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전에도 글 안으로 온전히 들어갈 때까지 예열 시간이 긴 편이다. 사실 예열 시간이라는 표현은 거창하고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이고 실상은 자질구레하고 산만한 일들을 한참 한 뒤에야 비로소 한 문장을 쓸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펜촉을 갈고 노트를 뒤적거리고 책장 앞을 서성거리고 휴대폰으로 SNS에 접속해서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이 시간이 점점 길어져서 고민이다).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어질 때까지 딴짓을 해야 홀가분하게 글로 옮겨 갈 기분이 생긴다. 물론 마감이 코앞에 닥쳤을 때는 예열 시간 운운할 틈도 없이 쓰고 지우며 쩔쩔매지만 여유가 많을 때의 글쓰기는 부끄럽게도 대체로 이런 모양새다.
출산이 두어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출산 준비물을 장만해야 했다. 임신 초기부터 자주 접속하던 카페에 들어가 출산 준비물에 대해 검색하자 다양한 물건들의 리스트가 떴다. 가제수건, 배냇저고리, 속싸개, 겉싸개……. 아기가 쓰는 물건들은 이름이 정답고 따뜻해서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쓰기에 적당한 물건이 어느 정도인지,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며 가족들이 무엇을 준비해놓고 환대하면 좋을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름에 태어나는 아기, 겨울에 태어나는 아기에게 필요한 것도 조금씩 달랐다. 누군가가 미리 꾸며놓은 아기 방은 너무 화려했고 어떤 사람의 리스트에는 너무 많은 물건이 담겨 있었다. 나는 육아를 하고 있는 엄마나 예비 엄마들이 올린 품목 중에서 중복되는 것만 추려서 나만의 출산 준비 목록을 만들었다. 아이에 관해서는 언제나 부족하다 싶게 하자는 마음을 매 순간 되새겨야 했다.
어렵게 목록을 만들어놓은 뒤에는 큰일을 끝내놓은 것 같은 뿌듯함이 있었지만 막상 물건을 사러 가야 할 순간이 되자 차일피일 미루었다. 지금 사다 놓아도 넣어둘 데가 없다, 일단 아기를 위한 공간 확보부터 해야 한다, 그럼 책상을 하나 없애자. 그런데 물건을 어디에서 사지? 좀 더 근원적이고 다양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위한 준비가 한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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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