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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이고, 원초적인 파괴의 욕망 - 『드래곤 볼』과『북두의 권』

요즘에는 케이블의 스포츠 채널에서 해주는 격투기에 푹 빠져 있다. K-1은 던지기와 꺾기가 금지된 입식 타격계의 대회이고 프라이드에는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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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케이블의 스포츠 채널에서 해주는 격투기에 푹 빠져 있다. K-1은 던지기와 꺾기가 금지된 입식 타격계의 대회이고 프라이드에는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된다. 킥복싱과 가라데 선수들이 주로 출전하는 K-1은 호쾌한 맛이 있어 즐겨본다. 하지만 최고의 경기를 꼽으라면 역시 프라이드에서 열린 힉슨 그레이시와 다카다 노부히코의 두 번에 걸친 시합이다. 힉슨 그레이시는 <콘데 코마>의 주인공 마에다 미츠요가 브라질에 전파한 유술을 정착시킨 그레이시 유술의 최고수다. 400번을 싸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사내. 프로 레슬러 출신의 다카다 노부히코가 힉슨 그레이시에게 도전하는 형식으로 가진 프라이드 1의 메인 이벤트에서 다카다는 완패를 당한다. 절치부심하며 맹훈련을 쌓은 후 가진 2년 여 후의 재대결에서도 다시 완패. 두 시합에서 힉슨 그레이시가 보여준 그 눈빛과 팽팽한 몸의 긴장,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투철한 정신력은 충분히 감동할 만했다. 인간의 싸움이 의미를 갖는 것은 유일하게 그 순간뿐이다. 어떤 전제나 목적도 없이, 단지 강함만을 추구하며 육체와 육체의 맞대결을 벌이는 것.

격투기를 보고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만화는 『고교철권전 터프』『격투맨 바키』『군계』 등의 심플한 격투물이다. 이 만화의 주인공들은 강해지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무한대로 단련시키고, 강자들과 끊임없이 싸워나간다. 그건 격투가와 무술인의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그들의 싸움은 아주 단순하게 갈려진다. 인생처럼, 승리에 다양한 방법과 층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지 못해도 성공한 인생이 있고, 명예를 얻지 못해도 행복하면 그만일 수가 있다. 인생의 근원적인 승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격투시합에서 승리는 단 하나뿐이다. 누가 매트 위에 더 오래 서 있는가. 오직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힉슨 그레이시는 시합 일정이 잡히면 몇 개월 전에 홀로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산에 들어가 홀로 훈련을 하면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시합에 임한다는 것이다. 힉슨 그레이시는 시합 전에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가 환하게 웃은 것은, 승리한 후 관객들에게 화답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시합은 일종의 종교적인 의식 같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의식. 만약 내가 격투를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반드시 도전해보고 싶었을 것 같다. 이길 수 없더라도, 그가 얼마나 강한지를 반드시 내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을 것 같다. 그런데 격투기 도장으로 달려가기 전에, K-1과 프라이드 경기를 보면서 나는 우습게도 『드래곤 볼』을 떠올리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은 『서유기』를 ‘참조’하여 완벽하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손오공은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7개의 여의주를 모으러 전세계를 떠돌아다닌다. 인민복을 입은 저팔계와 삼장법사 격이라 해야 할 부르마를 만나고, 수많은 괴인과 동물, 외계인은 물론 신까지 만나면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유쾌하고 즐거운 판타지다. 황당한 유머와 적당한 액션, 매력적인 캐릭터 등 만화가 가져야 할 모든 재미를 다 갖추고 있는 게 바로 『드래곤볼』이다. 그런데 『드래곤볼』의 독자들은 2부로 가면서 특유의 재미가 없어졌다고 한다. 1부의 아기자기한 구성과 유머는 사라지고 오로지 싸움만 계속된다는 것이다. 강한 상대와 싸워 이기면 더 강한 적이 등장하고, 다시 더 강한 적이 등장하는 똑같은 순서가 수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피콜로가 등장하고, 베지타가 등장하고, 기계인간들이 등장하고, 부우가 등장하면서 끊임없이 강해지는 악당들과 싸우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스토리가 반복되고, 아들에 손자까지 등장해도 손오공의 매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손오공은 오로지 싸움이 즐거워, 강한 상대와 싸우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기쁨인 인간, 아니 원숭이, 아니 외계인이다. 그것만이 목적이다. 힘이 부족하면, 다시 수련을 해서 이긴다. 손오공은 가장 단순한 격투가의 전형 같은 캐릭터다. 손오공은 복잡하게 선과 악을 넘나들고, 싸움의 의미에 대해서 고뇌하거나 하지 않는다. 손오공의 본질적인 고민은 단 하나, 어떻게 강해질 것인가,이다. 그래서 손오공은 싸움이 즐겁고, 보는 나도 즐겁다.

그렇다면 『북두의 권』은 어떨까. 『북두의 권』은 핵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의 주먹만으로 싸워 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북두신권의 유일한 전승자인 켄시로는 멸망 이후의 타락한 세계를 정화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이다. 뻔한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북두의 권』은 도중에 멈출 수가 없었다. 몇 가지의 이유는 있다. 켄시로 형제의 비극적인 운명, 냉혈한처럼 등장했다가 자신의 비극적인 타락을 고백하며 죽어가는 매력적인 악당들, 북두신권과 남두성권의 화려한 테크닉들을 더 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격투기를 즐겨 보는 것과 똑같다. 서로를 주시하며 발과 주먹을 날리다가, 누군가가 쓰러진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누가 누구보다 강한지 그런 것들을 계속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 멋진 발차기와 한순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관절기들을 보고 싶어진다. 『북두의 권』『드래곤 볼』의 점점 강도를 더해 가는 대결은 그런 욕망을 훌륭하게 충족시켜 준다.
원초적인 싸움을 중심으로 놓고, 거기에 통속적인 에피소드 몇 개만 배치해둬도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 『북두의 권』이 딱 그렇다. 『북두의 권』은 대부분 통속적이고 조잡한 이야기다. 죽음에서 돌아와, 사랑했던 여인을 찾아가지만 이미 그녀는 죽었다. 켄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과거의 벗은 희대의 악당이 되었지만 그 역시 희생자였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이 뻔하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극단적인 사랑은 언제나 가슴 한 구석에 턱 걸린다. 마찬가지다.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파괴의 욕망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북두의 권』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누구나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인 감정을 흔들어댄다. 사랑,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파괴본능을.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격투기에 반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드래곤 볼』『북두의 권』이 일본만화 베스트 10에 자주 꼽히는 이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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