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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숨지 않고 말하기

홍승은의 무해한 말들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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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사회가 숨으라고, 너는 너를 믿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내 생각을 믿고 내 몸을 믿고 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2021.03.29)

언스플래쉬

아침마다 책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한다. 하루 만에 쌓인 각종 스팸 메일 사이에서 정확하게 나를 부르는 메일을 발견한다. ‘안녕하세요, 홍승은 작가님.’ 이런 제목의 메일은 대부분 초대장이다. 강연, 글 수업, 유튜브 촬영 등에 나를 초대하는 내용이다. 메일에는 그날의 주제와 일정, 장소와 보수까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정성스러운 초대장 앞에서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나를 믿고 불러준 상대에게 고마운 마음과 숨고 싶은 마음. 선뜻 응하고 싶은데, 어쩐지 나는 자꾸 낡은 통돌이 세탁기 뒤로 숨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짧은 몇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그 장면에는 어떤 장소와 물건, 느낌이 녹아 있다. 낡은 마룻바닥에 앉아 주인집 할머니가 마당에서 화초 가꾸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 바퀴 달린 말 모양의 플라스틱 모형을 타고 골목길을 두 발로 운전하는 나, 할머니 집의 거대한 냉장고 앞에서 식혜를 꺼내 먹어도 될지 망설이는 나, 그런 나를 발견하곤 너는 왜 냉장고 하나 여는 데도 눈치를 보냐고 묻던 외숙모의 얼굴. 그리고 베란다 구석에 있던 통돌이 세탁기 뒤에 숨은 나.

부모님의 지인이 집에 놀러 오면 나는 재빨리 세탁기 뒤에 숨었다. 세탁기 뒤가 깨끗한 곳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안전한 곳이었다는 건 기억할 수 있다. 내 몸은 어두운 그 틈에 쏙 들어가는 크기였고 나는 그곳에서 빨리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은둔은 오래가지 못했다. “승은아, 너 또 세탁기 뒤에 있지? 얼른 나와서 인사드려야지.”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이끌려 쭈뼛쭈뼛 세탁기 뒤에서 걸어 나온다. 앉아 있는 무리 앞에서 나는 시험 보는 기분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다. 어른들은 내 얼굴을 보면서 엄마와 아빠 중 누구를 더 닮았는지, 동생과 비교해서 누가 더 예쁜지 대화한다. 나는 대화의 주체라기보단 화제가 되는 편이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대화 소재로 잘 써먹었는데, 나에 대한 레퍼토리는 이런 것이었다. 승은이는 어릴 때부터 참 순했어요. 기저귀에 똥을 잔뜩 싸도 울지 않고 혼자 놀다가 그대로 잠드는 거예요. 그만큼 착하고 순했어요. 엄마의 말은 주문처럼 마음에 남아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순해졌다.

나는 내가 조용한 아이라고 믿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내 얼굴, 내 몸과 생각.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두려웠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향이 다르듯 타고난 기질의 영향도 있겠지만, 단지 기질의 문제라고 말끔하게 정리하기에는 개운하지 않다. 나는, 어쩌면 우리는 자라는 동안 너 자신을 숨기고 살라는 은근하고 적극적인 압력을 받아왔으니까. 마치 대화의 장에는 끼어 있지만, 배제되었던 그날의 기억처럼 말이다.

학교에 입학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조용히 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은 여자애가 왜 입을 벌리고 웃느냐고 손으로 입을 꼭 가리고 웃으라고 주의를 줬고, 다리는 꼭 오므리고 앉으라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서는 안 된다’ 같은 속담을 배웠다. 체육 시간 달리는 여자애를 가리키며 가슴이 출렁거린다고 웃던 남자애의 말에 몸을 웅크리는 습관이 생겼다. 스무 살에 사귄 애인은 싸울 때마다 “좀 이성적으로 대화할 수 없어? 여자들은 이래서 안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학생 운동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할 때도 분명 같은 내용의 말인데도 나보다 남자 선배의 말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았다. 여자가 시끄럽게 떠든다고 젓가락을 던져 목에 젓가락이 꽂힌 사건을 보았고, 설치는 여자를 벌한다며 범죄를 저지르곤 정의 구현이라고 떠드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여자의 언어는 수다로 폄하되고, 여자의 글은 글이 아닌 사생활로만 읽힌다.

온 사회가 숨으라고, 너는 너를 믿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내 생각을 믿고 내 몸을 믿고 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숨고 싶은 마음이 단지 개인의 성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을 무렵, 나는 더는 숨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안전한 세탁기 뒤에서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겠다고. 세탁기 뒤에 몸을 숨기더라도 내 생각을 또박또박 말하겠노라고.

책장 구석에는 빛바랜 연보라색 표지의 책이 꽂혀있다. 2017년 4월에 나온 내 첫 단행본이다. 표지를 넘기면 서른 살의 내가 고심하며 적은 자기소개가 보인다. 

“내 경험을 말했을 뿐인데, 세상이 딸꾹질했다. 어느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노래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 여성혐오 사회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깊이 밴 자기부정을 극복하기 위해 숨지 않고 말하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다.”

책이 나오고 4년이 흘렀다. 4년 동안 여러 지역과 공간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경험이 쌓이면서 떨림의 강도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미세한 진동은 남아 있다. 중력처럼 나를 당기는 자기 의심과 중력을 거스르겠다는 의지. 그 사이에서 조금씩 나를 드러내는 선택을 한다. 존재를 웅크리게 하는 말이 아닌, 끌어안는 말을 위해 마이크를 잡는다. 내가 아는 말 중 무해한 말을 고르고 골라 입을 뗀다.

오늘 아침 발견한 메일 앞에서 다시 망설이다가 고민을 접고 답장을 보냈다. ‘저를 믿고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분들을 만날지 기대돼요. 곧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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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승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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