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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으려면 결국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 『무한의 주인』

영원불멸은 인류의 영원한 꿈이다. 굳이 과거로 눈을 돌릴 필요도 없다. 인간복제를 실행했다고 주장하는 클로네이드사는 ‘라엘리안 무브먼트’라는 집단이 운영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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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불멸은 인류의 영원한 꿈이다. 굳이 과거로 눈을 돌릴 필요도 없다. 인간복제를 실행했다고 주장하는 클로네이드사는 ‘라엘리안 무브먼트’라는 집단이 운영하는 곳이다.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외계인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라엘이란 프랑스 사람이 만든 일종의 종교집단이다. 외계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들이 인간을 복제하려는 이유는 영생이다.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의 기억을 옮겨 심으면 영원히 새로운 육체를 거듭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황당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그게 생명을 모독하는 것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과연 영생이란 것이 즐거운 일일까? TV 시리즈까지 나온 <하이랜더>라는 영화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부족 ‘하이랜더’의 이야기다. 이들은 목을 잘리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하이랜더의 목을 자르면 그의 힘은 자신에게 들어온다. 그래서 하이랜더는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된다. 영원한 생명만이 아니라, 가장 강한 힘을 갖기 위해서. 그런데 주인공 하이랜더의 독백을 들어보면 영원히 산다는 게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국은 그녀가 늙어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한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원한 젊음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늙어가고, 죽어서 그를 떠나는 것이다. 뱀파이어를 다룬 작품들에서도 이런 갈등이 나온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에서 래스타트는 영원한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자진하여 관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유폐시키기도 한다. 영원히 살면서, 그들이 이루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 게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영생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 아니면 단지 죽음과 이별이 두려운 것? 어쩌면 죽음이란 것은, 생명에게 주어진 신의 마지막 자비일 수도 있다. 지독한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라면, 때로 죽음은 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무라 히로아키의 『무한의 주인』의 주인공 만지에게는 그런 선물이 주어지지 않는다. 만지에게 영원한 삶이란 결코 행복한 조건이 아니다. 『무한의 주인』은 지독한 슬픔에서 시작한다. 만지는 여동생의 남편을 죽인다. 그것도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여동생은 실성하고, 만지는 실성한 여동생을 데리고 다닌다. 그 와중에 한 할멈이 만지의 몸에 혈선충을 넣어준다. 결코 죽지 않는, 목이 잘리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재생시켜주는 벌레를. 만지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을 이끌고 방랑을 해야 한다. 자신의 업보로 여동생의 남편을 죽이고, 다시 여동생의 죽음을 보고 떠돌아 다녀야 한다.

방랑을 하던 만지는 린을 만난다. 검술 도장의 딸이었던 린은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일도류라고 하는 새로운 유파가의 도장 깨기에 희생당한 것이다. 일도류에게 복수를 다짐하지만, 린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연히 만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린은 그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일도류를 처단해달라고 부탁한다. 『무한의 주인』의 초반은 일도류의 검사들과 대결하는 만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만지는 그리 강하지 않다. 일류인 것은 분명하지만 초절정의 고수는 아니다. 만지는 고수들의 허점과 두려움을 이용한다. 치명상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혹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만지가 툭툭 털고 일어서는 순간, 그들은 흔들린다. 만지는 깨끗한 승부를 하는 게 아니다. 가장 추한 방법으로, 만지는 승리한다. 하지만 승리라는 것도 만지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만지는 『배가본드』의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강해지기 위해서,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것도 아니다. 만지의 싸움은 애초에 무(無)다.

『무한의 주인』은 지독한 허무로 가득 차 있다. 『지뢰진』이 생각날 만큼 암울한 상황이 펼쳐지고, 『북두신권』 못지 않은 폭력이 전개된다. 너무 무거운 『무한의 주인』을 초반에 끌어가는 힘은 명백하게 그림이다. ‘화려하다’라는 말 외에는 덧붙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사무라 히로아키의 그림은 일단 눈을 사로잡는다. 한 페이지를 모두 활용하여 극적인 장면을 아름답게 잡아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도발적인 칸나누기와 컷, 화끈한 콘트라스트와 박력 있는 펜선의 활용도 빼어나다. 그림에 익숙해질 정도가 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도류의 검사를 찾아 싸우며 복수하는 이야기는, 일도류를 둘러싼 음모가 전개되고 만지와 린이 한층 가까워지면서 한층 아기자기해진다. 코믹한 장면들도 많아진다.

일도류는 강해지기 위한 집단이다. 어떤 스승의 검술을 쫓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이 모여 최고를 지향하는 집단. 그들이 도장 깨기를 하는 것은, 단지 형식에 갇혀 진정한 무도(武道)를 잊어버린 자를 응징하기 위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도류의 한바탕 고함에 무수한 도장들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일도류는 그들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도장 깨기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린과 같은 희생자가 생긴다. 그건 일도류를 없애려는 막부의 행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의의 폭력적인 구현은 수많은 희생을 가져온다. 이상한 망나니들도 끼어든다. 자신이 죽인 여인의 얼굴을 어깨에 붙이고 다니는 쿠로이 사바토나 잔인하게 모든 사람을 죽여버리고 만지에게 잘린 팔의 뼈를 무기로 만들어버리는 악독한 사리 같은 인물들. 『무한의 주인』은 다양한 조연들의 형상화에서도 뛰어나다. 일도류를 창시한 아노츠 카게히사, 남편을 죽이고 사형 당하기 직전에 암살자가 된 하쿠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마키에 등의 매력적인 인물들이 전해주는 감흥은 『무한의 주인』을 한층 의미심장하게 만들어준다. 풍성한 인물의 성격은 유려한 그림과 함께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무한의 주인』은 폭력적이다. ‘19세 미만 구독불가’란 딱지가 붙어 있는 것처럼 잔인하고 야한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아노츠나 마키에 같은 존재의 내면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폭력’이 필요하고, 만지의 피투성이 싸움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지는 팔다리가 잘려나가면서도 싸운다. 아니 그러지 않고는 이길 수가 없다. 그게 만지가 살아가는 방법이고,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피투성이가 되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결국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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