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유영입니다. 약속했던 10회째가 되어 저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채널예스 큐레이션을 마칩니다.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이번에는 그동안 추천하지 못했던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짧은 글이지만 나름의 원칙을 몇 개 세우고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첫째, 되도록 동시대 시인의 신간을 소개하자. 둘째, 한 회에서 출판사가 겹치지 않게 하자. 셋째, 되도록 성비를 맞추자. 넷째, 같은 시인을 중복 추천하지 말자. 다섯째, 계절의 성격을 녹이자. 여섯째, 뭐지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요...? 민망해서 더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아무튼,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제 책장을 기웃거리는 한편, 원고료를 손에 쥐고(카드를 쥐고) 서울 혜화동의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매달 오가고, (물론 예스24에서도) 책을 구입하곤 했습니다. 시집을 추천하는 건 시를 추천하는 일과는 또 달라서, 시집을 연달아 몇 회 읽어야 할말도 떠오르곤 하는데, 제 머릿속에 언제나 크게 자리 잡은 시집들을 소개하는 일도 있었지만 신간들은 역시 그렇지 않기에 포인트를 잘 짚지 못한 글도 있었을 것입니다. 양해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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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지 못한 시집들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선 독자들이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작가들을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채널예스에서 오래 활동하시거나 칼럼 연재를 하신 분들. 채널예스의 마스코트 격이셨던 오은 시인이야 이미 너무나 많은 분들이 애독 중이시고요. 또 고명재 시인이 생각나네요. 『우리가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2022)도, 시적인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난다, 2023)도 참 좋아하는 책인데 앞서 채널예스의 필자로 활약하셨던 탓(?)에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김승일 시인도 같은 경우입니다.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신 시기가 저와 겹쳐서 어째 피하게 되었습니다(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하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김승일 시인의 책은 언제나 김승일 시인이 가장 최근에 펴낸 책입니다. 언제나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것, 참 든든하지요. 저는 베드배드북스에서 나온 일명 ‘김승일 시리즈’도 다 갖고 있고 종종 그의 블로그(completecollection.org)에도 들어가 봅니다. 최근 시집은 『항상 조금 추운 극장』(현대문학, 2022)이, 산문집은 아침달에서 펴낸 『지옥보다 더 아래』(2024)가 있어요. 김승일 시인을 생각하면 등단 시기가 비슷한 송승언, 황인찬 시인이 떠오르는데요. 세 사람 모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들이고, 시를 막 읽기 시작할 때는 그들 모두 신인이었으니 지금껏 이들의 글을 쭉 따라 읽어온 꽤 충실한 독자인 셈입니다. 세 사람 중 지난달엔 여름을 빌미로 황인찬 시인 추천에 성공했네요. 송승언 시인의 신간도 엄청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쯤 나올지 궁금합니다. 아까 좀 하기 싫은 독서를 하다가 그의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를 꺼내 읽었습니다. 「녹음된 천사」를 읽으니 속이 뻥 뚫렸어요. 첫 시집의 첫 시입니다.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녹음된 천사」 부분, 『철과 오크』 9쪽)
10년 전, 이십 대 시인의 시에서 꾹꾹 눌러 잠근 에고를 읽습니다. 고백하자면 최근 저는 시 읽기에 좀 지친 상태입니다. 체한 상태라고나 할까요. 많이 먹었으니 동면하는 곰처럼 굴을 깊게 파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만 읽으면서 잠도 자고 꿈도 꾸고 싶어요. 저도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훨씬 많고 많습니다. 당연히 좋아하는 책보다 싫어하는 책이 훨씬 많지요. 그러니 싫은 점을 말하기보다 좋은 점 말하기가 저에겐 늘 고역입니다. 채널예스에서의 연재는 제게 좋은 것이 왜, 어떻게 좋은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글의 폭주가 어떻게 읽힐지 걱정이 되어 갑자기 감사 말씀 올려봅니다.
또 제가 참여한 시리즈물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난다출판사에서 만들고 있는 ‘시의적절’ 시리즈인데요. 매달에 한 권의 책을 펴내는 무지막지한 프로젝트입니다. 장르는 ‘시산문집’으로, 시 또는 일기, 메모, 편지를 아우르는 다양한 산문을 매일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2024년 10월의 책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로 참여했고요, 제 책을 추천하려던 건 정말로 아닙니다…… 2024년 연말에 열린, 말하자면 ‘결산’ 북토크에서 12권의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는 물음에 저는 1월의 책 『읽을, 거리』(김민정)와 6월 책 『좋음과 싫음 사이』(서효인)라고 답한 기억이 납니다. 유연한 온화함보다는 빳빳한 모서리 쪽을 선호하는 취향 탓입니다. 물론 두 시인의 팬이기도 한데, 서효인 시인의 『여수』(문학과지성사, 2017)를 채널예스에 소개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올해의 시의적절로 말하자면…… 제가 뭘 꼽을 입장은 못 되고 최애시인 중 한 사람인 백은선 시인의 8월 책 『뾰』가 출간되었으니 이 책의 시를 조금 소개드릴게요.
있잖아, 어두운 터널을 건너본 적 있어?
귀가 흠뻑 젖을 때까지
속력과 명암을 견디며
나는 있다
스스로의 이름을 잊어버릴 때까지
건넌 적
뾰
입술을 꿰매주는 가게를 찾느라
세계에서 단 한곳
간판도 없고 주소도 없는
운이 좋으면 서비스로 귀를 닫는 시술을 해주기도 한다지
연필처럼
외로워질 수 있다고
옛 애인이 얘기해준 적 있어
뾰뾰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돌고래
사랑하는 모든 것
종탑에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어
사랑 자유 박애 평등
넓은 등에 손가락으로 쓴 편지
천천히 걸어들어가
눈치채지 못하게
섞이는 거야
군중 속으로
뾰
뾰
뾰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섬과 바다
사랑스러운 돌고래들
몇 년이나 헤매고 나서 찾았어
입과 귀의 모든 것
위로는 젬병이라 차라리
잘라버리고 싶었던 것들
남은 평생 단 하나의 단어만 말할 수 있다면
뭘 선택할래?
언젠가 네가 물었고
난 눈을 감은 채
응
하고 답했지
응
(「뾰」 부분, 『뾰』 192-195쪽)
“뾰” 하고 발음해보았습니다. “뾰뾰” 하고도요. 이 뾰족하고 연약하고 예쁘고 과격한 글자. 백은선 시인 아니고선 누가 지을 제목일지요. 여러분도 꼭 소리내어 발음해보세요.
김소연 시인의 『생활체육과 시』(아침달, 2024)는 새해에 가장 힘이 되었던 책이었던 바람에 일기에 독후감 비슷한 걸 조금 썼고, 그 일기를 잡지(『문학과 사회』 149호 하이픈)에 발표하게 되어 채널예스 독자들께 소개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잡지에 실었던 일기의 편집하지 않은 원문을 아래에 일부 옮겨봅니다.
2025. 1. 4. 토요일
아점: 요거트, 복숭아 통조림, 바나나.
저녁: 만둣국, 김치, 햇반.
새해의 첫 책은 김소연 시인의 『생활체육과 시』(아침달, 2024). 2024년 혜화동 위트앤시니컬에 마지막으로 간 날, 그러니까 김복희 시인의 낭독회 간 날 집어왔다. 유희경 시인의 『사진과 시』, 서효인 시인의 『이웃과 시』 사이에 출간된 아침달의 일상시화 시리즈. 연말에 소파에 누워 불량한 자세와 태도로 읽다가(술 마심) 세 번째 장의 몇 페이지 읽고 얼른 책을 덮어 버렸다. 그날 새로 사본 술이 너무 맛이 없어 반병쯤 마시다 포기하고 전부 버린 일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읽기가 아까워서 새해까지 아껴뒀다가 어제 다 읽음.
시에겐 공포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공포를 공포라고 호명하기를 멈추어보기. 공포의 뒤통수와 손아귀와 손가락 끝의 지문까지 샅샅이 탐구하기. 공포를 견디는 게 아니라 공포를 추적하기. 공포가 깃든 영혼이 종내에는 어떻게 아름다움이 되는지 그 편에 서서 상상하기. 시는 그리하여 유령이 된 채로 유령과 어깨동무를 하려는 마음으로 기꺼이 옮겨간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71쪽)
여리디여린 감수성을 낱낱이 기억해 자주 세세히 돌보기. 추억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을 기억하는 기술로써 지난 경험들을 만끽하며 지내기. 지난날의 좌절과 좌초의 고통들을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얇디얇게 저며놓음으로써, 흔들리는 현재의 기우뚱한 면에 괴어 균형을 잡기. 그렇게 하여 현재를 바로잡기. 나는 이것이 기억술이라고 믿고 있다. 시의 기술이라고도 여긴다. 그리하여 윤리에게 시를 적용해보는 방식이 아닌 시에서부터 새로운 곁가지의 윤리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한다. (76쪽)
우리는 추운 날 검은 외투를 입고 길가에 서 있다. 삭풍에 얼굴이 마비되는 듯하다. 나는 튼 입술을 열심히 오므려가며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다. 시인은 마치 겨울로부터 나타난 사람처럼 곧다. 시인을 생각하면 겨울이, 무엇보다 그의 외투가 생각난다. 아주 단정하고 깨끗한 겨울 외투. 곱게 솔질 되어 여름 동안 서늘한 옷장 속에 보관되었을 포근한 코트. 코트 카라와 어깨와 소매 끝이 단호하다. 나도 입어 보고 싶지만 내 손에 들어오면 금세 추레해질 것이다. 가질 순 없지만 매무새를 가다듬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아름다움이다. 책을 읽는 도중에도 얼른 글을 쓰고 싶었지만 동시에 계속 읽고 싶었다. 그런 이상한 동력을 받아 결국 조금 썼다. 이렇게 되었으니 한동안은 좀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쓰게 되리라.
맨 마지막의 「후기」까지 완벽함. 아, 좋아. 좋은 글은 정말로 몸에 좋다.
일기를 옮기다보니 올해 가장 좋았던 시집 중 하나인 김복희 시인의 『보조 영혼』(문학과지성사, 2025)을 소개하지 못한 게…… 분명 사정이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사랑을 참지 않고 소개합니다. 시를 좋아하는, 시를 쓰는 모두와 함께 읽고 싶은 이 시는 책의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시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달달 외고 다니고 싶은 시입니다.
손들이 나타내는 말을 한 번 살펴봐.
주머니만 보고 손들이 하는 말을 고민해봐.
큰 나무뿌리의 들뜸을
악의로 읽지 않기.
갑자기 오는 비를
징조나 선언으로 여기지 않기.
비가 흐르는 도로를
물개들이 헤엄치는 해안이라고 말하지 않기.
모두가
모든 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모두라는 개념에서
빠져나오기.
밤이 온다
잠이 온다
비가 온다
는 표현이
표현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네가 주머니에 새로운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달라지는 말들.
주머니를 달랠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미래의 시인에게」 부분, 『보조 영혼』 125-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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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장 멋진 이유로 소개할 수 없었던 시집은 김언희 시인의 『호랑말코』(문학과지성사, 2025) 아닐까 싶습니다. 비속어가 너무 많다! 농담입니다. “이 시집은 독자를 선택할 것이다. 저의 맞수, 저의 짝을.” 시집 뒤표지의 글이지요. 이 책을 함께 소개할 맞수를, 정확히는 이 ‘맞수’들을 한 테마로 묶어낼 재간이 제게 부족해 포기했었지요. 오늘은 제마음대로니까, 그래도 욕이 한마디도 없는 시로 전해봅니다.
나는 방인가, 빈방인가, 냉골인가, 냉기가 뼈에 사무치는 방, 얼음장 같은 방바닥인가, 등이 쩍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방바닥인가, 등짝에 얼어붙은 채 진종일 떨어지지 않는 그 얼음장인가,
나는 방인가, 누군가 도끼로 내리찍는 방바닥인가, 이 방바닥에 빠져 죽은 누가 있다고, 방바닥 아래 떠돌고 있다고, 방바닥을 정수리로 쿵쿵 들이박고 있다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두드리고 있다고, 도끼를 들고 내리찍고있는 그 방바닥인가,
나는 방인가, 미쳐서 숟가락으로 우물을 파던, 숟가락으로 방바닥을 파던 자의 방인가, 물이 아닌 불이 솟을 때까지 숟가락으로 파 내려가던 그 방바닥인가, 창문을 두고 방문을 두고 기어이 방바닥을 뚫고 달아난 그 방인가,
나는 방인가, 불을 끄면 시커먼 미역 숲이 길길이 우거지는 방, 키를 넘기는 미역 숲을 홀로 헤매는 자의 방인가, 머리카락 한 올로도 건져 올려질 누가 여기 있다고,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는, 빠져 죽기라도 할 듯이 내려나 내려다 내려다보고 있는 그 방바닥인가,
나는 방인가, 아침이면 누군가 자박자박 걸어 나가는 방인가, 빠져 죽은 곳에서 걸어 나오는 물귀신처럼. 저녁이면 차박차박 걸어 들어오는 그 방인가, 빠져 죽은 곳으로 돌아오는 물귀신처럼. 나는 그 방인가, 젖은 방바닥인가,
(「그 방」, 『호랑말코』 50-51쪽)
『미친, 사랑의 노래―김언희의 시를 둘러싼 (유사)비평들』(밀사 외, 현실문화, 2024)에 실린 대담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깊이 뚫고 지나간 바늘에는 피가 묻어 있다. 독자는 그 피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독자는) 손끝으로 썼는지 내장으로 썼는지 금방 안다구요” 라고요. 그 피 냄새를 기꺼이 킁킁거리며 가까이 가봅니다. 펼치는 페이지마다 허겁지겁 퍼먹기 바빠집니다. 정말이라니까요. 좋은 시는 정말로 몸에 좋습니다. 컨디션에 따라 읽는 책을 바꿔보세요. 시는 길이도 짧고 효과가 강력하답니다.
평소 쓰는 SNS 계정에 아주 쓰잘데기 없는 것은 잘도 올리면서 책에 대한 포스트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사실 누굴 만나 책이나 작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항상 시와 시인에 대한 사랑이 제 마음속에 늘 있다는 걸 이 지면을 빌어 확인해온 듯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는 역시 저를 쓰게 하는 시입니다. 밑줄을 그을 연필을 뻗어 찾게 하는 시. 읽고 나면 얼굴이 따뜻해지는 시. 몸에 좋은 시. 피 냄새 나는 시. 저도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마음에 드는 시 써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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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출판사 | 문학동네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출판사 | 난다
항상 조금 추운 극장
출판사 | 현대문학
지옥보다 더 아래
출판사 | 아침달
철과 오크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
출판사 | 난다
읽을, 거리
출판사 | 난다
좋음과 싫음 사이
출판사 | 난다
여수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뾰
출판사 | 난다
생활체육과 시
출판사 | 아침달
보조 영혼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호랑말코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미친, 사랑의 노래
출판사 | 현실문화

임유영 (시인)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믈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