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친구나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낼 때 그림으로 보내본 것이 시작점이었어요. 그림으로 보낸 이유는 그냥 그 순간에 그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는데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처음 그림을 그릴 땐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주로 그렸는데 나중엔 떠오르는 이미지, 내 생각들, 이런 걸 자꾸 표현하게 되었어요. 가족과 지인의 반응들이 좋아서 그림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자기들만 보기 아깝다고 해서 이렇게 책 출간으로까지 이어졌어요. 책에 실린 그림은 스마트폰에 있는 그림 그리기 기능을 이용해서 그렸어요. 이 서툰 그림이 책으로 나왔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는데요.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림에 대해 비판하더라도 그냥 내 그림이 책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워요. 그동안에도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에요.
지구
저는 누워서 공상에 잠기는 걸 참 좋아해요.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걸 참 좋아하죠. 그러고 있을 때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지구를 등에 지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해요. “지구를 등에 지고 호흡 운동, 폐 운동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얼마나 힘든 줄 아니?”라고 말하곤 했는데요. 어느 날 한 친구가 “지구를 등에 지고 우주를 바라보고 있구나”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는데, 너무 그 말이 예쁜 거예요. 전 ‘빈둥거림’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바쁜 일상에서 공상에 잠기고 생각의 흐름을 쫓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으로 표현해보게 됐어요.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하면 지구를 등에 지는 것과 같잖아요. 어떤 사람이 이 그림을 보고 답글로 “물구나무를 서면 지구를 들고 있는 거고, 옆으로 누우면 지구랑 나란히 걷는 거고, 팔짝 뛰면 지구와 느낌표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 같아요.
4
우리의 언어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밖에 안돼요. 나머지 80%는 보디랭귀지를 포함한 비언어적인 형태로 전달돼요. 말은 사실 거짓말을 하기 위해 발달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보디랭귀지는 속일 수가 없거든요. 환자들과 이야기할 때 환자들이 ‘저는 아무 문제 없어요. 행복해요.’라고 말하는데 표정이 어둡다든지, 긴장되어 있다든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환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파악해요. 외국에 가서도 언어가 전혀 안 통해도 보디랭귀지도 다 통하잖아요. 보디랭귀지가 소통에 있어 그만큼 중요하단 뜻이죠.
제주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제목은 ‘제주에서’. 파킨슨병을 앓고 요양을 위해 제주에 내려가 있을 때 봤던 함덕바다의 색을 잊지 못해서 그린 그림이죠. 이 그림을 보면서 ‘아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네’, 생각했어요. (웃음)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생활 속의 유머’에요. 다들 그림을 보자마자 표현이 너무 재미있다고 많이 웃더라고요.
텔레
텔리토비 그림은, 수술을 앞두고 그린 그림이에요. 지인에게 수술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걸 장난처럼 그려서 전해본 거에요. “당신은 앞으로 텔레토비와 놀게 될 거예요”라는 말을 하며 5분 만에 쓱쓱 그렸는데 그때 마음은 아마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수술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내 안에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수술하면 난 텔레토비가 된다는 식으로 그냥 좀 편안하게 생각해봤어요.
황혼
그림을 그리면서 일상생활에서 순간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깊어졌어요. 저는 그림을 참 좋아하는데,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이에요. 고흐의 그 그림은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고흐의 손을 통해 새로 창조된 거거든요. 사람들은 내가 정신분석가이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 화가의 심리가 보이냐고 묻곤 하는데 전 그림을 보며 병리를 분석하진 않아요. 예술 그 자체로 감상하려고 노력해요.
뿌리
모든 예술은 순간을 잡아서 표현한 거라고 생각해요. 음악이든 미술이든 시든 모두 그 순간에 자기 마음에 쌓여 있던 영감이나 이미지나 생각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들도 순간순간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예술가는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아닐까요? 순간순간을 충분히 느끼면서 사는 게 후회 없는 삶인 것 같아요.
의자
의자 위에 앉아서 잠시 쉬고 싶은 세상의 모든 여행객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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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는 것김혜남 저 | 가나출판사
앞으로 병이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살고자 한다”고 말하는 저자가 악화된 병세로 사회와 단절된 후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리며 세상과 소통한 기록이다.
엄지혜
eumji01@naver.com
iuiu22
2017.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