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 에디터
3. 오반칙 퇴장을 주의하라
나름 길다고 생각했던 여행은 짧은 에피소드로 남았고, 1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음식물 처리기가 돌아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다. 주행을 갓 마친 모터사이클의 연료 통처럼 겉면이 뜨끈해지는 게 느껴진다.
'서서히 음식물이 바짝 마르겠군.'
2018년 5월, 결혼을 기점으로 나의 에고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몇 년 뒤 아이까지 태어나면서 소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쓰던 남자는 육아 일기를 쓰는 양육자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1년 동안 온전히 아이를 돌보며 주 양육자로 보낸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었고, 덕분에 에고를 온전히 분쇄할 수 있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돌잔치 날 신을 양말 때문에 싸운 이야기다. ‘굳이 양말 갖고 다툰다고?’ 싶겠지만 양말에 못난 에고를 동일시하던 시절이었다.
2023년 4월. 돌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차 안에서 아내와 다투고 말았다. 서서히 억양이 높아지다가 아차, 싶어 송이를 살폈다. 행사 주인공은 피곤했는지 이미 자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이따 집에서 마저 이야기하자.”
오후 9시 30분이 넘어 집에 도착했고, 송이는 마지막 분유도 마시다 말고 잠들었다.
‘피곤한데 내일 이야기할까?’
‘아니야, 서로 불편한 기분으로 시간만 끌면 오히려 안 좋을 거야.’
그 와중에 맥주 한 모금이 절실해 캔 하나를 땄다. 치이익. 효모가 발효하면서 내뿜는 탄산가스 소리가 유독 요란했다. 그날 밤은 그동안 쌓인 걸 다 꺼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설령 그게 맥주 거품처럼 시간이 흐르면 꺼질 걸 알면서도.
아내는 물 한 잔, 나는 맥주 한 잔을 놓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서로에게 서운한 게 있으면 하나씩 말해 보자. 고쳤으면 좋겠는 점도 하나씩 알려 줘.”
내가 하나씩 알려 달라고 한 이유는 단순하다. 둘 이상 넘어가면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조차 고치기 어려워 집안 행사를 마칠 때마다 티격태격해 왔다. 예전에도 사소한 아이템 때문에 다툰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넥타이와 정장 양말이다. 역시 사소하긴 마찬가지. 모두 내가 챙겨야 하는 것들이다.
“송이 돌잔치 때 당신 넥타이랑 정장 양말만 잘 챙겨 줘. 검정 양말 신어 줘.”
몇 주 전부터 아내가 신신당부를 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챙기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육아 휴직을 개시하기까지 회사 일을 마무리 짓느라 바빴고, 휴직 뒤에는 육아를 전담하느라 매일매일 그로기 상태가 되어 뻗었다. 한편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는 꼬박꼬박 치러 갔으니 변명이 맞다. 실은 무심했다.
아내는 돌잔치에 관한 모든 걸 준비했다. 나는 넥타이와 정장 양말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해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다른 색상의 양말을 준비했다. 이렇게 팩트만 적으면 잘잘못이 분명한데, 어리석은 나는 또 실수를 범했다. 연료가 다 떨어진 전투기 안에서 비상 탈출 핸들을 당겼어야 했는데 전투기를 살리겠다며 비상 착륙을 시도한 격이랄까.
“그깟 양말 하나 내 마음대로 신게 좀 내버려 둬. 왜 이것까지 간섭해?”
전투기는 비상 착륙에 실패했고 거친 바다 표면에 수직으로 박혔다. 아내 마음에도 생채기가 났다. 육아 휴직을 사용하며 다짐한 게 세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 때문에 깨져 버린 순간이었다. 아내에게 화내지 않기. 아이에게 화내지 않기. 스스로에게 화내지 않기.
아내는 나보다 앞서 1년 3개월 동안 육아에 전념했다. 출산휴가와 육아 휴직 동안 내게 서운한 점을 토로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마지노선이었어. 이거 끝날 때까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버티고 또 버텼다고. 당신 육아 휴직 때 곰곰이 느껴 보길 바라.”
야근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내 귀가 시간은 종종 오후 8시를 넘기는 등 애매하게 늦었고, ‘오늘은 꼭 일찍 퇴근하겠다’는 말로 아내를 더 힘들게 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육아 휴직 겨우 3주 만에 일상이 버겁다고 느꼈다.
‘누가 주부들이 집에서 쉰다고 했어?’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해내는 건,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곤란한 업무였다. 어쩌다 아내가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그렇게 든든하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7시까지만 귀가해 줘도 기쁘더라.
자정 무렵, 나는 다툼 막바지에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고 너무 피곤해진 우리는 금세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영문도 모를 송이가 먼저 깼다. 아내가 늦잠을 잘 수 있도록 나는 송이를 유아차에 태워 밖으로 나섰다. 일요일의 청계천은 전날 다툼이 가소로울 정도로 평화로웠고, 공기도 모처럼 깨끗하고 상쾌했다.
마트에서 장만 보고 오려고 했는데, 아까운 날씨라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도 좋은데, 근처에서 간단히 아점이라도 먹을까?”
송이가 낮잠이라도 자면 참 좋았을 텐데, 아이는 도무지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대신 신당 중앙시장 근처에 갓 생긴 에스프레소 바에 들러 음료를 한 잔씩 주문했다.
네가 변해야 모든 게 변한다
Everything Changes When You Change
에스프레소 바 유리창에 붙은 문구를 읽으며 현타가 왔다. 작가이자 연설가 짐 론Jim Rohn의 말이란다. 우리의 부부싸움에는 패턴이 있다. 갈등 상황에서 둘 다 서로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인데 매번 내 말이 엇나간다. 후반부에 이르면 뿌옇던 게 또렷이 보인다. 그건 바로 내 잘못. ‘이번에도 내 잘못이 맞구나.’ 상대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며 복기해 보면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빳빳한 재질의 새 검정 양말 하나만 잘 챙기면 됐을 일인데. 나부터 변했어야 했는데. 머쓱해진 나는 짐 론의 문장을 보며 다시 용서를 구했고, 우리는 다행히 다툰 뒤 24시간 내에 화해할 수 있었다.
“현 님이 당시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 같아요. 저도 반항아 기질이 있잖아요. 하지만 전 1차 경고를 절대 무시하지 않아요. 농구 경기에 비유하면 파울foul이잖아요. 파울이 누적되면 바로 퇴장당한다고요.”
며칠 뒤 지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는 내게 오반칙 퇴장*을 주의하라고 덧붙였다.
* 농구에서 5번 반칙하면 퇴장으로 해당 경기에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테크니컬 파울Technical Foul과 언스포츠맨라이크 파울Unsportmanlike Foul의 경우 2번만 받아도 바로 퇴장.
육아가 어려운 이유는 공동의 양육자가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함께 키우기 때문이다. 프로덕트는 하나인데 프로덕트 오너 또는 프로덕트 매니저가 여러 명인 셈이랄까. 부부 생활의 두 번째 챕터로서 긴밀한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4. 아빠 일어나, 눕지 마
긴밀한 소통은 아내와 나의 관계뿐 아니라, 아이와 나의 관계에서도 중요했다.
멋모르고 송이와 부산에서 단 둘이 한 달을 지낸 경험이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육아 휴직 7개월 차, 송이가 1차 반항기에 접어든 18개월 때였다. 타지에서 ‘(독박 육아가 아닌) 독점 육아’를 자처한 가운데, 바깥 음식에 탈이 난 송이를 돌보며 원룸 오피스텔에서 세끼를 꼬박 해 먹이는 동안 내 양육 스킬은 나날이 늘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광안리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곳에서 지냈다. 나는 물가 가까이 노는 아이를 붙잡는 꿈을 꾸다가 깨곤 했다. 전반적으로 평화로웠지만 현지에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이 은은한 긴장과 스트레스였다.
유일한 해방은 송이가 낮잠 자는 한두 시간, 또는 옆 도시 경주나 거제로 놀러 가는 차 안에서 잠시 잠들 때였다. 주말마다 송이와 나를 보러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오는 때면 반가움에 눈물이 절로 났다. 자존심? 나만 육아한다는 억울함? 인정 욕구? 모두 사치였다. 그저 아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송이가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하고 육아 휴직 후반에 접어들수록, 아내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졌다. 우리는 더 이상 크게 다툴 일도 없었다. 아빠가 정신을 차리든 말든, 본인을 사랑하든 말든, 송이는 눈부시게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 송이를 관찰하며 자연히 내 관심은 부모와 자식, 그중에서도 ‘아빠와 딸’의 관계에 집중하게 됐다. 휴직 기간 동안 본 영화가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그중 샬롯 웰스의 장편 데뷔작 <애프터썬>은 내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애프터썬>은 평범한 10대 소녀 소피가 그동안 자신에게 소홀했던 아버지와 단둘이 떠난 튀르키예 여행을 다룬다. 30대 소피의 시점과 당시 파편적으로 기록한 캠코더를 통해 재구성하는 형식이 독특한데, 그 시차 때문에 후반부는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인지 모호하다. 영화는 유년기에 보지 못한 걸,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된 소피의 감정을 세심히 묘사한다. 시간은 밤과 낮, 계절 변화를 일찍이 체감한 인간이 만든 중립적 개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감상적이며 슬픈 감정을 자아낼 수 있는지 깨달았다.
시간의 차이는 많은 걸 바꾼다. 송이의 시간이 더 흐르면, 영화 속 부녀처럼 나도 더 이상 사춘기 딸의 머릿속을 예측하기 힘들 테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영영 이별하겠지.
“아빠 일어나, 눕지 마.” 돌봄에 지친 내가 먼저 침대에 누울 때 송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모든 기억과 미련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 내 앞에 있을 송이는 어쩌지. 37년 일찍 태어난 나와 37년 늦게 태어난 송이 사이의 숙명이다. 가끔 먼 훗날을 상상하는데 복잡한 심정이 된다.
[비움을 시작합니다]는 9월 3일 출간하는
앤솔로지 『음쓰, 웁쓰』의 에피소드 일부를 소개한 에세이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음쓰, 웁쓰』를 통해 확인해 주세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음쓰, 웁쓰
출판사 | 에피케

손현
서울 북촌에 산다. 별일 없으면 간단히라도 세끼를 모두 챙겨 먹는다. 저녁은 가급적 아내와 다섯 살 송이와 집에서 먹고자 한다. 종종 아이가 남긴 음식은 내 몫이 되지만, 나조차 못 먹겠으면 음식물 처리기로 넘긴다. 이따금 모터사이클 배기음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소리의 근원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