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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것의 공포 - 『무서운 책』

올해 여름 영화계에는 유난히 공포영화가 많다. 이미 <페이스>와 <령>이 개봉했고 <인형사> <알포인트> <분신사바> 등이 줄지어 있다. 작년에 <장화, 홍련>과 <여고괴담3-여우계단>이 성공을 거둔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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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영화계에는 유난히 공포영화가 많다. 이미 <페이스>와 <령>이 개봉했고 <인형사> <알포인트> <분신사바> 등이 줄지어 있다. 작년에 <장화, 홍련>과 <여고괴담3-여우계단>이 성공을 거둔 덕이다. 하지만 이미 개봉한 <페이스>와 <령>은 무척 실망스러운 공포영화였다. 진정한 ‘공포’를 그려내기보다는, 갑자기 귀신이 튀어나오거나 이상한 몸짓을 하는 등 충격요법으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링>의 성공 이후, 한국의 공포영화는 사다코의 저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기괴하게 움직이는 한국 귀신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오히려 짜증이 난다.

공포는 새로운 것이나 충격적인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익숙한 것,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 공포는 시작된다. 이번에 나온 우메즈 가즈오의 『무서운 책』을 보면 일상의 공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메즈 가즈오는 일본 최고의 공포작가이다. 1936년생인 우메즈 가즈오는 1955년 단행본 <숲의 남매>를 출간하면서 만화가 활동을 시작했다. 주간 <소녀 프렌드>에 공포만화를 연재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우메즈 가즈오는 1974년 대작 <표류교실>로 소학관 만화상을 수상하면서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현대사회, 문명, 인간에 대한 파격적인 묘사와 뒤틀린 세계관은 열렬한 매니아를 형성했고 특히 얼굴과 육체의 끔찍한 변형과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이후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메즈 가즈오는 일본만화계에서도 가장 독창적이며 과격하고 기묘한 작가로 평가된다. 공포만이 아니라 엽기적인 개그물 <마코토짱>, 세기말적인 판타지 <표류교실>, 인간과 로봇, 진화의 문제를 다룬 <나는 싱고>등 다양한 분야에서 걸작을 양산한 작가다.

국내에도 팬이 많은 이토 준지의 『토미에』, 『소용돌이』 등 섬뜩하고 엽기적인 세계와 비교할 때, 우메즈 가즈오의 공포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무서운 책』 1, 2권은 그렇다. 1권의 <거울>과 2권의 <나비의 묘>는 60년대 후반에 발표된 만화다. 당연히 그림도 촌스럽고, 이야기 전개도 상식적인 정도다. 소녀만화풍의 작품을 주로 그렸던 초기작답게 여성의 질투와 시기, 분노 등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던 소녀가,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분신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는 이미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그 뻔한 듯한 이야기가, 묘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있던 소녀 에미는 자신의 그림자에게 너는 점점 추해지고, 아무도 너를 보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이 단지 저주에 불과하다고? 많은 여성들의 공통적인 두려움은 무엇일까? 영원한 것은 없다. 얼굴이나 육체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도, 나이가 들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갈지,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게 될지, 그런 두려움을.

<거울>이 다소 소녀적인 몽상이라면, 아직 출간되지 않은 우메즈 가즈오의 걸작 <세례>는 그 두려움을 극단적으로, 가장 섬뜩하게 그려낸다. 미모의 여배우도 중년이 되면서 두려움에 휩싸인다. 늙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다. 자신의 딸의 육체에 자신의 뇌를 이식하여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뇌는 탐욕스러운 중년 부인의 그것이지만, 육체는 초등학교 4학년인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담임선생을 유혹하고, 그 방해물이 되는 담임 선생의 부인을 쫓아낼 계획을 세운다. 거동을 할 수 없는 담임의 부인에게, 바퀴벌레를 먹이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장면이 끔찍스러운 게 아니라, 순수한 소녀의 육체에 깃든 성인의 추악한 욕망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진정한 공포란 그런 것이다. 그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그 뒤에 자리잡은 ‘그림자’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섬뜩하다.

국내 케이블 TV에서 방영한 <롱 러브레터>의 원작인 <표류교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초등학교가 송두리째 미래세계로 날아가버린 후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사막으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그 안에서 어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자멸의 길을 걷고, 아이들 역시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어내며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우메즈 가즈오의 무정부주의적인 세계관은 나가이 고의 그것에 견줄만 했다. 우메즈 가즈오와 나가이 고가 60, 70년대에 보여주었던 비극적이면서 파괴적인 상상력은 이후 작가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토 준지는 물론이고 <물장구치는 금붕어>,『드래곤 헤드』 ,『좌부녀』 등 우메즈 가즈오가 건드렸던 장르를 그대로 따라간 듯한 모치즈키 미네타로도 그의 영향 하에 있다.

우메즈 가즈오의 『무서운 책』은, 그의 이형(異形)적인 세계를 보여주기에는 너무 소박한 작품이다. 우메즈 가즈오의 세계는,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다. 단지 무서운 장면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근원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드러낸다. 우메즈 가즈오가 단지 공포만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종횡무진한 이유는, 우리의 마음 자체가 혼돈이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끔찍할 수도 있고, 가장 순수한 것이 가장 잔인할 수도 있고, 가장 징그러운 것이 가장 웃긴 것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게 세상이고, 그게 바로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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