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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는 페미니즘의 고전

- 버지니아 울프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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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일기를 읽은 독자에게 "그녀는 지극히 가까운 동시대 사람이지만 시간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리라." 방대한 분량의 비평적 전기『버지니아 울프』(책세상)를 지은 허마이오니 리의 지적이다. 허나, 울프가 그녀의 일기 독자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일반 독자에게 또한 그런 존재로 비친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일기를 읽은 독자에게 "그녀는 지극히 가까운 동시대 사람이지만 시간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리라." 방대한 분량의 비평적 전기『버지니아 울프』(책세상)를 지은 허마이오니 리의 지적이다. 허나, 울프가 그녀의 일기 독자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일반 독자에게 또한 그런 존재로 비친다. 특히 우리에게 버지니아 울프는 도무지 종잡기 어려운, 시대를 뛰어 넘는 작가다. 다시 말해, 한마디로, 버지니아 울프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끝물에 태어난 버지니아 울프는 이미 고전적 작가의 지위를 확보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D.H. 로렌스, E.M. 포스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 작가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진작에 그녀의 명성이 드높아진 데에는 한 편의 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중략)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하략)

1955년 『박인환시선집』을 통해 발표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우리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물론,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이 우리의 뇌리에 새겨진 것은 이 시가 박인희를 비롯한 1970년대 디스크 자키들의 목소리에 실려 방송을 탔고, 1980년대 서점에서 나눠주던 비닐 코팅된 책갈피에 「목마와 숙녀」가 단골로 등장한 덕분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목마와 숙녀」에 의해 형성된 버지니아 울프의 이미지는 우리 독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91년 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세월』(대흥)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당시 출판저널 편집장이었던 강철주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세월』이 결코 대중적인 책이 아님에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로 말미암아 그 작가와 작품이 낯익다고 착각한" 결과라는 것이다(강준만의『고독한 대중』(개마고원)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런 착각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 대한 오해로까지 이어져 그녀의 소설과 산문이 20대 여성의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리라는 턱없는 기대심리를 낳기도 한다. 산문선집의 경우, 제목에서부터 독자의 착시현상에 기대려는 얄팍한 의도가 드러난다.『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문학세계사)는 그렇지 않지만 『자동차 안에서의 명상』(안암문화사)이나『잊혀지기 싫은 까닭은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오늘의책)에서는 처음부터 버지니아 울프를 모더니즘의 틀 안에 가두거나, 아니면 평범한 사랑의 작가로 치부하려는 불순한 의도마저 엿보인다.

국내 출판사가 우리 독자의 입맛에 맞게끔 해외 작가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사례는 버지니아 울프에 국한하지 않는다. 시몬느 베이유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도 필요에 따라 각색되었다. 그나마 『자동차 안에서의 명상』과『잊혀지기 싫은 까닭은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는 본문에서 독자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 다행이다. 이 두 권의 산문집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독서론인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공히 실려 있다. 울프는 제목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물론 나 스스로 내릴 수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적용되는 대답이지 당신들에게도 적용되는 대답이 아닌 까닭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독서에 관해 다른 누군가에게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아무런 충고도 해 주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기호에 따라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의 결론에 이르도록 해 주는 것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독서관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이 재인식되고 재평가된 것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새롭게 읽기 덕분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울프의 작품들은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으로 거듭난다.『자기만의 방』『3기니』는 그 대표적 케이스다. 에세이 또는 평론으로 분류되는『자기만의 방』은 두 차례의 강연을 기초로 한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당연한 얘기를 한 걸 갖고서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는 반응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여성 작가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강조가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에 이뤄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상황을 확인하는 데 남의 나라의 사례를 굳이 살피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네 명의 여성 장관을 동시에 배출하기까지는 반 세기가 넘는 세월이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시각은 다분히 유물론적이다. "저녁식사를 잘 하지 못하면 사색을 잘 할 수 없고 사랑도 잘 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훌륭한 저녁식사가 훌륭한 대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견해가 그렇거니와 부르주아 문화를 보는 비판적 관점 역시 그렇다. 울프는 "어떤 천재가 노동계층에서 틀림없이 존재했었던 것처럼 여성에게서도 분명히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이나 노동자가 셰익스피어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지식인 여성이 한 신사에게 보내는 긴 편지 형식의『3기니』(여성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촉발된 반전 여론과 관련해 미묘한 울림을 준다. 신사로부터 전쟁 반대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고 반전 기부금을 내달라는 부탁을 받은 여성은 3년 여의 고민 끝에 전쟁 반대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는 요지의 답장을 쓴다.

여성 지식인은 자신에게 3기니가 있다면, 1기니는 아무 조건 없이 여자대학 증축 기금으로 기부하고, 1기니는 여성의 취업을 돕는 단체에 기부하며, 끝으로 1기니는 반전 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다짐한다. 지식인 여성이 남성 중심의 반전 단체 가입은 정중히 거절하면서도 반전 기금을 내기로 한 것은 평화를 추구하는 목표가 같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여자대학과 여성의 취업을 돕는 단체에 기부한 것은 그것이 전쟁 방지에 더 보탬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3기니』는 스페인 내전을 둘러싼 논란을 배경으로 하는데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 영국 지식인 사회에서 끝까지 참전 반대 입장을 고수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집안의 천사 죽이기』(두레)는 페미니즘 계열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원래 제목이 '여성의 전문직'인 표제작『자기만의 방』『3기니』의 가교 구실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은 매력적이어야 하며 환심을 사야 하며 성공을 하려면-노골적으로 말해-거짓말을 해야" 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새로운 여성운동가들이 울프의 방대한 작품 중 일부일 뿐인『3기니』『자기만의 방』 두 편을 자신들의 지침서로 선언하고 여기에서 페미니즘 이론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놀랄 만한 현대성을 말해 주고 있다."

 전기『버지니아 울프』(한길사)를 지은 베르너 발트만의 지적대로 울프는 소설, 에세이, 서평, 일기, 편지, 전기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글을 남겼다. 이 가운데 소설과 에세이를 중심으로 적잖은 분량이 우리말로 옮겨졌다. 1996년 솔출판사가 펴낸 <버지니어 울프 전집>은 정확히 말하면 작품 선집이다.『등대로』『댈러웨이 부인』 같은 대표 장편과『자기만의 방』 그리고 에세이(『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와 일기(『그래도 나는 쐐기풀 같은 고통을 뽑지 않을 것이다』)의 일부를 다섯 권으로 엮었다. 

『버지니아 울프, 그리운 사람』(하늘연못)은 울프의 중?단편을 망라해 한 권에 담은 책이다. 단편소설 「필리스와 로저먼드」는 박완서의 장편『휘청거리는 오후』를 떠올리게 한다. 런던의 딸부잣집의 다섯 자매는 성격에 따라 세 패로 나뉜다. 강건하고 도전적인 둘은 대학 가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교수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다. 또, 둘은 경박하고 가정적이며 예민한 전형적인 계집아이다. 나머지 한 명은 두 패거리를 왔다갔다한다. 「필리스와 로저먼드」는 전형적인 두 계집아이의 이야기다.『속상하고 창피한 마음』 (하늘연못)은 '버지니아 울프 미발표 유고작품집'을 표방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표제작을 제외하고 중?단편전집에 모두 들어 있다.

 울프의 장편소설도 여러 권 번역되었다. 첫 장편소설『항해』(창해)를 필두로『올랜도』, 그리고 마지막 장편소설인『막간』(문학과현실사)도 한글판이 나왔다. '제이콥의 방'은 『야콥의 방』(눈)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바 있다. 최근에는『댈러웨이 부인』의 새로운 한글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아마도 영화 <디 아워스>가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잡지 <필름2.0>(제117호)에 실린 이우일의 만화에서 버지니아 울프로 분한 니콜 키드먼이 자살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만화는 '객관적인 행복의 조건을 두루 갖췄는데 어째서 불행하고, 왜 자살을 꿈꾸는가'라는 사람들의 비난과 울프의 자살을 행복에 겨운 투정으로 보는 시각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울프가 작품 활동을 하던 시절에도 있었다.  D.H. 로렌스는 버지니아 울프를 유한마담쯤으로 여겼다. 울프의 일대기를 만화로 엮은 『버지니아 울프의 사랑과 문학』(오월)에는 울프가 속한 '블룸즈버리 그룹'을 일컬어 D.H. 로렌스가 "그들은 모두 호모에다 레즈비언이야"라고 일갈하는 대목이 있다.

이밖에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 책으로는 태혜숙 교수의 짧지만 알찬 해설서인 『버지니아 울프』(건국대출판부)와 김용인의 『꿈꾸는 버지니아』가 있다. 『꿈꾸는 버지니아』(외길사)는 버지니아 울프와 레오나드 울프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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