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한별 작가의 책장
홍한별 작가가 요즘 애정하는 수전 손택, 다와다 요코, 케이트 앳킨슨, 《Storyteller》, 야구.
글 : 홍한별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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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작년부터 반년 넘게 수전 손택의 글을 번역하고 있다. 1960년대에 쓴 글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2003년의 인터뷰까지 다양한 글을 번역하면서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경탄한다. 어떤 글은 그저 전율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사진에 관하여』(1977)의 이런 부분.

 

사진가들이 고갈된 현실 감각을 되살리려고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현실은 더욱 고갈된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감각은 카메라가 찰나의 순간을 ‘고정’하는 수단을 제공한 이래로 우리를 더욱 심하게 압박한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이미지를 소비한다. 카메라가 신체의 겉껍질을 소모시킨다는 발자크의 생각대로 이미지는 현실을 소모한다. 카메라는 해독제이자 질병이다. 현실을 소유하는 수단인 동시에 현실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놀랍게도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에 쓴 글이다. 모든 사람이 늘 손에 카메라를 들고 지내는 오늘날에는 이 통찰이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카메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사람들이 무지한 탓에 사진을 찍으면 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해서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 보면 실제로 혼이 다른 곳에 저장되는 느낌이 든다. ‘사진을 남긴다’에 집중하면 실제 감각의 경험은 언제나 지연되고 생기를 잃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경험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자동보정이 되는 AI 카메라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결함 없고 늙지 않는 다른 자아를 디지털 세상에 보존한다. 현실을 대체한 이미지의 세계가 견고해지면서 현실은 점점 낡고 초라해진다. 현실의 감각과 경험은 묽고 흐릿해지고 그럴 때 우리는 다시 또 사진을 찍어 찰나의 짜릿함을 고정할 수밖에 없다. 


 


다와다 요코


다와다 요코 방한 행사 때문에 국내에 출간된 다와다 요코 책을 거의 다 (다시) 읽었다. 다와다 요코는 산문을 주로 쓰지만 언어의 물질성에 민감한 시인의 자아와 언어 사이의 경계와 뒤섞임에 민감한 번역가의 자아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기계 글쓰기가 만연하는 이 시대에 (인간의, 예측할 수 없는, 문학적인) 글쓰기의 유일한 가능성은 언어와 언어가 겹치고 교환되는 번역 과정에서 비스듬히 일어나는 ‘언어의 일탈’인지 모른다. 다와다 요코는 “글쓰기는 원전 없는 번역처럼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꽤 여러 작품이 번역되었는데 『글자를 옮기는 사람』, 『영혼 없는 작가』, 『목욕탕』이 특히 좋았고 오비디우스와 미쿠라노소시의 결합이라는 Opium für Ovid는 번역되길 간절히 기다리는 책이다.



 

케이트 앳킨슨


이 작가는 정말 영업하기 힘들다. 찾아보니 국내에 다섯 권이 번역 출간되었는데 거의 다 절판 상태이다. 다섯 권을 소개했으니 ‘충분히 기회를 줬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적어도 (내가 살펴본) 한 권은 번역 문제가 있었다. 길이와 장황한 글쓰기 방식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면도 있다. 2022년에 나온 걸작 Shrines of Gaiety는 450쪽이었다. 요새 나는 2024년 작 탐정소설 Death at the Sign of the Rook을 읽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끝도 없이 잡다하고 사소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속도감 있는 탐정소설을 기대하는 사람은 벌써 나가떨어졌을 테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케이트 앳킨슨을 읽는 것은 정말 순수한 기쁨이다.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나도 되고 어쩌면 범인을 못 잡아도 나는 만족할지 모른다. 

 



《Storyteller》 | 게임

Daniel Benmergui, Annapurna Interactive


주어진 캐릭터와 장면을 만화 패널에 적절히 배치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퍼즐 게임이다. 이야기의 요소를 어느 칸에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주어진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완성하면 성공이다. 전래동화, 탐정소설, 호러, 궁중암투극, 에드가 앨런 포 등 여러 장르의 관습을 이용하는데 나중에는 이 장르들이 뒤섞이면서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를 전부 완성하면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천재적인 게임이라고 할 밖에. 우리 애들도 좋아하니까 남(애들)녀(나)노(나)소(애들) 모두 즐기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iOS, Android 용도 있고 넷플릭스 회원은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


 


야구


야구를 좋아한다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렵다. 좋아하기만 한다면 보면서 그렇게 화를 내고 욕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은 끊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고. 하지만, 1983년 MBC청룡 어린이회원일 때부터 20년 넘는 기간 동안, 때로는 관심을 둘 때도 있었고 관심이 거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늘 그동안 삶의 어딘가에는 한국프로야구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기억, 그 시간의 무게 때문에 중력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야구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작은 공이 그리는 선이다. 언더핸드 투수의 공이 그리는 불가능한 궤적. 643 병살의 정확한 직선 연결의 고전미. 담장을 넘어가는 공의 우아한 아치.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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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돌12

2025.05.12

"야구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작은 공이 그리는 선이다." 작가님(번역가님) 책의 문장들 만큼이나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구기경기 중에서는 유일하게 공이 아닌 사람이 점수의 기준이 되는 스포츠, 그렇기에 가장 인본주의적스포츠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요. 팬들에게 주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욱 공감 가는 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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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다와다 요코> 저/<최윤영> 역

출판사 | 책읽는수요일

글자를 옮기는 사람

<다와다 요코> 저/<유라주> 역

출판사 | workroom

Shrines of Gaiety

<Kate Atkinson>

출판사 | Transworld

Death at the Sign of the Rook

Atkinson, Kate

출판사 | Transworld Publishers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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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한별

클레어 키건, 가즈오 이시구로, 애나 번스, 데버라 리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앨리스 오스월드, 조앤 디디온, 리베카 솔닛 등의 책을 옮겼고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 『돌봄과 작업』(공저) 등을 썼다.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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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로 1933년 1월 뉴욕에서 태어났다. 첫 소설 『은인The Benefactor』(1963)과 에세이 「‘캠프’에 대한 단상Notes on 'Camp'」(1964)을 발표하면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6년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에 반기를 들며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그 뒤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한 손택은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이자 ‘뉴욕 지성계의 여왕’, 그리고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미국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섰다. 미국 펜클럽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1987~1989)에는 한국을 방문해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했고,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 현장에 가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도 아낌없이 보여 줬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사진에 관하여』(1977)와 ‘전미도서상’ 소설 부분 수상작인 『인 아메리카』(1999)를 비롯해 네 권의 평론집과 여섯 권의 소설, 네 권의 에세이, 네 편의 영화 시나리오와 두 편의 희곡이 있으며 현재 3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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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독일 베를린에 살면서 독일어와 일본어로 소설, 시, 희곡, 산문을 쓰는 작가다. 196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82년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로 이주했다. 1990년 독일 함부르크 대학 대학원에서 독문학 석사 학위를, 2000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홀로 독일로 건너갔던 열아홉 살의 경험은 삶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기나긴 기차 여행 동안 물을 갈아 마시며 서서히 낯선 세계에 가까워진 그녀는 독일에 도착하여 전혀 알지 못했던 언어를 새로 익히면서 그때까지 알았던 세상과 사물을 송두리째 다시 보는 전율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언어’ 자체에 천착하도록 했고, 언어가 지닌 ‘매체’로서의 불안한 혹은 불편한 속성은 다와다 문학의 일관된 주제가 되었다. 다와다에 따르면 언어는 자아와 세계를 매개하는데,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하다가 새로운 언어를 새로운 매개로서 사용할 때 비로소 우리가 이 언어(매개)를 통해 생각하고 발화해 왔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머릿속에서 아무런 성찰의 과정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은 세계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므로, 그녀는 이에 안주하려는 인식의 자동화에 제동을 걸고 세상의 잊히고 버려진 또 다른 측면을 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보고자 부단한 문학적 시도를 아끼지 않는다. 1987년 시집 『네가 있는 곳에만 아무것도 없다』로 데뷔했는데, 일본어로 쓰인 시가 번역되어 책에 일본어와 독일어가 나란히 실렸다. 이듬해 독일어로 처음 쓴 단편소설 『유럽이 시작하는 곳』이 출간되었고, 1991년에는 일본어로 쓴 단편 「발뒤꿈치를 잃고서」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받았다. 다와다 요코는 독일에서 샤미소상, 괴테 메달, 클라이스트상 등을, 일본에서 아쿠타가와상, 이즈미 교카상,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요미우리 문학상 등을 받는 한편 독일 문학을 공부해 1990년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2000년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작가가 30여 년간 쓴 작품은 약 30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1천 회 이상 낭독회가 열렸다. 작품으로 『눈 속의 에튀드』, 『여행하는 말들』, 『헌등사』, 『용의자의 야간열차』, 『영혼 없는 작가』, 『목욕탕』,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다. 그 밖에 중편집 『세 사람의 관계』, 『개 신랑 들이기』, 단편집 『고트하르트 철도』, 『데이지꽃 차의 경우』, 『구형 시간』, 장편소설 『벌거벗은 눈의 여행』, 『보르도의 친척』, 『수녀와 큐피드의 활』, 『뜬구름 잡는 이야기』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3부작 중 『지구에 아로새겨진』과 『별빛이 아련하게 비치는』, 시집 『아직 미래』 등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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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앳킨슨

1951년 요크에서 태어나 던디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을 쓰다 가 1995년 첫 소설 『박물관의 뒤 풍경』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휫브레드상(현 코스타상) ‘올해의 책’ 부문에서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살만 루슈디를 제치고 수상하여 더욱 화제가 되었던 이 소설은 [옵서버]가 선정한 ‘최고의 영국 소설(1980~2005)’ 후보작에 올랐고, TV 시리즈와 연극으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 1997년에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00년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마주하게 된 소녀 이소벨의 이야기를 그린 『인간 크로케』를 발표, “영문학의 풍경에 새로운 색채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쇠락해가는 한 가문의 연대기이자 미스터리이며 십 대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한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내 소설 가운데 가장 어두운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희곡 [유기(Abandonment)](2000), 단편집 『세상의 끝이 아닌(Not the End of the World)』(2002), 『케임브리지 살인 사건』 외 총 네 권으로 구성된 ‘잭슨 브로디 시리즈’(2004~2010) 등 다양한 작품을 썼고, 2013년에는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로, 2015년에는 『폐허 속의 신』으로 각각 코스타상을 수상하며 3회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또 한 2011년에는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 이 수여하는 대영제국 훈작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