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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언어에 갇혀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막 다리오 아르젠토의 신작 <히치콕을 좋아하세요?>를 봤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히치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일곱 편의 텔레비전 영화 시리즈 중 첫 편이지요. 재미있었습니다. 적어도 실망스러웠던 그의 <카드 플레이어>보다는 나았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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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오리지널 언어로 더빙한 이탈리아 호러 영화 <카드 플레이어>
막 다리오 아르젠토의 신작 <히치콕을 좋아하세요?>를 봤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히치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일곱 편의 텔레비전 영화 시리즈 중 첫 편이지요. 재미있었습니다. 적어도 실망스러웠던 그의 <카드 플레이어>보다는 나았단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 제가 하려고 하는 말은 그게 아닙니다. 언어 문제죠. <히치콕을 좋아하세요?>는 당연히 이탈리아에서 만든 이탈리아 텔레비전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공식 언어는 영어거든요. 배우들이 일단 영어나 이탈리아어로 연기를 한 뒤 성우들이 그 위에 목소리를 덧입히는 식이죠.

왜 그랬냐고요? 원래 이탈리아 장르 영화들이 그래요. 해외 판매를 위해 영어를 우선으로 하죠. 하긴 이탈리아 자국에서는 상관이 없기도 해요. 그 사람들은 원래부터 더빙에 길들여져 있거든요. 이탈리아어로 더빙된 미국 영화나 영어로 녹음된 뒤 다시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이탈리아 영화나 그들에겐 그냥 똑같습니다. 그 때문에 ‘예술성’에 그렇게까지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던 마카로니 웨스턴이나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은 처음부터 영어를 제1언어로 삼았지요. 어쩌다 보니 그런 장르들이 60년대 이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걸작들을 토해냈으니 난처해진 거고요.

더 재미있는 건 이들의 영어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어 실력은 그냥 그렇습니다. 최근에 좀 배워서 영어로 인터뷰를 하는 걸 보긴 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어가 편한 사람이에요. 전에 부천 영화제에 람베르토 바바가 게스트 겸 심사위원으로 왔었는데, 그 역시 영어가 서툴러서 인터뷰도 이탈리아어로 진행해야 했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국적 캐스팅을 동원해 영어가 기본인 영화들을 만들었습니다. 대사의 디테일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 심지어 종종 끔찍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오타나 실수도 발생한답니다. 루치오 풀치의 영화 <비욘드>에 나오는 'Do Not Entry'라는 표지판은 이런 실수들을 대표하는 얼굴마담이죠. 더빙도 안 좋아요. 그래도 마카로니 웨스턴은 영어권 주연 배우들의 비중이 커서 덜 튀지만 비교적 싸구려인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은 정말 괴상할 정도로 어색한 영어 더빙을 과시하죠. 오히려 그게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렇다고 비교적 최근 영화인 <카드 플레이어>에서도 그런 식의 엉터리 더빙을 한 건 좀 심했지만요.

예술적인 면을 생각해보죠. 이들이 이탈리아어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예술적으로 더 나은 작품이 나왔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느 쪽으로 해도 완벽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후시녹음이 당연시된 환경을 이용해 다국적인 캐스팅을 끌어다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게 그들 영화의 힘이기도 했거든요. 안소니 퀸이 나오지 않는 <길>이나 버트 랭커스터나 알랭 들롱이 나오지 않는 <표범>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런 영화들과 이탈리아 장르 영화들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죠. <길>의 오리지널 언어는 누가 뭐래도 이탈리아어니까요. <서스피리아>나 <딥 레드>와 같은 이탈리아 호러나 <석양의 건맨>과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에서는 그게 먹히지 않습니다. 그 영화의 공식 언어는 영어예요. 누가 뭐래도요.

여기서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할 건, 그래도 그 작품들은 여전히 이탈리아 영화라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인들이 엄청나게 이탈리아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만든 이탈리아의 수출품이지요. 심지어 그들은 어색한 영어까지 이탈리아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전 종종 그런 영화들을 더빙하는 성우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말하는 대신 이탈리아 호러식 영어를 개발해 거기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우리들이 이탈리아인들의 태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일까?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이탈리아어와 영어의 관계는 한국어와 영어의 관계와 다릅니다. 그렇게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 봅니다. 언제까지나 하나의 언어 안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고요. 우리 문화가 진정 세계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다양한 언어들의 세계에 우리의 일부를 담을 필요가 있다고요. 그리고 그건 단순한 번역작업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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