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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병 사건'의 원인은 게임이다?

며칠 전에 일어난 군 총기난사 사건 덕택에 우린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토론 속에 다시 한 번 던져졌습니다. 과연 게임이나 영화가 이런 끔찍한 사건에 책임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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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일어난 군 총기난사 사건 덕택에 우린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토론 속에 다시 한 번 던져졌습니다. 과연 게임이나 영화가 이런 끔찍한 사건에 책임이 있을까요?

한 동안 매스컴은 이 사건의 범인인 김일병이 게임광이었다는 점을 물고 늘어지며 이 둘의 연관 관계를 탐색했습니다. 김일병의 행동을 기술하며 ‘그가 즐겼던 폭력적인 게임에서처럼’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고요. 하지만 막 들어온 뉴스에 따르면 이 사람이 가장 좋아했던 게임은 [메이플 스토리]였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폭력적인 게임에 집착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김일병이 컴퓨터 게임에 보통 이상으로 매달렸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이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는 걸 암시하는 단서일 뿐이지 사건 자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답을 제시하기엔 너무 이르지만, 이 사건 역시 시스템의 결함과 개인적인 성격 문제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매스컴을 무작정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자기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이런 식의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고 이야기에 논리를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매스컴이 ‘게임 원인설’에 매달린 건 그게 이 알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그럭저럭 설득력 있는 해답 하나를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건 이미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시스템 자체를 흔들지 않고 개인과 특정 문화적 현상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가설에 그렇게 쉽게 매달린 건 분명 안이했지만요.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건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현대 대중문화는 일반 대중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그건 단지 이미 폭력적인 세상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일까요?

제가 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게 편하죠. 대부분 영화나 게임 애호가들이니까요. 반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장르 영화나 게임의 유해성에 대해 공격하는 사람들 중 이런 것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자기네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라져도 상관없는 거죠.

제 입장은 어떠냐고요? 글쎄요. 전 호러영화팬이고 거기에 대한 글들도 꽤 쓰는 편이라 종종 이런 식의 대답을 원하는 인터뷰를 받습니다. 하지만 전 여기에 대해 그 사람들이 원하는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있을 만큼 확신할 수 없어요. 전 비폭력적인 사람이지만 그건 제 육체가 그런 충동을 직접 토해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전 제가 그렇게까지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제가 툭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루치오 풀치 영화에 나올 법한 난도질 판타지를 터트리는 게 과연 호러영화랑 무관할까요? 만약 저에게 김일병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손쉽게 싫어하는 사람들을 학살할 수 있는 도구가 주어졌고 주변의 환경 때문에 그런 충동을 제어할만한 판단력이 잠시 사라졌다면, 지금까지 본 호러 영화들을 상상력의 밑천으로 삼아 김일병보다 더 창의적이고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스크림>에서도 살인범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호러 영화는 살인자를 더 창의적으로 만든다고요.

물론 전 어느 정도 타협점에 도달할 생각은 있습니다. 게임과 영화가 순수하게 폭력적인 세상의 반영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도 세상의 일부니까요. 따라서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범죄들이나 대중의 전체적인 폭력 성향에 대중 매체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매스컴이나 반대자들이 이런 매체에 대한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합니다. 폭력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싶다면 이런 매체들보다 보다 근본적인 것들을 건드리는 게 먼저겠죠. 이건 이런 매체들을 방치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해결책들이 존재하니 거기에 집중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거죠.

그러나 제가 아무리 박쥐같은 글을 쓰며 양쪽 모두의 비위를 맞추어주려 노력한다고 해도 (거기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박쥐처럼 굴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근본적인 문제점인 폭력 자체는 여전히 남습니다. 원인이 시스템에 있건 개인에게 있건, 영화 같은 매체 속에 있건 현실 속에 있건, 폭력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아마 이런 식의 성향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언젠가는 간단한 시술 하나로 수많은 종교인들이 피를 깎는 수련을 통해 도달하려 애쓰는 해탈이 경지에 도달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 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폭력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적당히 통제된 상태 속에서 우리를 경쾌하게 자극하고, 때로는 폭탄처럼 터져 지금처럼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는 우리 머리 속의 괴물과 함께 말이죠. 결국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가장 안전하고 피가 덜 튀는 공존 방법을 찾는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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