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이었을 것이다. 서울패션위크의 개최장소가 코엑스(Coex) 전시홀 에서 학여울역의 세텍(Setec)으로 바뀌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텍은 컨벤션을 개최하기에는 훌륭한 장소지만 사실 '패션'과는 거리가 먼 거대하고 멋없는 건축물이었다. 주변에는 전시장 말고는 제대로 된 숍이나 식당, 카페 등 핫 스팟이 없어서 쇼와 쇼 사이 시간이 비는 관람객들은 공터를 어정대며 시답잖은 수다로 시간을 때웠다. 외국에서 온 바이어들은 황량한 학여울역을 배회하다 쇼가 끝나면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인 강남 리베라호텔로 향했다. 서울패션위크가 끝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그들은 서울을 얼마나 재미 없는 도시로 기억할까 생각하니 몹시 우울해졌다.
세월이 흘렀다. 서울패션위크는 그간 용산전쟁기념관, 여의도 IFC몰, 한남동 블루스퀘어 등을 거쳤고 조금씩 진화했다. 2014년 봄, DDP의 개관과 더불어 드디어 동대문에 둥지를 틀었다.
2014 FW 서울패션위크 첫 날, 패션쇼가 열리는 알림1관을 찾지 못해, 쇼 시작 1분 전에 도착해서 비명을 지르며 착석하던 관객과 프레스들의 상기된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괴물 같은 건물은 뭐야! 구조가 미로라고!"
"내가 있는 위치를 설명하라는데 그것도 모르겠더라고! 어휴, 삼십 분 이상 헤맸네."
투덜거리는 소리 끝에 불은 꺼졌고, 신진 디자이너 권문수의 옷 스무 벌이 발표되었다. DDP에서는 다섯 번의 서울패션위크가 개최되었고 훌륭한 행사장으로 자리잡아 이제는 여섯 번째 잔치를 앞두고 있다. 10월 17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되는 이 행사는 41회의 디자이너 패션쇼와 6회의 기업 패션쇼로 진행된다.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면, 외국 바이어들과 프레스들의 참여다. 맨 앞줄, 지정석의 네임태그를 보면 눈을 의심할 만큼 면면이 화려하다. 도쿄, 상해는 물론, 뉴욕, 런던, 파리, 밀라노에서 날아온 화려한 패션피플들의 소속과 이름이 붙어있고, 쇼가 시작되기 직전 어김없이 그 자리들은 꽉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런 패션쇼는 패션계 종사자들만의 축제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패션뿐 아니라 트렌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해서 쇼와 부대행사를 마음껏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요즘의 서울패션위크는 특히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고, 또 참여하는 사람의 눈높이를 높여주는 지침서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패션이 사치가 아닌 생활로 정착된 현재는 더더욱 그렇다. 일년에 단 두번 있는 패션위크를 위해, 일년을 산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디자이너들은 이 무대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한다.
부부 디자이너로 유명한 앤디엔뎁은 몇 년 전 여행을 주제로 한 쇼를 위해 거대 모형 비행기를 무대 위로 끌어 왔을 만큼 완성도 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나영과 고현정 등 스타군단을 이끌고 있는 디자이너 지춘희의 미스지컬렉션은 패션에디터들도 서두르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티켓이 일찍 동이 난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무대도 치열하다. 패션업계의 GD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스타급 디자이너 고태용의 비욘드클로젯, 한국의 스텔라매카트니로 불리우는 송자인의 자인송, 미스코리아 진 출신으로 유명한 뉴욕 파슨스 출신의 디자이너 이지선의 제이어퍼스트로피, 젊은 디자이너답게 참신한 시도를 통해 두터운 팬 층을 보유한 계한희 디자이너의 Kye, 미니멀리즘과 정교한 커팅을 추구해 입는 사람을 우아하게 만들어준다는 정미선의 노케제이 등은 사실 자세한 소개가 무색할 만큼 이미 관심이 뜨겁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중국, 영국에도 진출한 디자이너 한현민의 남성복 브랜드 'Muun(뮌)', 영국 정치학박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김무홍 디자이너의 '무홍', 지난 2월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성당에서 열린 패션쇼에서도 선을 보인 김태근 디자이너의 '요하닉스'의 무대도 눈여겨볼만 하다.
무대에서 가끔 재미있는 실수가 일어나는데, 어쩌면 일부러 연출한 헤프닝처럼 자연스럽게 쇼에 녹아든다. 재작년인가 남성복 디자이너인 장광효의 카루소 패션쇼장에서의 일이다. 쇼를 시작한 지 1분여 만에 음향 사고가 나서 음악이 끊겼다. 갑자기 음악이 끊겼는데도 모델 20여 명은 1초의 주저함이 없이 리허설 때의 동선 그대로 자연스럽게 런웨이를 누볐다. 관객들도 단 한마디의 잡음 없이 미동도 없이 쇼에 집중했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무대에서 객석에 있던 홍석천이 "브라보!"를 외치자 그제야 다들 기립박수를 쳤다.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패션쇼의 해프닝으로 회자되고 있다.
패션쇼장 밖에서도 재미와 볼거리가 많다. 지난 해, 패션계의 원로인 진태옥의 아카이브를 전시한 명예의 전당에 이어 올해 행사에서는 이딸리아나 한혜자 디자이너가 '촉각'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한다. 국내 패션 태동기인 1960년대 명동의 의상실에서 시작하여, 청담동 패션디자이너 스트리트를 시작한 주역인 한혜자의 히스토리는 10월 18일부터 11월 9일까지 DDP 배움터 둘레길에서 무료로 개방된다. 세계에서 날아온 바이어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트레이드 부스, 입이 쩍 벌어지는 라인업의 멘토링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나눔관 외에 떠들썩한 곳이 또 있다.
패션위크 내내 DDP 광장은 전국, 아니 세계각지에서 온 패션 피플들로 들썩인다. 스트리트 패션을 찍는 사진작가들이 살맛 난다고 할 정도로 한껏 개성과 멋을 살린 감각적인 패피들은 다 이 광장에 모인 듯하다.
평소에는 시도하기 부담스러운 아이템이나 메이크업을 이날만큼은 시도해도 용서가 된다. 지금은 바로 서울패션위크, 여기는 DDP니까!
이화정(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퐈정리 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하며 패션지 with, 마이웨딩과 조선일보 화요섹션에서 스타일 전문 기자로 일했다. 뷰티, 패션, 레저, 미식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라이프스타일 전문가.
iuiu22
2016.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