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십대 시절만 해도 영도를 벗어나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고향을 떠나서 살겠다는 결심은 제법 난해한 꿈처럼 어렴풋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한 마음은 내 것만은 아닌 듯하다. 삼신할머니가 영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잡는다는 설은 영도 사람이라면 한번은 들어보았을 테니까. 이사를 나올 때, 자동차 트렁크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말 때문이었다.
“삼신할머니가 질투하신다. 뒤돌아보지 말거라.”
영도를 빠져나오고 나서야 차를 세워서 트렁크를 살펴보았다. 밥통이 저절로 열려서 속에 있던 용기가 튀어나오며 소리를 냈던 것이다.
“할머니가 쌀이라도 넣어줄 심산으로 밥통을 열었나 보다.”
나보다는 어머니의 기분이 더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벗어난 곳이라고는 영도와 마주한 송도 앞바다였으니 정색하며 할 얘긴 아니다. 이젠 외국도 여러 차례 드나들고, 여행자로 사는 것이 익숙해졌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 곳에서 지낸다는 것에는 반감이 선다. 어차피 돌아갈 곳은 땅 밑이요, 바다요, 하늘일 테니, 마음껏 자유롭고 싶은 게 여행자의 마음이다.
어쩌면 그 마음이야 말로 포구와 배의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득한 포구에서 출항하여 따사로운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때론 파도와 사투를 벌이는 한 척의 어선처럼 나는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침반이 있다. 떠오르는 해와 달,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저 하늘의 지도는 언젠가 내 뱃머리가 향해야 할 곳을 가르쳐주고 있다.
중리 포구를 찾아서
국내 유일의 도개교인 영도다리를 지나, 피난 시절 열차가 드나들었던 전차 종점, 바다의 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절영해안산책로, 아리랑 고개처럼 가파른 산복도로 교차로, 송도의 절경과 쌍둥이 꼴을 이루는 이송도, 75년에 완공되었다 해서 이름 붙여진 75광장을 지나면 부산 남(南) 고등학교가 나온다. 이름에 어울리게도 학교는 정남쪽으로 운동장을 내놓고 있어, 교문만 나서면 곧장 바다이다. 그러니, 점심시간에 담을 넘어 바다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나 역시 친구들과 어울려 점심시간에 교문 밖을 쏘다니기도 했지만 중리 해수욕장에나 발을 담갔지 포구를 어슬렁거려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회 맛은 모를 때요, 술맛은 더 모를 때니 그곳에 어떤 삶이 있는 지는 더더욱 모를 열여덟이었다.
중리 포구가 있는 동삼동은 동쪽에 있는 세 개의 마을이라는 뜻인데, 상리, 중리, 하리로 이뤄져 있다. 세 마을 모두 어촌계를 꾸리고 있었으나, 상리는 매립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섰다. 중리와 하리는 아직까지 활발하게 어업을 하고 있지만 태종대와 인접한 하리는 언제 매립될지 모르는 처지다. 남쪽으로 시야가 트인 중리 포구에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어 사는 어민들이 굳건하게 이 섬을 지키고 있다.
학교 후문에서 바라보면, 포구는 니은(ㄴ)자 모양으로 각이 지게 매립되어 파도를 피하고 있다. 입구가 워낙 좁아서 큰 배는 지나다닐 수도 없다. 소형 어선들이 마치 둥지속의 아기 새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앞바다에 미리 던져놓은 그물을 걷어 올리거나 줄낚시를 하는 배일 터였다. 낚시로도 유명한 중리이니 만큼, 언제 가더라도 낚시꾼을 만날 수 있다. 겨울이면 갯바위에 올라 감성돔을 잡으려는 강태공들로 넘쳐나고 봄이면 도다리를 맞이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벵어돔, 고등어, 전갱이, 노래미, 망상어, 학꽁치 등 손맛 찾아왔다면 덤으로 입맛까지 찾아갈 곳이 바로 중리 포구이다.
신석기 포구
신석기 시대의 폐기물 처리 생활 유적을 보여주는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東三洞 貝塚)은 문화연구를 위한 귀중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고래 뼈나 굴 껍질을 보면, 동삼동 패총인들이 고래를 포획하기도 했고, 깊은 바다에 들어가서 굴을 따오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바다를 자산으로 삼고 먹이를 구했다는 것인데, 아직까지 그 바다는 우리에게 풍부한 양식을 내어주길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곳에는 포구가 있을 수밖에 없다.
팔천년이 지나도록 조개껍질은 썩지 않았다. 파도는 억겁의 세월동안 바위를 깎았고, 큰 바위는 육지에서 떨어져 외따로이 섬이 되었다. 섬은 바다가 되었다가, 또 섬이 되길 반복했다. 전복의 씨는 섬의 은밀한 구석에 붙어 플랑크톤을 잡아먹으며 단단한 껍질을 만들었고, 해녀는 숨비소리를 내며 바위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바닥만 한 전복이 태어났던 때는 언제였던가. 살덩어리를 떼어내 내장을 발라 도마 위에 올리면 미끈한 점액이 바다 쪽으로 자꾸만 흘렀다.
중리 해녀촌은 갯바위를 의자로 만들어, 흘러드는 바닷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주정뱅이의 코를 찰싹 때릴 정도로 파도가 높았다. 해녀들은 그날 잡은 해산물을 싼 값으로 제공했다. 낙지 한 마리를 발밑까지 흐르는 바닷물에 세차게 씻어내고, 도마 위에 올려서 칼질하는 데에 이십 여초도 걸리지 않았다. 소주를 잔에 따르는 동안 가랑이까지 파도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중리 앞바다를 오갔는데도, 여전히 포구는 낯설고 매혹적이다. 젓가락 사이를 보란 듯이 빠져나가는 해삼과 멍게와, 그리도 미역과 이끼가 붙어 미끈거리는 갯바위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는 저 붉은 태양은, 식도를 타고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소주의 차가움은, 이내 쓰라리게 온몸을 휘감는 그 묘한 기분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태어나기 팔천년 전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조개를 까먹고 생선을 잡았다. 소주를 바다 쪽으로 한잔 따라준다. 파도가 유난히 춤을 추는 팔월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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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년의 포구이야기 오성은 저 | 봄아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의 축복받은 자연환경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포구를 간직하고 있다. 마도로스의 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나 아직 청춘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젊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행은 그곳에 서서 잠시 읽어보는 것, 그려보는 것,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누구나 지금 당장 푸른 바다를 품은 포구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이들 포구로 향하는 길은 분명, 언제나 청춘 같은 삶의 힘찬 생명력을 발견하는 기쁨이며, 다시 삶의 소중함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바다를 통해 더 넓고 깊은 마음을 품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만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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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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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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