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말 잘 듣지 않을 권리
만약 중학교 과학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정미와 함께 손을 내밀지 않을 거다. 어쩌면 용기 내서 말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글ㆍ사진 홍승은(작가)
202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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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추임새인지 말인지 헷갈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지시대로 행동한다. 그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는 주로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었고, 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과 선도부의 얼굴이 되었다. 다른 말은 조금도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주문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는 움직인다.

부모님의 표정이 안 좋으면 조용히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는다. 수업 시간에 배가 아파도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지 못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시험에서 틀린 문제 하나당 손등을 때리는 과학 선생님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손등을 내민다. 교실을 다니면서 귓불을 만지는 변태 국어 선생님의 손길을 피하려고 어깨를 바짝 세워 최대한 귀를 숨긴다. 일렬로 교문을 지키는 선도부 앞을 지나가기 전에는 골목 모퉁이에서 부드러운 체육복 바지를 벗고 뻣뻣한 치마를 입는다.

그때 나는 묻지 못했다. 왜 부모님의 기분에 따라 내 안전이 결정되어야 하죠? 시험 문제 틀려서 속상한 건 난데 내가 왜 맞아야 하죠? 왜 화장실 갈 때 눈치를 봐야 하죠? 우리 몸의 리듬은 다 다른데 왜 모두가 같은 시간에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죠? 게다가 쉬는 시간 화장실은 너무 북적여서 볼일 보기 신경 쓰여요. 선생님, 우리를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저는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쓸리는 치마 대신 부드러운 체육복 바지를 입고 싶어요.

‘만약’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지금은 알고 그때는 몰랐던 권리들을 상상하게 된다. 만약 지금 내 인식 그대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당당하게 의견을 말하겠노라 다짐하지만, 그 말을 뱉은 뒤에 내가 괜찮을지 상상하면 미래는 암울하다. 말을 안 들으면 어떤 식으로든 위협이 따랐을 거였다. 그와 나는 평등하지 않았으니까. 딸이자 학생이라는 역할은 말하기보다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위치이니까.

어떤 관계에서 누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관계의 위계가 보인다. 부모의 말을 듣는 자녀, 교사의 말을 듣는 학생, 사장의 말을 듣는 아르바이트 노동자, 상사의 말을 듣는 부하직원, 대기업의 요구를 듣는 하청업체. 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게 아니어서 역할에 따라 누군가는 한정된 말을 하게 된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위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화에 길들면, 역할을 벗어난 말을 하는 사람은 눈살 찌푸려지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정당한 의견은 반항으로, 배은망덕으로, 튀는 행동으로, ‘감히’로 해석된다. 20대 초반에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의 한 법률사무소에 고용된 바틀비는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가 일을 지시할 때마다 뻣뻣한 대나무처럼 말한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변호사는 부탁에 가까운 태도로 몸을 굽히지만, 바틀비는 굽히지 않는다. 처음 책을 읽을 때, 나는 바틀비가 답답하고 이상했다. ‘적당히 하겠다고 말하면 안 돼? 변호사는 나름 교양 있는 온화한 갑인데 왜 말을 안 듣지?’ 소설 속에서 바틀비는 결국 감옥으로 밀려나 생을 마감한다. 10년 후 다시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대부분의 우리는 변호사가 아니라 바틀비의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는 왜 변호사에게 이입했던 걸까.

문제의 과학 시간에 일어난 일이 떠오른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과학 선생님은 시험을 치른 뒤에 학생들에게 손등을 내밀라고 했다. “너 몇 개 틀렸어?” “두 개요.” 나무 막대로 손등을 두 번 탁탁 내려치는 소리가 들린다. 떨면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친구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조용한 편이어서 말을 섞어본 적 없던 정미였다. “얼른 손 내밀어!” 정미는 대꾸 없이 그대로 서 있었고, 당황한 선생님은 정미를 교무실로 끌고 갔다. 친구들과 나는 어떻게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들을 수 있느냐고 정미를 비난했다. 나는 차마 내가 하지 못 하는 행동을 하는 정미의 모습이 내심 불편했고 사실은 부러웠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숏컷이 동성애를 조장하며 목선이 보이는 묶음 머리는 야하다’는 이유로 학생 두발을 규제해 온 사실이 알려졌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학생인권 침해를 고발하며, 학생인권조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스쿨 미투와 가정폭력 미투를 목격할 때,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는 노동자를 볼 때, 지하철에서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을 볼 때면 나는 정미와 바틀비가 떠오른다. 말 잘 듣는 위치에 있던 존재가 감히 학교와 정상가족, 나아가 사회에 말한다. “그 일은 잘못되었습니다. 더는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상상 속에서 만약으로 미뤄둔 세계를 나는 지금 구체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평등한 세상에서 보장될 다양한 권리 중에는 ‘말 잘 듣지 않을 권리’도 있을 거다. 지시하는 입장과 따라야 하는 입장이 옅어져서 누구나 언제든 거절할 자유가 있고, 불합리한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생계나 안전을 위협받지 않을 안전망도 있을 거다. 그 권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내는 목소리들에 연대하려고 나는 다짐한다. 권리의 언어를 유난이나 반항, 불효 따위로 깎아내리지 않고 작은 목소리에 연대하겠노라고.

만약 중학교 과학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정미와 함께 손을 내밀지 않을 거다. 어쩌면 용기 내서 말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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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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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aqueen

2021.04.13

저는 “쓰~읍!”을 굉장히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해요. 말이 아니라 소리로, 그치만 말보다 더 폭력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 소리로 상대를 누르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작은 목소리들과 연대하는 말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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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작가)

페미니즘 에세이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글쓰기 에세이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등을 썼다. 함께 해방될 수 없다면 내 자유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