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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를 탐구하는『무뢰전 가이』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대표작은 1998년 고단샤 만화상을 수상한 『도박묵시록 카이지』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여느 도박만화처럼, 탁월한 테크닉과 운으로 강적들을 물리치며 도신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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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대표작은 1998년 고단샤 만화상을 수상한 『도박묵시록 카이지』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여느 도박만화처럼, 탁월한 테크닉과 운으로 강적들을 물리치며 도신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 빚쟁이에게 쫓기며 인생의 패배자로 하루하루를 소일하던 카이지는 획기적인 제안을 받는다. 외딴 섬으로 가서, 도박의 승리자가 되면 모든 빚을 탕감해준다는 것이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도 물론 도박에 관한 만화이기는 하다. 하지만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승부의 쾌감이나 드라마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도박의 근원 자체를 파고든다. 인간이 왜 도박을 하는지 질문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이 세상이 자체가 도박의 원리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가장 단순한 가위바위보 게임과 외나무다리 건너기 등으로 인간의 심리와 사회의 법칙을 설명하는 후쿠모토의 통찰력은 정말 눈부시다.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만화가 데뷔 후, 주로 ‘마작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마작과 파칭코 등 도박잡지를 사보는 사람들은 일종의 도박 중독자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게임에 이기는 법이다. 그리고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나도 당첨자가 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복권을 사듯이, 순간의 승리에 도취되어 날마다 도박장으로 향한다. 후쿠모토는 도박잡지에 발표한 만화를 통해 도박의 테크닉이 아니라 세상의 무서움을 알려준다. 그리고 진정으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준다. 초기의 『은과 금』이 그렇고, 『도박묵시록 카이지』도 그렇다. 최신작인 『최강전설 쿠로사와』도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만, 시작은 약간 다르다.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아가던 중년의 쿠로사와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그리는 것이다. 도박에 빗대지 않고, 이 잔혹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자체를 인생의 패배자 쿠로사와의 고난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무뢰전 가이』『최강전설 쿠로사와』의 청년 아니 소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무뢰전 가이』의 주인공 가이는 고등학생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가이는 자신만의 삶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난데없이 음모에 휘말려 살인죄를 덮어쓴다. 그리고 불량청소년을 교화시킨다는 인간학교에 끌려간다. 5권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무뢰전 가이』는 가이의 각성을 통하여,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도 ‘도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학교에서 아이들을 교화시킨다면서 행하는 각종 체벌과 훈련은, 일종의 게임이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게임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받아들이는가가 풀려나는 방법이다. 결국 인생의 모든 것은 게임이고, 도박인 것이다. 단지 판돈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이 다를 뿐.

쿠도 가이는 중학교 2학년, 13세의 여름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가이는 주변 아이들의 가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스스로는 동전 한 푼 벌지 않고, 생활을 전부 부모한테 의지하는 주제에 욕설을 퍼붓고 부모가 좋고 나쁘고를 말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그게 싫다면 독립하면 되는데, 그것도 아니고. 일하는 아버지와 돌봐주는 어머니가 훨씬 훌륭했다. 썩었어. 그 녀석들이 훨씬 썩었어.’ 가이는 더 나아간다. ‘나도 고아원 시설의 비호에 있다. 나도 놈들과 같은 부류다. 용서할 수 없다. 해방되고 싶다.’ 시설에서 나간 가이는, 낡은 빈 집에 들어갔다가 철거 예정된 집에 눌러앉아 돈을 뜯어내는 이케다란 남자를 만난다.

인간학교의 교장은, 이케다를 만난 것이 가이가 비뚤어진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이는 당당하게 답한다. ‘나는 풍요로웠어. 혼자였으니까, 고립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현실이란 것의 무게와 공기를 느낀다. ‘자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란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제약이 생긴다. 그러나 그 제약된 속에서 역시 무한이었던 것이다. 무한을 느끼고 있었다. 즐거웠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능력에 의해 가난한 것이니까...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싫으면 자신의 힘을 키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이상 불우한 것은 당연한 일.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납득했을 때 또 공기가 바뀌었다. 나 자신에 의해 생활의 전부가 정해지기 때문에 현실인 것이다. 생활을 통째로 남에게 맡기는 녀석들이 현실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그림을 썩 잘 그리는 작가가 아니다. 주인공이 멋지게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황을 묘사하는 솜씨만은 탁월하다. 인간학교에서 감시를 뚫고 도망쳐서, 건물 내에서 눈을 피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솜씨는 긴장감이 넘친다. 후쿠모토는 독자의 긴장감이 어떻게 고조되고, 유지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작가다. ‘도박’의 기본이 스릴과 서스펜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리고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무엇보다 ‘이야기’로 승부하는 작가다. 자신의 주장을 한껏 담은,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스토리로 독자를 휘어잡는다. 때로는 오로지 주장만으로 지면을 채우기도 한다. 약간은 독단적인 주장이지만, 후쿠모토의 작품에서는 그런 ‘설교’가 한편으로 어울린다. 작품 전체가 일종의 가상현실이기 때문에, 작가의 과도한 주장과 설교가 오히려 현실성을 부여한다.

『무뢰전 가이』의 주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립시켜라’다. 가이가 그랬듯이, 인간은 철저하게 자신에 의지하여 존재할 때만이, 현실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이는 여러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홀로 선다는 쾌감을 알게 되고, 다음에는 자신의 유일한 의지였던 주먹이 스스로를 배반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강함과 자존심이 오히려 상황에서 도피하는 것임도 알게 된다. ‘누구 한 사람 믿어주지 않아도, 진실은 나한테 있다. 방해하는 녀석은 쳐부순다’고 말하던 가이는 ‘알아달라고 해선 안 돼. 알게 하는 거다. 내가 옳다는 것을...나의 힘을....나는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다짐하고, 다시 ‘어쩌면 나는 손을 놓아온 게 아닐까? 진짜로 이기겠다는 마음 같은 건 없이 그저 작은 폭발을 해왔을 뿐. 곤란한, 정말로 곤란한 현실로부터 시선을 외면하고 문제와 자신을 분리시켜 왔을 뿐이 아닐까? 겉만 번드르르 전선이탈. 싸움의 포기.....쓸데없는 반항이다. 이기려는 맘이 없는 행위. 정말로 이기고 싶다면...일시적인 패배를 전제로 한... 하찮은 프라이드와 함께 동반자살하는 것보단 나아. 차라리 적에게 삼켜져라. 이기기 위해서’로 나아간다.

가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가는 것.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서 손을 뗀, 그런 권리를 위임하는 해방’을 거짓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이런 진리를 가이처럼 일찌감치 깨닫지 못한다면, 『최강전설 쿠로사와』처럼 무력한 중년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도박의 운은 언젠가 돌아오듯, 쿠로사와도 ‘최강’이 되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속임수만 없다면, 도박과 게임의 조건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니까. 한편으론 그 잔인한 도박의 세계가, 결국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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