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나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옷차림도 산책하듯 편안한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러다 가끔 상황에 따라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가장 만만하게 손이 가는 건 재킷이다. 분위기에 따라 안에 받쳐 입는 이너웨어의 종류는 달라지는데, 패션피플은 아니지만 재킷과 이너의 조합에는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 컬러, 형태, 소재, 패턴 등 조화를 고려하며 하나하나 고르게 된다. 평소엔 캐주얼한 옷차림이 익숙하다 보니, 가끔 재킷을 입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단정하게 차려 입은 기분이 든다. 기분도 살짝 좋아진다. 길에서 아이의 담임 선생님을 갑작스레 마주치더라도 당당하게 인사드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책에도 ‘재킷’을 입히는 경우가 있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단단한 하드커버로 내용(본문)을 보호하고 더스트 재킷(dust jacket, 책에서 분리 가능한 외부 커버)으로 덧쌌다. 단단한 합지로 커버를 만드는 양장본은 오래도록 이처럼 커버와 재킷의 이중 구조로 제작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재킷을 생략하고 하드커버만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본적인 보호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 그런데 양장본이 아닌 소프트커버 형태의 지장본에 굳이 더스트 재킷을 덧씌운 책들이 있다. 보통 소프트커버 책은 앞뒤 날개를 접어 하나의 일체형 커버로 제작하는데, 날개 없이 매끈한 커버 위에 재킷을 한 겹 더 입힌 이 책들은 어떤 감각으로 독자를 마주하고 있을까. 재킷을 벗기고 안쪽 커버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몇 권의 책이 있다. 책이 입고 있는 ‘재킷’이 어떻게 이너웨어와 조응하는 걸까.
루시드폴 저 | 김민해 표지디자인, 이은정 이연경 본문디자인 | 돌베개
루시드폴의 에세이로 첫인상은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그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귤농사를 짓는 그를 떠올리며 다시 제목을 들여다보니, 표지 이미지는 제주 바람에 눕는 들판의 풀을 닮아 보이기도 했다. 디자이너의 코멘트를 찾아보니 본문에 실린 저자 사진 중 하늘을 나는 새 장면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새 떼의 궤적을 따라가는 셔터음까지 들리는 듯하다. 재킷은 돌의 표면처럼 다소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미색 용지(두성 프리터)로 제작되었고 그 안쪽에는 청회색 용지(두성 플로라) 위에 동일한 드로잉이 한 번 더 담겨 있다. 재킷을 넘겨 안쪽 커버를 마주할 때, 담담한 색감의 대비와 종이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달래준다. 대개는 눈에 거슬리기 마련인 홍보용 띠지도 이 책에서는 연노랑 색감 하나로 꼭 필요한 구성처럼 느껴진다. 재킷과 속표지, 띠지까지, 세 가지 색과 감촉이 만나 책을 펼치기도 전에 독자의 마음을 먼저 다독여 준다.
노석미 저 | 이은하 디자인 | 사계절
화가 노석미의 음식 에세이 신작 『안주는 화려하게』가 출간되며 7년 전 출간된 『먹이는 간소하게』도 함께 재출간되었다. 두 권의 제목이 이루는 장단도 좋고, 간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작가 특유의 그림과 디자인 또한 인상적이다. 재킷에는 텃밭을 가꾸는 작가의 모습과 고양이와 함께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음식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음식 자체는 표지에 등장하지 않는다. 재킷을 넘기면 그제야 흰 커버의 아래쪽에 타원형의 음식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디자이너의 의도일까? 재킷 용지가 약간 얇아 속커버의 이미지가 희미하게 비쳐 보인다. 그 덕분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끌리고, 겹겹의 이미지 속에서 작가의 일상과 식생활이 은근하게 겹친다. 양평의 작업실에서 농사를 짓고, 반려묘와 함께 살아가는 작가의 삶이 먹는 행위와 나란히 배치된 것이다. 더스트 재킷과 속커버의 조합이 이중 구조를 형성하며, 책 형태가 작가의 생활을 닮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 저 | 퍼머넌트 잉크 디자인 | 프란츠
음악 전문 출판사에서 다섯 명의 소설가에게 음악을 주제로 글을 청탁해 엮은 소설 앤솔러지. 표지에는 꼭 필요한 텍스트 요소만 인쇄되어 있고, 그 배경으로는 마치 음표 머리를 연상시키는 타원형 점들이 흩날리고 있다. 표지 이미지로만 보면 연한 색이 배경처럼 깔린 듯하지만, 실제 책을 보면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반투명의 재킷 용지가 마치 안개 속에 싸인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프트커버에 더스트 재킷을 덧씌운 구조에서, 이 재킷 용지가 어떤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재킷 용지는 투명도가 높은 트레싱지다. 디자이너는 반투명한 재질 위에 재킷과 속커버라는 두 레이어로 어떻게 조형과 이야기를 설계할 것인지 고민한다. 부드러운 안개 같은 재킷을 넘기면 음표 머리와 한자 제목이 유광박으로 찍어 반짝이는 순간을 만든다. 두 대비되는 질감이 만드는 시각적 경험은 하나의 용지에 평면적으로 인쇄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감각이다. 재킷과 속커버 사이, 공기반 스토리반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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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쥬얼한 스타일의 옷차림이 대부분인 사람이 재킷을 입는다는 건 때로는 스스로에게 격을 부여하는 일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소프트커버에 재킷을 두른 책은 그 자체로 조금 더 격이 생기게 된다. 겉과 속이 교차하며 드러내는 조화는 책이 품고 있는 분위기와 스토리를 한층 더 깊고 섬세하게 만든다.
재킷이 책과 분리되는 구조이다 보니, 도서관처럼 보관과 관리가 중요한 곳에서는 재킷 없이 속커버로만 책을 보관한다. 작업자로서 다소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스트 재킷 형식의 책을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잠시 시간을 들여 재킷을 넘기며 겉과 속의 관계를 살펴보는 소소한 재미를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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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듣는다
출판사 | 돌베개
먹이는 간소하게
출판사 | 사계절
안주는 화려하게
출판사 | 사계절
안주는 화려하게 + 먹이는 간소하게 세트
출판사 | 사계절
음악소설집
출판사 | 프란츠

박연미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릿터>, 『밀란쿤데라 전집』, 『레닌 전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옥의 몽상』 『돌봄과 작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소설, 에세이,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2022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제52회 한국출판공로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별모양실타래
202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