등에 대한 가정과 관계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룩스가 보기에 도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태도는 역설적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도덕적 교화도 반대하며, 모든 도덕적인 어휘를 낡은 것으로서 배척한다. 반면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들이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도덕적인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이 자유롭게 사고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이 책의 논점은 이렇다. “마르크스주의는 처음부터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채택된 수단들에는 스스로가 도덕적 저항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접근법을 보? 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유에 대한 풍부한 견해와 인간 해방에 대한 뚜렷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는 특히 정의, 권리, 수단-목적의 문제에 적절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었고, 따라서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세계에서의 부정의, 권리 침해, 허용할 수 없는 수단에의 호소 등에 적절히 반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또한 함부로 내세우기 어려운 이념적 지향성이다. 1980년대 자유주의자라는 호칭은 욕설이나 다름없었다. 요즘은 ‘자유보수주의’부터 ‘좌파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유주의가 만연하는 탓에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기가 겸연쩍다. 얼마 전에 읽은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박동천 옮김, 아카넷, 2006)이 적이 불편하고 거북했던 것도 그래서일까?

어딘가 모르게 그건 아닌 것 같다며 계속 찜찜하던 차에 스티븐 룩스의 『자유주의자와 식인종Liberals and Cannibals』(홍윤기 외 옮김, 개마고원, 2006)에 실려 있는 룩스의 ‘이사야 벌린 론’을 통해 찜찜함을 풀 실마리를 찾았다.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을 읽으면서 불편하고 거북했던 까닭은, 내가 자유주의자인가 아닌가 여부에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벌린의 주장에 동조하는가 여부에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을 읽으며 대체로 그의 견해를 수긍했다. 하지만 내가 이래도 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다.

룩스에게 “이사야 벌린은 도전적 사상가다.” 룩스는 벌린의 “사유 ‘방식’의 도전이 그 영향력이나 적절성에 있어 지난 반세기 동안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성장해왔다고 믿는다.” 또 그는 벌린의 산문이 “결코 난해하지도 않고 심지어 추상적이지도 않다”고 본다. “하지만 벌린의 글이 접근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은 통속화 또는 단순화라는 대가를 치루고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는 사상들이나 논증들 또는 세계관, 즉 자신은 숙고하고 숙달해 있었지만 글에서는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학문적 논쟁들을 독자들이 고찰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는 인용을 거의 하지 않으며, 텍스트를 상세하게 분석하지도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성실하고 호의적인 보고자로서, 사상가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대담가로서, 그 사상가들의 세계관에 대한 고찰로부터 연역되는 그 자신의 입장을 독자들에게 옹호하는 변호자로서, 사상가들의 해석을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쪽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해석적 방법에 충실해 여러 관점들을 뒤섞다보면 어느 때 가서는 독자들이 누구 목소리를 듣고 있는 헛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독자가 전해 듣고 있는 것은 벌린 자신의 인격 안에서 그대로 재생된 하만인가, 헤르더인가, 아니면 비코인가? 또는 그들은 벌린이 해석한 것인가 아니면 벌린이 전하는 그 인물들의 동시대인들의 평인가?”

벌린은 그의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했지만, “미국의 반공적 자유주의자들의 방식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결코 거슬릴 만큼 공격적인 논쟁을 펼치지도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의 종언’에 대해 자기만족적인 찬사를 보내지도 않았다.”

이사야 벌린은 “우리는 자연과 역사의 깊고 추상적인 지혜에 대해 충분히 경탄해왔다. 이제는 자연과 역사가 우연적이고 무의미하며 또한 뒤죽박죽이고 실수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다”라는 게르첸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도덕』도 그러하지만 『자유주의자와 식인종』은 우리 대학의 충실한 교육의 산물이다. 이 책의 꼼꼼하고 엄밀한 옮긴이 각주는 교육의 효과가 커 보인다. “경계심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벌린은) 오해의 여지 없이 좌파 사람이었으며”에 붙은 각주 설명은 그 중 하나다.

“좌파 사람(a man of the left): 여기에서 ‘좌파’(左派)란 과거 공산당이 집권했던 현존사회주의 국가들의 노선을 추종하는 이데올로기 신봉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나라에서처럼 북한 정권이나 그 지배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지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쓸데없이 그러나 빼놓고 지나가지 않을 심산으로, 강조해 둔다. 세계 공론장에서 ‘좌파’는 현상태를 비판적으로 보는 가운데 그 개선이나 개혁을 추구하는 사고태를 견지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실천하려는 사회성향을 가진 인물이나 세력으로서 우리나라 어법으로 얘기하면 진보파 정도가 어느 정도 그 의미에 해당된다.”

스티븐 룩스의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번역된 『3차원적 권력론Power: A Radical View』(서규환 옮김, 나남출판, 1992)은 절판되었다. 이 책을 펴낸 나남출판의 1996년판 도서목록의 해제를 통해 책 내용의 감을 잡아본다.

“이론사적으로 볼 때 이 책은 몇 가지 뚜렷한 특성과 의의를 지니는데 첫째는 권력이론사에서 이미 고전의 하나로 평가받는 무게 있는 저술이라는 점. 둘째,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정치학회보>를 중심으로 ‘보이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권력’의 문제를 쟁점으로 전개되었던 이른바 거대한 ‘비결정’(non-decision) 논쟁에 참여한 결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 가운데 하나라는 점. 셋째, ‘보이지 않는 권력’의 중요성을 사회과학적 수준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놓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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