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반년 넘게 수전 손택의 글을 번역하고 있다. 1960년대에 쓴 글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2003년의 인터뷰까지 다양한 글을 번역하면서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경탄한다. 어떤 글은 그저 전율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사진에 관하여』(1977)의 이런 부분.
사진가들이 고갈된 현실 감각을 되살리려고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현실은 더욱 고갈된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감각은 카메라가 찰나의 순간을 ‘고정’하는 수단을 제공한 이래로 우리를 더욱 심하게 압박한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이미지를 소비한다. 카메라가 신체의 겉껍질을 소모시킨다는 발자크의 생각대로 이미지는 현실을 소모한다. 카메라는 해독제이자 질병이다. 현실을 소유하는 수단인 동시에 현실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놀랍게도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에 쓴 글이다. 모든 사람이 늘 손에 카메라를 들고 지내는 오늘날에는 이 통찰이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카메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사람들이 무지한 탓에 사진을 찍으면 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해서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 보면 실제로 혼이 다른 곳에 저장되는 느낌이 든다. ‘사진을 남긴다’에 집중하면 실제 감각의 경험은 언제나 지연되고 생기를 잃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경험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자동보정이 되는 AI 카메라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결함 없고 늙지 않는 다른 자아를 디지털 세상에 보존한다. 현실을 대체한 이미지의 세계가 견고해지면서 현실은 점점 낡고 초라해진다. 현실의 감각과 경험은 묽고 흐릿해지고 그럴 때 우리는 다시 또 사진을 찍어 찰나의 짜릿함을 고정할 수밖에 없다.
다와다 요코 방한 행사 때문에 국내에 출간된 다와다 요코 책을 거의 다 (다시) 읽었다. 다와다 요코는 산문을 주로 쓰지만 언어의 물질성에 민감한 시인의 자아와 언어 사이의 경계와 뒤섞임에 민감한 번역가의 자아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기계 글쓰기가 만연하는 이 시대에 (인간의, 예측할 수 없는, 문학적인) 글쓰기의 유일한 가능성은 언어와 언어가 겹치고 교환되는 번역 과정에서 비스듬히 일어나는 ‘언어의 일탈’인지 모른다. 다와다 요코는 “글쓰기는 원전 없는 번역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꽤 여러 작품이 번역되었는데 『글자를 옮기는 사람』, 『영혼 없는 작가』, 『목욕탕』이 특히 좋았고 오비디우스와 미쿠라노소시의 결합이라는 Opium für Ovid는 번역되길 간절히 기다리는 책이다.
이 작가는 정말 영업하기 힘들다. 찾아보니 국내에 다섯 권이 번역 출간되었는데 거의 다 절판 상태이다. 다섯 권을 소개했으니 ‘충분히 기회를 줬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적어도 (내가 살펴본) 한 권은 번역 문제가 있었다. 길이와 장황한 글쓰기 방식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면도 있다. 2022년에 나온 걸작 Shrines of Gaiety는 450쪽이었다. 요새 나는 2024년 작 탐정소설 Death at the Sign of the Rook을 읽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끝도 없이 잡다하고 사소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속도감 있는 탐정소설을 기대하는 사람은 벌써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케이트 앳킨슨을 읽는 것은 정말 순수한 기쁨이다.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나도 되고 어쩌면 범인을 못 잡아도 나는 만족할지 모른다.
《Storyteller》 | 게임
Daniel Benmergui, Annapurna Interactive
주어진 캐릭터와 장면을 만화 패널에 적절히 배치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퍼즐 게임이다. 이야기의 요소를 어느 칸에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주어진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완성하면 성공이다. 전래동화, 탐정소설, 호러, 궁중암투극, 에드가 앨런 포 등 여러 장르의 관습을 이용하는데 나중에는 이 장르들이 뒤섞이면서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를 전부 완성하면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천재적인 게임이라고 할 밖에. 우리 애들도 좋아하니까 남(애들)녀(나)노(나)소(애들) 모두 즐기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iOS, Android 용도 있고 넷플릭스 회원은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
야구
야구를 좋아한다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렵다. 좋아하기만 한다면 보면서 그렇게 화를 내고 욕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은 끊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고. 하지만, 1983년 MBC청룡 어린이회원일 때부터 20년 넘는 기간 동안, 때로는 관심을 둘 때도 있었고 관심이 거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늘 그동안 삶의 어딘가에는 한국프로야구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기억, 그 시간의 무게 때문에 중력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야구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작은 공이 그리는 선이다. 언더핸드 투수의 공이 그리는 불가능한 궤적. 643 병살의 정확한 직선 연결의 고전미. 담장을 넘어가는 공의 우아한 아치.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목욕탕
출판사 | 책읽는수요일
글자를 옮기는 사람
출판사 | workroom
Shrines of Gaiety
출판사 | Transworld
Death at the Sign of the Rook
출판사 | Transworld Publishers Ltd

홍한별
클레어 키건, 가즈오 이시구로, 애나 번스, 데버라 리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앨리스 오스월드, 조앤 디디온, 리베카 솔닛 등의 책을 옮겼고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 『돌봄과 작업』(공저) 등을 썼다.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돌돌12
202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