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인생은, 비참하다 - 『라이프』

거창하게도 『라이프』란 한 단어로 제목을 붙인 만화를 만났다. 그런데 그 '라이프'의 주인공은 갓 고등학교에 들어간 소녀다. 20살, 아니 적어도 30은 되어야 '인생'이란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거창하게도 『라이프』란 한 단어로 제목을 붙인 만화를 만났다. 그런데 그 '라이프'의 주인공은 갓 고등학교에 들어간 소녀다. 20살, 아니 적어도 30은 되어야 '인생'이란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14살, 15살의 나이에 감히 '인생‘이란 말을 올리는, 건방진 소녀는 과연 누구일까.

『라이프』는 단정하게 시작된다. 중학교 3학년인 아유무는 단짝친구인 시노즈카를 따라 명문 고등학교에 가기로 결심한다. 언제나 우등생이었던 시노즈카는 아유무를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함께 열심히 공부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 시즈노카는 떨어지고, 아유무는 붙는다. 그사실을 안 시노즈카는 ‘왜 하필이면 너냐구’란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울먹이는 아유무에게 “나한테 의지할 대로 의지해놓고, 안되면 동정하면 되니까……. 너 같은 앤 없는 게 나았다구”라는 지독한 말을 남기고 가버린다. 유일한, 세상과도 바꿀 수 없었던 친구를 잃어버린, 아니 어쩌면 자신이 칼을 꽂아버렸다는 절망감으로 아유무는 자학한다. “아픔을 느껴야만 안심이 돼. 남의 아픔에는 둔한 주제에. 나도 언젠가는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다정다감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되뇌이며, 자신의 팔목을 칼로 긋는다. 그 날부터 습관적으로, 좌절감에 휩싸일 때마다 아유무는 칼로 손목에 금을 긋는다.

『라이프』의 인생은, 비참하다. 고등학교에 간 아유무의 인생은 더욱 황폐하다. 명문고를 가기는 했지만, 집에서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아유무는 여전히 외톨이다. 엄마는 머리가 좋은 동생만 감싸고돈다. 마나미란 친구가 생기지만, 그건 아유무에게 더욱 큰 장벽이다. “마나미가 날 싫어하지 않도록 자꾸 눈치만 보게 돼. 그래도 혼자보단 낫지 뭐."란 독백처럼, 아유무는 마나미의 독단적인 감정과 제멋대로인 행동에 휩싸여버린다. 너무나 당당해 보이는, 하토리란 동급생에게 반하기도 하지만 ‘하나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여전히 ‘리스트 컷트’를 계속한다. 마나미의 남자친구에게 지독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하토리를 동경하다가 왕따를 당하기도 하는 등 아유무에게는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계곡만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 정도라면,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 생활 속에 있다면 ‘인생’이란 단어를 되뇌일만한 자격이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과연 자기에게 무엇인지를 물어볼 수 있다. 『라이프』가 일본에서 백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런 아유무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내의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라이프』의 간단한 감상을 적은 글에서는 대체로 ‘너무 암울해서 싫다’,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주인공이 너무 바보같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너무 어둡고, 너무 비참한 현실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비판은 일면 맞는 말이다. 『라이프』는 인생의 가장 어두운, 뒷면만을 보여주고 있다. 보지는 못했지만, 스에노부 케이코의 전작인 『비타민』도 비슷한 이야기라고 한다. 이지메를 당하며 괴로워하던 여학생이 만화를 그리게 되면서 자신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 스에노부 케이코의 관심은 그런 것 같다. 가장 밝은 시기에, 가장 비참한 ‘인생’을 겪는 소녀.

그것은 결코, 아유무가 바보같아서가 아니다. 당당한 하토리에 비해서, 아유무가 소심하고 나약한 것은 맞다. 하지만 집단 이지메를 당했을 때, 당당하게 그 악랄한 시선과 강압에서 일어설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집단에서 밀려나는 것을 가장 거대한 공포로 느끼는 일본 같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개인으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이 되는 길이지만, 성년이 되어서도 진정한 성인이 되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몸은 이미 성인이지만, 정신은 여전히 나약한 경우가 많다. 아직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변화해 가는 사춘기 시절에 겪는 이지메의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다. 그런 아이들에게, 당장 진정한 성인이 되라는 요구는, 지나친 것이다. 『라이프』는 그런 작은 아이들의 고통과 자학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아마 이 작가는,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겪지 않고는, 이토록 세밀하게, 이토록 아프게, 그 상황과 느낌을 그려낼 수 없다. 그 아픔이, 정말 손목을 긋는 것 같은 고통으로 전달된다.

혹시 『라이프』의 암울함이 싫어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그건 큰 실수다. 일본 문화의 특징을 흔히 ‘감상과 폭력’이라고 한다. 지극히 감상적이고, 지극히 폭력적인 것. 순정만화가 흔히 표현하는 것은 아주 센티멘탈한 감정들이다. 그런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 속으로 순식간에 밀려들어와서는, 아련한 기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일본 문화를 한 면만 보고 있는 것이다. <러브 레터><4월 이야기>로 센티멘탈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 이와이 슌지 감독이 만든 <리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지메로 고통을 당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와이의 그 아름답고 따뜻한 정서와 지독하게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정서는 결코 유리된 것이 아니다. 그 극단적인 두 개의 정서는 일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것이다. 『라이프』 역시 그렇다. 이 만화는 감상과 폭력의 극한을, 소녀만화의 스타일로 아찔하게 펼쳐놓는다. 그 잔인한 묘사에 가슴이 짓눌리면서도 확인하고 싶어진다. 아유무가 어떻게 그 지옥에서 벗어나, 인생의 빛을 조금이라도 발견하게 될 것인지를.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라이프 Life 1

<스에노부 케이코> 글,그림3,150원(10% + 3%)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아유무는 가장 친한 친구인 시노즈카와 같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시노즈카의 도움을 받아 필사적으로 공부한다. 결과는 당당하게 합격! 하지만 우등생이었던 시노즈카는 떨어지고 아유무에게 절교선언을 하고 마는데... 친구를 잃고 홀로 낯선 학교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김기태라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르

2024년 가장 주목받는 신예 김기태 소설가의 첫 소설집.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등 작품성을 입증받은 그가 비관과 희망의 느슨한 사이에서 2020년대 세태의 윤리와 사랑, 개인과 사회를 세심하게 풀어냈다. 오늘날의 한국소설을 말할 때, 항상 거론될 이름과 작품들을 만나보시길.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율의 시선』은 주인공 안율의 시선을 따라간다. 인간 관계는 수단이자 전략이라며 늘 땅만 보고 걷던 율이 '진짜 친구'의 눈을 바라보기까지. 율의 성장은 외로웠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진심으로 안아주는 데서 시작한다.

돈 없는 대한민국의 초상

GDP 10위권, 1인당 GDP는 3만 달러가 넘는 대한민국에 돈이 없다고? 사실이다. 돈이 없어 안정된 주거를 누리지 못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누구 탓일까? 우리가 만들어온 구조다. 수도권 집중, 낮은 노동 생산성, 능력주의를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선진국에 비해 유독 자영업자의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 왜 대한민국 식당의 절반은 3년 안에 폐업할까? 잘 되는 가게에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장사 콘텐츠 조회수 1위 유튜버 장사 권프로가 알려주는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장사의 기본부터 실천법까지 저자만의 장사 노하우를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