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책의 재킷
북디자이너 박연미가 아름다운 물성을 가진 책을 소개합니다. 재킷을 벗기고 안쪽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세 권의 책.
글 : 박연미 사진 : 박연미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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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나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옷차림도 산책하듯 편안한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러다 가끔 상황에 따라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가장 만만하게 손이 가는 건 재킷이다. 분위기에 따라 안에 받쳐 입는 이너웨어의 종류는 달라지는데, 패션피플은 아니지만 재킷과 이너의 조합에는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 컬러, 형태, 소재, 패턴 등 조화를 고려하며 하나하나 고르게 된다. 평소엔 캐주얼한 옷차림이 익숙하다 보니, 가끔 재킷을 입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단정하게 차려 입은 기분이 든다. 기분도 살짝 좋아진다. 길에서 아이의 담임 선생님을 갑작스레 마주치더라도 당당하게 인사드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책에도 ‘재킷’을 입히는 경우가 있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단단한 하드커버로 내용(본문)을 보호하고 더스트 재킷(dust jacket, 책에서 분리 가능한 외부 커버)으로 덧쌌다. 단단한 합지로 커버를 만드는 양장본은 오래도록 이처럼 커버와 재킷의 이중 구조로 제작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재킷을 생략하고 하드커버만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본적인 보호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 그런데 양장본이 아닌 소프트커버 형태의 지장본에 굳이 더스트 재킷을 덧씌운 책들이 있다. 보통 소프트커버 책은 앞뒤 날개를 접어 하나의 일체형 커버로 제작하는데, 날개 없이 매끈한 커버 위에 재킷을 한 겹 더 입힌 이 책들은 어떤 감각으로 독자를 마주하고 있을까. 재킷을 벗기고 안쪽 커버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몇 권의 책이 있다. 책이 입고 있는 ‘재킷’이 어떻게 이너웨어와 조응하는 걸까. 

 


『모두가 듣는다』

루시드폴 저 | 김민해 표지디자인, 이은정 이연경 본문디자인 | 돌베개

 

루시드폴의 에세이로 첫인상은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그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귤농사를 짓는 그를 떠올리며 다시 제목을 들여다보니, 표지 이미지는 제주 바람에 눕는 들판의 풀을 닮아 보이기도 했다. 디자이너의 코멘트를 찾아보니 본문에 실린 저자 사진 중 하늘을 나는 새 장면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새 떼의 궤적을 따라가는 셔터음까지 들리는 듯하다. 재킷은 돌의 표면처럼 다소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미색 용지(두성 프리터)로 제작되었고 그 안쪽에는 청회색 용지(두성 플로라) 위에 동일한 드로잉이 한 번 더 담겨 있다. 재킷을 넘겨 안쪽 커버를 마주할 때, 담담한 색감의 대비와 종이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달래준다. 대개는 눈에 거슬리기 마련인 홍보용 띠지도 이 책에서는 연노랑 색감 하나로 꼭 필요한 구성처럼 느껴진다. 재킷과 속표지, 띠지까지, 세 가지 색과 감촉이 만나 책을 펼치기도 전에 독자의 마음을 먼저 다독여 준다.


 

『먹이는 간소하게』 『안주는 화려하게』

노석미 저 | 이은하 디자인 | 사계절

 

화가 노석미의 음식 에세이 신작 『안주는 화려하게』가 출간되며 7년 전 출간된 『먹이는 간소하게』도 함께 재출간되었다. 두 권의 제목이 이루는 장단도 좋고, 간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작가 특유의 그림과 디자인 또한 인상적이다. 재킷에는 텃밭을 가꾸는 작가의 모습과 고양이와 함께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음식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음식 자체는 표지에 등장하지 않는다. 재킷을 넘기면 그제야 흰 커버의 아래쪽에 타원형의 음식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디자이너의 의도일까? 재킷 용지가 약간 얇아 속커버의 이미지가 희미하게 비쳐 보인다. 그 덕분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끌리고, 겹겹의 이미지 속에서 작가의 일상과 식생활이 은근하게 겹친다. 양평의 작업실에서 농사를 짓고, 반려묘와 함께 살아가는 작가의 삶이 먹는 행위와 나란히 배치된 것이다. 더스트 재킷과 속커버의 조합이 이중 구조를 형성하며, 책 형태가 작가의 생활을 닮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음악소설집』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 저 | 퍼머넌트 잉크 디자인 | 프란츠

 

음악 전문 출판사에서 다섯 명의 소설가에게 음악을 주제로 글을 청탁해 엮은 소설 앤솔러지. 표지에는 꼭 필요한 텍스트 요소만 인쇄되어 있고, 그 배경으로는 마치 음표 머리를 연상시키는 타원형 점들이 흩날리고 있다. 표지 이미지로만 보면 연한 색이 배경처럼 깔린 듯하지만, 실제 책을 보면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반투명의 재킷 용지가 마치 안개 속에 싸인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프트커버에 더스트 재킷을 덧씌운 구조에서, 이 재킷 용지가 어떤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재킷 용지는 투명도가 높은 트레싱지다. 디자이너는 반투명한 재질 위에 재킷과 속커버라는 두 레이어로 어떻게 조형과 이야기를 설계할 것인지 고민한다. 부드러운 안개 같은 재킷을 넘기면 음표 머리와 한자 제목이 유광박으로 찍어 반짝이는 순간을 만든다. 두 대비되는 질감이 만드는 시각적 경험은 하나의 용지에 평면적으로 인쇄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감각이다. 재킷과 속커버 사이, 공기반 스토리반이 존재한다. 

 

*

 

캐쥬얼한 스타일의 옷차림이 대부분인 사람이 재킷을 입는다는 건 때로는 스스로에게 격을 부여하는 일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소프트커버에 재킷을 두른 책은 그 자체로 조금 더 격이 생기게 된다. 겉과 속이 교차하며 드러내는 조화는 책이 품고 있는 분위기와 스토리를 한층 더 깊고 섬세하게 만든다. 

 

재킷이 책과 분리되는 구조이다 보니, 도서관처럼 보관과 관리가 중요한 곳에서는 재킷 없이 속커버로만 책을 보관한다. 작업자로서 다소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스트 재킷 형식의 책을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잠시 시간을 들여 재킷을 넘기며 겉과 속의 관계를 살펴보는 소소한 재미를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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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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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모양실타래

2025.07.29

세상에! 언제 연재까지 하시는 거예욧! 글이 너무 좋네요... 무선에 재킷이라니 요즘 제작비 추세로는 당분간 엄두도 못 낼 것 같아 더더욱 부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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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는 간소하게

<노석미>

출판사 | 사계절

안주는 화려하게

<노석미>

출판사 | 사계절

음악소설집

<김애란>,<김연수>,<윤성희>,<은희경>,<편혜영>

출판사 | 프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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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미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릿터>, 『밀란쿤데라 전집』, 『레닌 전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옥의 몽상』 『돌봄과 작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소설, 에세이,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2022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제52회 한국출판공로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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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1959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고 전주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과 내면적 상처에 관심을 쏟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여 젊은 작가군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등단 3년만인 1998년에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국문학번역원 비상임이사(제4대, 임기3년), 문화관광부 한국문학예술위원회 문학위원회 상임위원, 미국 워싱턴대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이렇게 살다 내 인생 끝나고 말지` 하는 생각에 노트북 컴퓨터 하나 달랑 챙겨 들고 지방에 내려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은희경의 인생을 바꿨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자, 산사에 틀어박혀 두 달 만에 『새의 선물』을 썼다. 이 작품이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하면서 필명을 날리게 되었다. 한 해에 신춘문예 당선과 문학상 수상을 동시에 한 작가는 1979년 이문열, 1987년 장정일 이후 처음이었다. 또한 1997년에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제10회 동서문학상을, 1998년에 단편소설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 2000년에 단편소설 『내가 살았던 집』으로 제26회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은희경은 등단한 다음 해부터 2년 동안 엄청난 양의 작품을 소화해냈다. 해마다 2000매 이상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은희경 소설은 무엇보다 ''잘 읽힌다''는 것과 무척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뒤에는 단순한 유머가 아닌 진한 페이소스를 숨기고 있다. 은희경 소설의 매력은 소설의 서사 진행 과정중 독자들 옆구리를 치듯 불쑥 생에 대한 단상을 날리는 데 있다. 그녀의 소설을 흔히 사랑소설 혹은 연애소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희경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상투성'', 그로 인해 초래되는 진정한 인간적 소통의 단절"이라고 한다. 그녀를 따라 다니는 또 하나의 평은 ''냉소적''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이나 인간에 대해 환상을 깨고 싶어한다. 그녀에 의하면 ''사랑의 가장 커다란 병균은 사랑에 대한 환상''이다. 그녀는 사랑에 관한 이 치명적인 환상을 없애기 위해 사랑을 상대로 위악적인 실험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마이너리그』는 58년 개띠 동창생 네 친구의 얽히고 설킨 25년 여 인생을 추적하면서 '마이너리그'란 상징어로 한국사회의 '비주류', 그러나 실제로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해당될 수밖에 없는 '2류인생'의 흔들리는 역정을 경쾌한 터치로 그려낸 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갖가지 허위의식, 즉 패거리주의 학벌주의 지역연고주의 남성우월주의 등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가운데, 주인공들의 마이너 인생을 애증으로 포옹한다. 작가는 권두의 '작가의 말'에서 "내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사회적 상황은 한때 나로 하여금 남성성에 대한 신랄함을 갖게 했다. 이제 나를 세상의 남성과 화해하게 만든 것은 삶의 마이너리티 안에서의 동료애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불완전한 도중(道中)에 있다"라고 말한다. 저서로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상속』,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중국식 룰렛』,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이너리그』, 『그것은 꿈이었을까』, 『비밀과 거짓말』,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태연한 인생』, 『소년을 위로해줘』, 『빛의 과거』가 있다. 문학동네소설상,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