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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 『저녁뜸의 거리』

히로시마에는 가면 원폭기념관이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자폭탄의 잔인함을 경험했던 히로시마에 어떻게 원폭이 투하되었고 어떤 위력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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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는 가면 원폭기념관이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자폭탄의 잔인함을 경험했던 히로시마에 어떻게 원폭이 투하되었고 어떤 위력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원폭의 열에 녹아내린 철근 콘크리트와 폭풍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진 건물 등 당시의 파편들도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흔적은 커다란 돌에 새겨진 사람의 그림자였다. 거대한 석조건물의 입구에 사람이 쓰러져 불타버린 흔적, 그 흔적이 고스란히 그림자로 남아있었다. 진정으로 참혹한 것은 원자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가 아니라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비극이다.

원자폭탄의 참상이 어떤 것인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터미네이터 2>를 봐도 된다. 린다 해밀턴의 꿈 장면에서 핵폭탄이 터졌을 때의 광경이 나온다. 멀리에서 빛이 번쩍하면서 이내 엄청난 열기로 땅이 끓어오르고, 눈이 멀고, 살이 타들어간다. 지옥불처럼 모든 것이 타오르고 있으면 곧 폭풍이 몰려온다.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폭풍은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의 타들어간 살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핵폭탄이 터지면 근거리에 있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 하지만 진짜 참상은 그 다음이다. 낙진으로 검은 비가 쏟아지고,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나 방사능으로 인한 후유증이 남는다. 차라리 그 순간에 죽은 사람들은 편할지도 모른다. 참상 속에서 온갖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욱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몇 년 뒤에 낳은 자식들조차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을 보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고노 후미요의 『저녁뜸의 거리』는 그날의 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1955년 오조라 건축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히라노는 원폭 때문에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 아버지와 여동생 미도리는 원폭의 폭발과 함께 죽었고, 언니인 카스미도 며칠 후 죽었다. 살아남은 어머니와 단둘이서 생활을 꾸려가는 히라노는 언제나 그날의 참혹한 기억에 시달린다. 원폭이 터진 그날, 히라노는 수없이 널린 시체들,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수많은 사람들, 구호소에 있는, 다른 생물처럼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이들을 보았다. 제발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는 “죽은 자의 나막신을 훔쳐서 신는 냉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날,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은 늘 히라노를 괴롭힌다. 같은 곳에서 일하는 우치코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히라노는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하고. 그러면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랑했던 도시 전체가, 사람들 모두가 생각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날로 질질 끌려간다.” 결국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10년이나 지난 후에 히라노는 죽어간다. 카스미와 똑같이 혼자서 걸을 수 없게 되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되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어 서서히 죽어간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원폭의 기억만이 아니라 상처까지도 히라노가 죽은 후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다행히 고모의 집에 있었기에 원폭을 맞지 않는 동생 아사히는 히로시마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공부를 가르쳐주던 옆집 소녀 오타 교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피폭자였던 교카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카가 피폭자라는 것을 아는 모든 이들은 그들의 교제를 반대한다. 교카와 교카의 자식의 몸에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기에. 교카는 서른여덟 살에 죽었고 아사히와 교카의 아들 나기오는 천식을 앓는다. 그게 정확히 원폭의 후유증 때문인지는 아무도 확증할 수 없다. 하지만 피폭자가 아닌 사람들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언젠가 그들이 죽어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도 피폭자들은 여전히 사회의 이방인이 되어 있다. 이 정상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로 간주된다.

정년퇴직을 한 아사히는 가끔 히로시마를 찾아간다. 어디를 가는 것인지 궁금해진 아사히의 딸 나나미는 아버지의 뒤를 밟는다. 아버지는 과거의 기억을 찾아 그날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히로시마를 찾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는다. 히로시마의 기억 역시 그렇다. 원폭이 처음으로 떨어졌다는 사실, 그래서 일본이 피폭국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지금도 그들의 가족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희생자가 아니라, 그날의 그 사람들이 희생자인 것이다.

히로시마 출신이지만, 그날의 기억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고노 후미요는 자신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취재하여 생생하게 원폭의 상처를 그려냈다. 『저녁뜸의 거리』는 고노 후미요의 말처럼 “이 세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만화다. 이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에, 원폭이 투하되는 날은 두 번 다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날의 상처를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한다. 결코 잊지 않고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저녁뜸의 거리』는 그 잔인한 ‘지도자’들이 꼭 보아야 할 만화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그들의 ‘지도자’에게 핵무기 폐기를 촉구해야 할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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